소설리스트

교난-263화 (263/375)

263화. 양정(凉亭)

‘당연히 2년 안에 친부모를 찾고, 친부모가 대신 혼담을 꺼내주는 게 더 좋겠지만.’

정철은 친부모를 찾는 데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재산이 여유로워진 이후로, 그가 떠내려왔던 강을 따라 육출화재의 분점을 몇 군데 열었고 서재 옆에는 반드시 찻집도 함께 열어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어느 집에서 그해 아이를 잃었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가서 몰래 살펴보곤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수확이 없었다.

하지만 정철은 그의 친부모가 수도 혹은 서성(西城)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이런 결론을 내리는 건 정철에겐 어렵지 않았다.

매년 4월 생일이 다가오기 전, 그는 늘 몰래 정가촌에 갔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강의 유속을 계산했다.

그렇게 수년 동안 계산한 결과를 모아 비교해보니 서로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거기에다 함지에 담긴 갓난아이가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어디서 자신을 버렸는지 대략적인 범위를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강은 수도를 감싸고 있는 이강(離江)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강이었고 갈라지는 지점엔 다리가 하나 있다는 점이었다. 그 다리 아래의 받침돌들은 4-5월이면 토사가 쌓였기에, 만약 뭔가가 그 사이를 통과하게 되면 대부분 토사에 걸리거나 뒤집힐 터였다. 그리고 이강의 물을 서성으로 이끄는 인공강은 그 작은 강과 막힘없이 이어져 있었다.

확률상으로 보면, 함지에 담겨있었던 그는 서성에서부터 인공강을 따라 작은 강으로 들어가 정구백 부부에게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대량 수도는 동쪽보다 서쪽이 부유했고 황성은 서성의 가장 서쪽에 있었다. 황성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집안은 당연히 모두 훈귀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정철은 자신의 출신이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황제의 총애까지 받는다면 장원랑인 그를 아무나 쫓아내지 못할 터였다.

그는 자신을 강에 버린 부모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지만, 정당한 신분을 가져 당당하게 정미와 혼인하여 정미를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철 형님, 미 누님. 왜 여기 숨어서 몰래 이야기를 나누고 계세요? 가지요, 큰형님이 축국(蹴鞠)을 하신답니다.”

한흘이 달려와 정철을 끌어당겼다.

정미는 아쉬우면서도 오라버니 허리의 옥패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끌려가는 정철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청설림의 팔각정 앞엔 축국을 하기에 좋은 공터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참가하든 옆에서 구경하든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이 모두 공터로 모여들었다.

남 군주는 소매 속에서 도심이가 전한 손수건을 쥐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눈길을 돌려 정철을 찾았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공터로 걸어가는 정철을 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나도 사실 정가 오라버니와 그리 친하지 않다고.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갔다가 정가 오라버니가 오해하면 어떡해? 이럴 줄 알았으면 쉽게 승낙하지 말걸.’

남 군주가 부탁을 승낙하자, 도심이는 이곳에 남아있기가 불편해 술에 취해 어지럽다는 핑계를 대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기에 남 군주가 손수건을 돌려주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남 군주의 시선은 결국 복사나무 옆에 서 있는 정미에게로 꽂혔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쨌든 정미도 도심이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 손수건을 정미에게 주고 전달해 달라해야겠다.’

남 군주는 왕부에서 태어났지만, 딸 아이는 남 군주 하나뿐이었기에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워져 천진난만한 성정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이 방법이 떠오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미에게로 다가갔다.

“남 군주, 무슨 일이세요?”

정미는 복사나무에 기대 정철의 모습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정미는 이렇게 멀리서 그를 바라보며 자유를 느끼는 걸 좋아했다.

남 군주는 정미에겐 거리낌 없었기에 손수건을 건네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정미, 이걸…… 네 둘째 오라버니에게 전해줄 수 있어?”

“음?”

정미는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손수건을 빤히 쳐다봤다.

남 군주는 정미가 오해할까 봐 급히 설명했다.

“아이참, 정미. 너도 알잖아. 심이가…… 사실 계속 정가 오라버니를 연모하고 있었다는 걸. 지금 집안에서 혼사 문제로 압박을 많이 받나 봐. 그래서 정가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고 싶대…….”

‘오라버니의 무슨 마음을 알고 싶다는 거야? 그 마음은 다 내게 주었는데!’

정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좋아요. 제가 대신 전해줄게요.”

‘다른 아가씨 대신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서(戀書)나 다름없는 걸 전해주다니, 참 보기 드문 명예로구나!’

* * *

공터는 축국으로 떠들썩했고 반쯤 뛰고 나자 소년들은 밖에 서서 물을 마시고 땀을 닦았다. 그때, 어떤 여종이 정철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자님, 미 아가씨께서 팔각정에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정철은 어리둥절했지만 같은 조인 한평에게 말한 뒤 팔각정으로 향했다.

팔각정 뒤에는 산이 있었고 옆에는 연못이 있었다. 게다가 사방이 수목으로 가려져 더위를 피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방금까지 땀을 뻘뻘 흘렸던 정철은 팔각정으로 걸어가자 순식간에 몸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철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마 내가 더울까 봐 쉬러 오라고 부른 건가?’

정미는 정철이 걸어오는 방향으로 등을 지고 정자에 앉아있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철은 정미 앞으로 돌아갔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얼굴은 조금 달아오른 채였다.

“미미, 무슨 일이야?”

정철이 옆에 있는 돌의자에 앉았다.

정미가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정철은 웃으며 건네받더니 그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려 했다.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라버니, 손수건이 누구 건지는 안 궁금한 거야?”

“응?”

정철의 손이 멈칫했다.

정미가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어떤 아가씨가 오라버니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한 거라고.”

정철의 표정이 엄숙해지더니 손수건을 정미의 손에 쥐여주며 물었다.

“미미, 농담하는 거 아니지?”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내가 뭐 하러 오라버니에게 이런 농담을 해? 자, 손수건은 전달했으니 어떻게 답할지는 알아서 생각해.”

정철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코를 한 번 툭 치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 바보야, 오라버니가 무슨 답을 할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정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정자 근처의 가산 뒤, 화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정자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정미를 바라보는 정철의 따뜻한 눈빛이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져 자리를 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됐어, 어서 손수건을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 쓸데없이 화내지 말고.”

팔각정은 나무에 가려져 있었고 두 사람은 축국을 하는 공터를 등지고 있었기에 정철은 잠시 망설이더니 정미의 손을 잡고 작게 말했다.

“정말 바보라니까.”

정미는 당연히 더 화낼 수 없었다. 정철의 부드럽고 다정한 말이 들리자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러니까 어떤 아가씨인지 왜 안 물어보―”

정철이 정미의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미미, 그건 그만 물어. 어찌 됐든 내 답은 똑같으니까. 손수건의 주인이 누군지는 중요치 않아. 누군지 알아봤자 그 사람의 체면만 구기니 이게 서로에게 좋아.”

정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오라버니의 이 점이 좋다니까. 낯선 사람에게도 기본적인 태도와 다정함으로 대하니까.’

“이제 화 풀렸어?”

정철이 정미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정미는 고개를 돌려 공터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입을 맞춰주면 풀릴 것 같아.”

정철이 멈칫했다.

“미미, 갈수록 대담해지는 것 같구나.”

“아무도 이쪽을 안 보고 있잖아.”

정미는 고개를 반쯤 들고 정철을 쳐다봤다. 가까이 앉은 탓인지 정철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소녀는 가슴이 뛰어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어루만졌다.

정철은 그 장난스러운 손을 붙잡고 굳은 표정으로 꾸짖었다.

“허튼짓 말고. 오라버니도 이만 가야겠어. 안 그럼 부르러 올지도 몰라.”

그러고는 정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급히 일어나 떠나버렸다.

정미는 아쉬운 듯 손을 거두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늘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다니까. 그날 은행나무 아래에선 그렇게 적극적이었으면서…….’

그날의 장면이 떠오르자 정미는 저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져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를 떠났다.

* * *

3월은 아직 그리 덥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잠시 축국을 구경하다가 혹시나 햇빛 때문에 피부가 상할까 봐 둘 셋씩 모여 곳곳으로 흩어졌다.

정미는 이 기회를 틈타 남 군주와 함께 걸었고 손수건을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거절했어?”

남 군주는 예상했다는 듯 손수건을 챙겨 넣었다.

“거절한 것도 아녜요. 오라버니는 손수건이 누구 건지도 묻지 않았는걸요. 그냥 다시 돌려주라고만 했습니다.”

“그렇구나.”

남 군주는 그제야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미, 정가 오라버니도 이제 스물한 살이잖아. 슬하에 아이도 있을 나이라고. 다른 여인과 몰래 교제하고 싶지 않을 수는 있어. 하지만 아주 조금의 호기심도 없어 보이니?”

“마음이 없는데 누군지 알 필요가 있냐고 했어요. 그 사람이 난처할 테니까요.”

“누군지도 묻지 않았으면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정미가 남 군주를 흘끗 쳐다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당연히 오라버니에겐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누군데?”

남 군주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건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됐어, 어차피 혼인하는 게 아니라면 알려져봤자 좋을 거 없으니.”

남 군주는 통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작게 말했다.

“정미, 내가 듣기로는 안양 공주가 최근 네 둘째 오라버니에게 아주 치근덕거린다던데.”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양 공주가 치근거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황백부님이 묵인하신 것 같단 말이지.”

정미의 얼굴이 곧바로 창백해지더니 남 군주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이에요? 그 말은 황상께서―”

남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 오라버니가 정말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얼마 뒤 네게 공주인 올케언니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정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멍해졌다.

‘공주인 올케언니? 면수를 키우는 올케언니라고?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아가씨라도 그런 올케언니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미, 괜찮아?”

정미는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웃었다.

“괜찮아요. 저쪽으로 가서 차나 마시며 쉬도록 하지요.”

정미는 해산할 때까지 한추화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니느라 정철과 따로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하지만 때때로 그를 흘끗 쳐다볼 때면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정철의 눈과 마주쳤고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오라버니는 나와 약속한 일이라면 무조건 어기지 않았어.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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