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61화 (261/375)

261화. 어디서 오는가

각자 자리에 앉은 뒤, 창경제가 정미를 보며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국사께서 모신 제자이지요? 짐도 아는 소저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자주 궁에 찾아왔었지요. 이리 큰 행운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경제에게 절을 올렸다.

“황상께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계시다니 황공하옵니다. 하지만 현미는 이제 회인백부의 셋째 여식이 아닙니다. 지금은 잠시 현청관에 머물며 스승님의 가르침을 새겨듣고 있습니다.”

창경제는 잠시 멍해졌다가 그제야 떠오른 듯 대답했다.

“생각났다. 한 씨와 정 소첨사가 이혼했지.”

황제는 조금 아쉬운듯했다.

“그 둘의 혼사는 짐이 하사한 것이거늘.”

‘억지로 성사시킨 일은 결국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는구나.’

사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혼은 창경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둘째 나리가 부임한 뒤 실종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는 이미 목숨을 잃었다 여겼지만 뜻밖에도 몇 년 후 기운찬 모습으로 수도로 돌아온 바 있었다.

그는 준수한 외모를 가졌기에 관복을 입으면 꽤 맵시 있었다. 창경제는 둘째 나리가 명이 길고 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했고 거기에다 능력도 있으니 자연스레 그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씨가 궁으로 와 사혼을 부탁했을 때, 창경제도 사내 쪽에서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후의 체면과 위국공부에 더는 유력한 혼사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한 씨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20년이 흐르고, 양쪽 모두가 이혼을 부탁하니 창경제는 탄식하며 허락해주었다.

“국사, 짐은 몹시 궁금하군요. 어쩌다 현미를 제자로 삼으신 겁니까?”

동락전 안은 등불이 환하게 비춰 대낮처럼 밝아 청령진인의 은발은 쏟아지는 달빛 같아 보였다. 그토록 존귀한 황제 앞이라 해도 신비한 느낌이 절로 났고 창경제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각별히 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얼굴도 변하지 않는 국사 대인을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아직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린 황자였을 때, 태후가 창경제를 슬하에 키워 이 자리까지 올린 이유도 바로 이 국사가 그에게 황제가 될 운명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한마디로 창경제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처음엔 그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황위를 계승 받을 때 선황에게서 전달받은 책자엔 역대 제왕만이 볼 수 있는 비록(祕錄)이 적혀 있었고, 역대 국사가 대량의 강산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또한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현묘한 일들을 하나씩 훑어보자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역대 국사는 절대 공공연히 속임수를 쓰는 자들이 아니었고 모두 비범한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대전은 아주 조용했고 청령진인의 옅은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그저 당연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비범한 소질을 가진 제자가 저와 스승의 연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에 창경제는 물론이고 화 귀비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

‘국사가 정가 셋째의 소질을 이리 높게 사다니. 내가 이전에 그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청령진인의 아랫자리에 앉아있던 북명진인마저 참지 못하고 스승을 흘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스승님이 사매를 이리 높이 평가하시다니. 나를 제자로 삼을 땐 이렇게 확신하지 않았거늘.’

북명진인은 나이가 적지 않았기에 어릴 적의 일이 또렷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래, 기억났다. 그때 사촌 동생이 있었는데, 스승님은 원래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셨지. 하지만 사촌 동생이 나와 사이가 너무 좋은 탓에 나와 떨어지기만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산에 올랐고…….’

자신은 그저 덤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북명진인은 기분이 좋지 않아 원망하는 눈빛으로 스승을 흘끗 쳐다봤다.

“그렇다면 지난번엔 현미를 오해한 것이로군. 귀비, 그렇지 않소?”

창경제가 화 귀비를 쳐다보자 화 귀비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지었다.

“신첩의 불찰이 맞습니다. 현미 도장, 본궁이 여기서 사과드리지요.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화 귀비는 후궁을 휘어잡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태자가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수록 지위가 굳건해지자 황상에게조차 이 정도로 조심스럽게 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마음속 울화와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미가 몸을 살짝 숙였다.

“현미가 어찌 감히요. 단지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마마께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정미는 현청관 그리고 사부 덕분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정미의 사부는 역임 황제가 모두 그러했듯 황실의 존중과 배려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세상은 황가의 것이나 마찬가지라, 제왕의 존중과 배려를 받는다고 해서 그리 든든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미도 자신에게 새로운 신분이 생겼다고 거리낌 없이 누군가를 짓밟을 수 있으리라 여기진 않았다.

최소한 지금은 겉으론 화 귀비를 존중하는 척해야 했다.

“현미 도장, 말씀하세요.”

정미가 꼿꼿이 서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황손을 뵙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리 지나치지 않은 요구였고 앞서 화 귀비가 사과까지 한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현미 도장은 황손의 이모이지 않습니까? 황손을 보고 싶다 하시면 본궁도 당연히 동의하지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요에게 말했다.

“소야, 이따 네가 현미 도장을 모시고 가거라.”

정요가 무릎을 내밀며 대답했다.

“예.”

연회가 시작되고 감미로운 노래와 아름다운 춤이 펼쳐졌지만 정미는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연회가 끝나자, 창경제는 청령진인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미는 마침내 자리를 떠나 정요와 함께 동궁으로 갈 수 있었다.

* * *

동궁은 동락원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궁녀 두 명이 앞에서 등을 들고 앞장섰다.

“지금 시간이면 황손도 이미 잠들었을 겁니다.”

정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정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이제 정요에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미가 냉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본 체도 하지 않자 정요는 꾹 눌러왔던 감정이 갑자기 폭발해 정미의 손목을 붙잡고 작게 따졌다.

“어떻게 한 거야?”

정미는 마치 여기저기 소란만 피우고 다니는 망나니를 보듯 차갑게 그녀를 쳐다봤다.

정요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부르짖었다.

“말해. 어떻게 한 거야? 너도 ‘그곳’에서 온 거지?”

“‘그곳’?”

정미는 정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에 정요는 자신이 맞췄다고 생각해 정미의 손을 놓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어쩐지 네가 달라졌더라니. 갑자기 부의가 되질 않나, 40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질 않나. 도대체 국사는 어떻게 찾은 거지?”

흥분한 정요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도 미래를 본 거지, 그렇지?”

“뭐라는 거야!”

정미는 정요를 차갑게 쏘아보고 지나쳤다.

정요가 쫓아와 정미의 옷깃을 붙잡았다.

“기다려. 똑바로 말하고 가!”

정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쳐다봤다.

“정요, 어디 아픈 거 아냐?”

정미는 소매를 뿌리치고 떠났다.

정요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아닌 건가?”

밤바람이 불자 정요는 점점 침착해졌다.

‘그래, 정미도 나와 같다면 내가 쓴 시들을 몰랐을 리 없잖아?’

마음을 진정한 후 정요는 다시 발걸음을 뗐다.

정미는 한 걸음씩 동궁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음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한 사람만 사라졌을 뿐인데 이곳은 정미에겐 몹시 황폐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황손께선 이미 잠드셨습니다.”

동궁의 여관(女官)도 정미의 새로운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저 보기만 할 것이다. 황손을 깨울 필요 없다.”

“그건―”

여관이 조금 망설이자 정요가 입을 열었다.

“현미 도장께서 이리 말씀하셨는데, 어서 준행하지 않고 뭐하느냐. 이건 마마께서 명령하신 일이다.”

“예. 현미 도장과 소 아가씨, 저를 따라오십시오.”

정미는 용훤의 침실로 들어갔다.

용훤은 깊게 잠들어 있었고 정미는 그의 침상 옆에 앉아 조용히 바라봤다.

6개월 된 아기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욱 뽀얗게 살이 올라있었고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입가엔 젖을 먹은 거품이 맺혀있었는데 누가 봐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전혀 모르는 모습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이이니 뜻밖의 상황이 없는 이상 평생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지내겠지.’

정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용훤의 부드러운 얼굴을 살짝 만져보았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곧 정철의 말이 떠올랐다.

‘미미, 황손의 병을 치료하고 싶다면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아. 최소한 태자비가 다시 정해지고, 황손이 더는 아무나 해칠 수 있는 어린아이가 아닐 때여야 해. 모친의 비호를 잃은 태자의 적장자는 총명할수록 잘 자라기 힘들 테니. 바보가 된 건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몰라.’

정미는 몸을 숙여 뺨을 용훤의 얼굴에 비비며 작게 말했다.

“유야, 나는 네 이모란다. 꼭 기억하렴. 앞으로 이모가 자주 보러올 테니.”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 최소한 몇 년간은 우리가 황손을 지켜줄 방법이 없을 테니 황손의 병은 어찌 보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될 거야. 최소한, 최소한 황손이 바보인 척을 할 수 있는 나이까지 자란 뒤 치료를 생각해봐야 해.’

용훤은 뭔가 느껴졌는지 ‘힝힝’대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뒤척였다.

정미는 마음이 포근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약접과 류영은 왜 보이지 않느냐?”

복도에 멈춰선 정미가 여관에게 물었다.

여관은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미는 곧바로 깨달았다.

‘큰언니가 죽으면서 그 사람들도 같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됐다. 물러나거라. 난 여기 잠깐 서 있다 떠날 테니.”

여관은 몸을 숙여 인사하고 뒤로 물러났다.

정미는 복도 기둥 옆에 서서 침묵했다.

정요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안 가? 국사께서도 출궁하셔야 할걸.”

정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사부님께선 당연히 나를 기다리실 거야. 여기서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네 맘대로 하든지.”

정요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 이대로 떠날 수 없지.’

정요는 여린 소녀의 모습을 노려봤다. 어두운 달빛 아래, 그녀는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꼿꼿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정요는 몰래 이를 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태자비가 죽었으니 너도 분명 힘들 테지? 아쉽게도 태자비는 너만큼 강하지 않아서 그날의 충격을 견디지 못했나 봐.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황손이 참 안타까―”

“닥쳐!”

정미가 굳은 표정으로 휙 뒤돌아 말했다.

“내가 만약 널 때린다고 해도 여기서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같아?”

정요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눈빛에 분노가 스쳤지만 정미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드러나자 속이 시원해졌다.

‘역시 사람은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게 더 크다니까.’

“큰언니는 어느 방에서 죽었어?”

정미는 정요를 빤히 쳐다봤다.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속눈썹이 떨리더니 눈물을 두 줄기 흘렸다.

정요는 잠시 멈칫했다가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역시, 태자비 얘길 꺼내니까 그 의기양양하던 정미도 이렇게 불쌍한 모습이 되는구나.’

“내가 데려가 줄게.”

정요가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입가엔 웃음기가 아른거렸다.

정미는 아무 말 없이 정요를 따라갔다.

“자, 바로 저기야. 태자비는 저 해당화 나무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어.”

동궁의 화원 안, 정요가 수 장 밖의 해당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해당화가 필 시기였기에 나무는 마치 아름다운 꽃구름 같았다.

정미는 천천히 나무를 향해 다가갔고 나무줄기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큰언니, 여기가 바로 언니의 혼이 돌아오는 곳이구나. 기억할게.’

정요는 왠지 재수 없다고 여겨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정미가 충격으로 슬픔에 빠졌다고 생각해 소리 없이 웃었다.

‘너희 모녀가 내 순결을 빼앗아 내가 태자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게 뭐 어때. 정아 그 명줄 짧은 것은 결국 태자비 자리를 잃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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