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62화 (262/375)

262화. 손수건

현청관으로 돌아가는 길, 정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령진인이 물었다.

“현미,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북명진인은 고개를 돌려 마차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속이 아주 불편했다.

‘사부께서 나를 제자로 들였을 때, 나는 수시로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울어댔던 6살이었다. 하지만 사부께선 한 번도 내게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지 여쭤보지 않으셨지. 역시 나는 덤일 뿐이라 이리 차별하시는 게지?’

정미는 사형의 슬픔을 알지 못했기에 사부에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저 배울 게 그렇게나 많은데 시간은 너무 적어 늘 부족하게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청령진인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욱 열심히 배우거라.”

이틀 후, 정미는 청령진인의 거처에서 가까운 처소로 옮기게 되었고 그때부터 공부에 전념하여 속세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 * *

그렇게 순식간에 3월이 되고, 위국공 세자가 귀비마마의 수양딸이자 회인백부의 사촌 아가씨인 맹소를 맞이하는 길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3월은 혼인하기 좋은 시기여서 이 혼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많이 받았다.

맹소와 황궁의 관계는 둘째치고 회인백부의 사촌 아가씨라는 신분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혼례를 치르는 날, 회인백부 사람들이 위국공부로 가게 되면 꽤나 재밌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지의 혼례 전날, 한추화가 형무원에 찾아와 정미를 불렀다.

“한지가 내일 혼례를 치루니 오늘 청설림에서 연회를 열겠다고 했어.”

정미는 청설림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초대를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둘째 오라버니를 보지 못했는걸. 어제 산에서 내려와 집에 돌아오자마자 외조모님께서 작은 연회를 여셨고, 오라버니는 나와 몇 마디도 채 나누지 못하고 급히 위국공부를 나갔으니.’

지금 시기의 청설림은 그리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었지만 동남쪽 모퉁이에 있는 복사나무 몇 그루가 꽃이 무성하게 피어있었기에 연회는 그곳에서 열렸다.

위국공부의 어린 세대들, 화서를 포함한 경왕부의 용흔과 용남 남매, 사가의 남매, 그리고 위국공 부인 도 씨의 처가 조카인 도약연과 도심이도 함께 모였다.

대부분 수도에 살고 있었지만, 도약연 남매는 혼사를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연회석은 흔히 보이는 동그란 상이 아닌 길고 낮은 상이 이어져 있었다. 때문에 서로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늦게 출발했던 정미가 이제야 도착하자 용흔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정미, 일부러 네 자리를 맡아놨다. 어서 여기 앉거라.”

용흔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정미에게 꽂혔다.

정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라릴 뻔했지만 다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세손. 하지만 저는 둘째 오라버니 옆에 앉으면 됩니다.”

정미는 아무렇지 않게 정철의 옆에 앉았다.

사철이 용흔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웃었다.

남 군주는 이마를 짚었다.

‘오라버니의 낯짝이 이리 두꺼울 줄이야. 다른 아가씨에게 매정히 거절당하기까지 하고. 여동생으로서 너무 창피해!’

남 군주는 최근 몇 번이나 있었던 오라버니와 어머니의 다툼을 떠올랐다.

‘하지만 정미가 전설 속의 국사 대인의 제자가 된 이후로 어머니가 좀 누그러진 것 같았지.’

남 군주는 고개를 돌려 머리에 백옥관을 쓰고 두꺼운 자색 도포를 입은 오라버니를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상대는 전혀 생각이 없는데 오라버니가 넘겨짚어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오라버니가 아무리 기뻐 날뛰어봤자 정미는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미 언니, 말해줘. 어떻게 국사의 제자가 된 거야? 정말 궁금하다고.”

사효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미 언니는 내 예비 올케언니가 될 가능성이 큰데, 왜 경왕세손이 저리 적극적으로 구는 거람? 오라버니 대신 주시해야겠어.’

“기회와 인연이 딱 들어맞은 거 아닐까. 제생당에 자주 드나들다가 우연히 스승님을 한번 뵈었고, 내가 소질이 있다고 여기셔서 제자로 받아주셨어.”

정미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때, 한평이 입을 열었다.

“내일은 큰형님의 기쁜 날인데 다들 절대 형님을 봐주어선 안 됩니다. 자, 큰형님, 아우가 먼저 한 잔 올리지요. 앞으로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며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시길.”

한평의 말에 사람들의 주의력이 정미를 떠나게 되었고 술잔을 들고 각자 한지를 놀리기 시작했다.

사효는 몰래 한평을 살펴보며 얼굴을 붉혔다.

최근 두 집안이 자주 왕래하면서 사효도 당연히 위국공부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되었다.

‘평 오라버니의 외모는 평범하지만, 언행은 진중하지. 이 점만으로도 큰오라버니와 꽤 비슷한걸.’

정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정철과 눈이 마주치자 달콤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미, 산속의 생활은 어때?”

정철이 정미가 좋아하는 대추떡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쁘지 않아. 매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많은 일들을 직접 해야 하니, 몸이 꽤 가볍고 건강해진 것 같아.”

정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상 아래에선 몰래 손을 뻗어 정철의 손가락을 잡았다.

소녀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손가락은 늘 정철의 마음을 자극했지만 이런 긴 상은 둥근 상처럼 손을 잘 숨길 수가 없었다. 정철은 기분이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몰래 힘을 주어 손을 뺀 뒤 경고하듯 정미를 흘끗 노려봤다.

그러나 정미는 아무렇지 않게 대추떡을 먹다가 다시 손을 뻗어 손끝으로 정철의 손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일찍 자긴 했지만, 매일 누우면 오라버니 생각에 잠이 오지 않더라고.]

정철의 귀가 붉어졌다.

정미가 다시 글자를 적었다.

[오라버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다면 조금 슬퍼지는데.]

정철은 술잔을 쥔 채 눈을 내리깔았고 한참 뒤에야 작게 대답했다.

“보고 싶었어.”

정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정가 둘째 오라버니.”

이때 어디선가 소녀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가 눈을 들자 두 뺨을 살짝 붉힌 채 정철을 바라보고 있는 도심이가 보였다.

정미는 기분이 상했다.

‘남 군주가 말한 적 있어. 도심이가 둘째 오라버니를 연모한다고.’

“도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정철이 온화하게 되묻자 상 아래의 손이 갑자기 꼬집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심이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으나 심장이 요란히 쿵쿵 뛰었다.

‘늘 정가 오라버니의 이 모습을 좋아했지. 몇 년 전 처지가 험난했을 때도, 장원랑이 되어 앞날이 창창해졌을 때도, 늘 온화하고도 태연했어. 이런 사내라면 어떤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더라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곧 열일곱이라 집안사람들이 내 혼사를 자주 언급하기 시작했잖아. 오늘 꼭 기회를 잡아 정가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아내야겠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아쉽지는 않겠지.’

“그저 오라버니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것 같아서요. 술이 약하신가 봅니다?”

“어―”

정철이 입을 열자마자, 정미가 다시 세게 꼬집었다.

정미가 도심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조금 많이 마셨나 봐. 오라버니, 저쪽에 바람이 잘 부니까 나랑 가서 술 좀 깨자.”

정철이 어찌 감히 토를 달겠는가.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젊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다 서로 잘 아는 사이였기에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분위기가 제법 떠들썩해졌고, 그래서 그 누구도 정미와 정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미가 정철을 데리고 자리를 뜨자, 도심이는 답답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심이, 왜 그래?”

남 군주가 다가오자 도심이가 한숨을 쉬었다.

“군주, 저는 정미가 정요 언니보다 훨씬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남 군주는 예전엔 정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후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게다가 그 못 미더운 오라버니가 정미를 마음에 둔 게 확실하니 굳이 나쁘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딱히 그런 것도 아냐. 성정이 솔직해서 그렇지 마음에 든 사람은 진심으로 잘 대해주니까.”

“아, 그래요?”

‘내가 예전에 정미에게 냉담하게 굴어서 그 계집이 일부러 방해하는 건가?’

“심이, 도대체 왜 그래? 넋이 나간 것 같아.”

도심이가 남 군주의 손을 붙잡고 작게 말했다.

“군주, 저보다 정가 오라버니를 더 잘 아시니 저를……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뭘?”

도심이가 소매로 감추며 손수건을 하나 꺼내 남 군주에게 쥐여주었다.

“이 손수건을 저 대신 정가 오라버니에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오라버니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봐 주세요.”

남 군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쥐어보았다.

“이 손수건엔 아무것도 없잖아.”

도심이가 작게 말했다.

“정가 오라버니는 보면 아실 거예요.”

“하지만, 이건 너무 은밀한 거 아냐……?”

아무도 이쪽을 신경 쓰지 않자, 도심이가 눈을 내리깔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 제발 도와주세요. 저는 그저 정가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오라버니가 제게 마음이 없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으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알겠어. 내가 기회를 틈타 물어볼게.”

남 군주가 손수건을 챙겨 넣었다.

* * *

정미와 정철은 복사나무 옆에 서 있었다. 주변이 탁 트여있었기에 그들은 그저 단정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그간 현청관에서의 생활을 정철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정철은 미소를 머금고 듣다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깊고 거대한 저택보다는 깨끗하고 조용한 도관의 생활이 미미에게 더 잘 맞는구나.’

“저번에 입궁했을 땐 황손도 뵈었어. 살이 더 올라서 보기 좋더라고.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네.”

“유야는 꽤 잘 지내. 지금은 유일한 황손이니까 최소한 옷이나 음식 같은 데선 절대 소홀히 돌보지 않을 거야.”

정미가 정철을 흘겨봤다.

“오라버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는 방금 도심이와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려 한 것 때문에 화를 내려고 했지만, 도심이도 그리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정철도 아가씨의 마음을 아는 게 아니었으니 결국 화를 꾹 참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오라버니가 이렇게 멋진 사람인데, 도심이가 좋아하는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지. 너무 옹졸하게 굴지 말자.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빠. 오라버니에게 내 거라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육황자께 황손을 자주 보러 가달라고 부탁했거든.”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한 손으로 침을 날려 말벌을 벽에 꽂은 묘기를 보인 뒤로, 육황자는 장난꾸러기 같은 학생에서 충분히 얌전한 학생이 되었고 늘 정철의 능력을 배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때문에 정철은 그 이후로 순조롭게 강서를 할 수 있었다.

“그럼 다행이다. 이번에 산에서 내려온 김에 기회를 틈타 궁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거든.”

정철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미미, 네가 황손을 걱정하는 것도 태자비마마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알아. 하지만 최소 1-2년 간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황궁에 드나들지 않는 게 좋겠어.”

태자가 정씨 가문의 적녀와 혼인해야 하는 건 황실의 유훈이었기에, 태자비가 죽은 뒤 그 유훈은 정철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율법 상으론 미미와 정가는 아무 관계가 없어. 하지만 만일 황가에서 혈연을 따진다면? 최대한 존재감 없이 지내며 태자와 황가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지.’

문신(文臣)은 무장(武將)처럼 하루아침에 출정하여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문신이라도 천천히 경력을 쌓아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야 했다.

정철은 2년 안엔 관직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황궁에서 강의하게 된 기회를 틈타 황상의 총애를 받고, 다른 사람의 눈에 황제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야만 위국공부에 혼담을 꺼냈을 때 그나마 지장이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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