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답
소녀는 고개를 들고 방긋 웃으며 사내를 쳐다봤다. 난초처럼 아름다운 숨결이 느껴졌다.
“사실 나도 오라버니처럼 진작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러고는 큰 은행나무 뒤로 돌아가 기대어 딴 곳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2월의 햇살은 밝고 아름다웠다. 햇볕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 와 햇살보다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 얼룩덜룩한 반점을 그리며 장난스럽게 춤을 췄다. 눈을 반쯤 가늘게 뜬 소녀는 나른한 고양이 같아 왠지 품에 안고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다.
정철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한 걸음씩 다가와 그 모습을 쳐다봤다.
다리는 천근처럼 무거워져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미미에게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구나. 사철인가?’
“미미가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군데?”
이때, 정철 자신조차도 말투에 묻어나오는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눈을 뜨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오라버니한테 안 알려줄 거야. 오라버니도 나한테 안 알려줬잖아.”
“그렇구나.”
정철의 입가에 띤 웃음기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작은 구름처럼 옅었다.
“미미가 예전에 시집을 가고 싶지 않다기에 마음에 든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
정미의 기다란 눈이 정철을 흘겨보았다.
“아니야. 내가 시집을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오라버니와 같아.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거든. 이번 생에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면 뭐 하러 시집을 가겠어?”
그러고는 입을 삐죽이며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멍한 표정의 정철을 쳐다봤다.
“아니, 오라버니랑은 좀 다르네. 오라버니는 연모하는 여인과 함께 할 수 없더라도 서 아가씨나 방 아가씨와 혼인하려 했잖아. 나중에 또 무슨 이 아가씨, 왕 아가씨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일 없어.”
정철의 목소리는 지척의 소녀에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아주 작았다.
“앞으론 무슨 이 아가씨든 왕 아가씨든, 다른 사람과 혼인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양사자 신분이 아니니 대를 이을 책임도 없잖아. 이제 드디어 나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게 됐어.”
‘미미에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좋은 오라버니로 조용히 남을 수 있어. 계속 미미의 곁을 지킬 순 없더라도 최소한 다른 여인의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순 있으니까.’
정철은 마음이 따끔거려왔지만 티 내지 않고 꾹 참아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내겐 이제 혼인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으니까. 예전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졌어.’
정미는 눈앞의 사내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속으로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이 바보. 나 같은 여자애가 먼저 말하게 할 셈이야? 큼큼, 사실 내가 먼저 말하는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말한 이후지. 만약 오라버니가 또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나를 꾸짖고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맞서 나와 함께할 생각이 없다면, 난 어떡해야 하지?’
“오라버니는 마음에 둔 사람과 함께할 생각이 없는 거야?”
정철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며 진지하고도 힘없이 말했다.
“당연히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그 아가씨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했어. 미미, 오라버니가 어떻게 해야 할까?”
정철은 소녀의 반응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뒤돌아서 멀리 있는 은행나무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미는 완전히 멍해졌다가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해 급히 손으로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지? 오라버니도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건가? 내 마음과 같은 건가?’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오라버니의 말을 다시 되새겨보다가 마침내 확신하게 되었다.
“오라버니―”
정철이 뒤돌아섰다.
정미가 정철의 옷깃을 붙잡고 그를 조금 가까이 잡아당겼다.
“왜?”
정미에게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자 무척 씁쓸했지만, 늘 침착했던 정철은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난처해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정미는 그를 따라 또 다가가 발꿈치를 들었다.
소녀는 사내의 입가에 아주 작은 입맞춤을 하고는 고개를 갸웃대며 웃었다.
“다들 오라버니가 총명하다고 하던데, 오라버니가 맞혀봐.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군지.”
그러고는 손을 놓고 걸어갔다.
그때 검은색 도포가 바람에 뒤로 펄럭이며 소녀의 여린 몸매를 감싸왔다.
뒤이어 갑자기 커다란 힘이 정미를 잡아당겼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은행나무 줄기에 몸이 기대어져 있었다.
“오라버―”
뒷말이 목 뒤로 삼켜지며 의미 없는 소리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정미는 양손으로 그 사람의 허리를 잡은 채 놀랍고도 부드러운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 사람의 입술은 몹시 뜨거워 정미는 마음까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혀는 단호하고 과감하게 그녀의 이 사이로 들어와 뒤얽혔고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응―”
목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미는 숨이 가빠져 힘없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진정한 입맞춤은 이런 거였구나.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하는 건 정말이지 혼이 날아갈 것만 같아.’
하지만 기쁨과 흥분이 몰아치는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과 불안감이 느껴졌다.
머리 위로 드리웠던 그림자가 멀어지고 신선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정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얼굴은 저녁노을처럼 붉었지만, 눈빛만은 맑게 반짝이며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철도 숨을 가볍게 헐떡이고 있었다. 귀는 피가 날 것처럼 빨개진 채였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작게 물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맞혔어?”
정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고 나무줄기에 기대 멍하니 오라버니를 바라봤다.
‘오라버니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네.’
정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철은 조용히 기다리다가 조금 급해졌는지 고개를 숙여 정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면, 오라버니가 다시 한번 맞혀볼까?”
“응?”
정미가 멍하니 있는 사이 맹렬한 입맞춤이 다시 쏟아졌다.
정미는 은행나무와 정철 사이에서 숨을 수 없었지만, 숨고 싶지도 않았고 비바람 속 새싹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었다.
소녀는 꽃 같은 향기를 피워내며 쏟아지는 빗속에서 여유롭게 잎을 드러냈다.
정철이 갑자기 손을 놓고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차마 고개를 숙일 수도 없었지만, 혹시나 소녀가 그의 시선을 따라 보지 않아야 할 곳을 볼까 뭔가를 가리려는 동작은 더욱 할 수 없었다.
정미가 숨을 가볍게 헐떡였다.
“오라버니, 틀렸을 거란 생각은 안 해?”
정철이 따뜻한 눈빛으로 정미를 바라보며 웃었다.
‘틀릴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 않았어. 미미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사내가 아닌 셈이나 마찬가지지. 단지…… 단지 미미가 나를 일부러 착각하게 해 놀리려던 게 아니라면. 그런 거라고 해도 난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내 미미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할 리 없잖아?’
“그럼 오라버니가 맞힌 거야 틀린 거야?”
소녀는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발꿈치를 들어 가벼운 입맞춤으로 대답했다.
* * *
은행나무 아래, 정미와 정철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정미는 아무 풀이나 뽑아 만지작거리며 벅차오른 속마음을 감추었고 몰래 정철을 흘끗 쳐다봤다.
정철도 마침 정미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니 또 왠지 부끄러워졌다.
정미는 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눈을 둘 데가 없어 당황하는 사이 갑자기 손을 붙잡혔다.
‘오라버니도 참,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또 입을 맞추려는 거야?’
정미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다.
“미미, 언제부터―”
정철이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철은 원래 그와 정미 사이에 물을 게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있으니 처음 만난 사이처럼 아직도 할 말이 무수히 많이 남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남매로서는 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연인으로서는 오늘 처음 만난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정미는 정철의 말을 듣고 그를 노려봤다.
“어쨌든 오라버니가 기러기를 들고 서 아가씨 집안에 혼담을 꺼내러 가기 전부터야.”
‘그렇게 오래됐다니.’
정철은 잠시 멍해졌다가 마음이 아파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걸 아무런 힘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씁쓸함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우리의 마음은 같았구나.’
정철이 정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미, 조금만 시간을 주면 오라버니가 위국공부에 혼담을 꺼낼게.”
“지금은 안 돼?”
정미가 솔직하게 물었다.
정철은 말문이 막혔다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렇게 급해?”
정미가 정철을 노려봤다.
‘입맞춤까지 했는데 알면서도 물어보다니!’
“오라버니는 안 급해?”
정미는 얕보이고 싶지 않아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정철의 얼굴이 붉어졌다.
‘급한지 아닌지는 당연히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지.’
“큼큼, 미미. 이건 급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만약 오라버니가 지금 바로 위국공부에 혼담을 꺼내면 분명 몰매를 맞고 쫓겨날 텐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 게다가 오라버니는 네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럼 어쨌든 오라버니는 급하다는 거지?”
소녀가 사내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정철은 순간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나도 급해.”
그러자 정미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오라버니, 사실 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아.”
‘신경 썼다면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외조모님과 다른 어른들을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아. 오라버니가 몰매를 맞고 쫓겨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
소녀의 차분한 말투에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나왔다.
“어쨌든 난 이미 청령진인의 제자고 혼례를 정할 권리가 있으니 그렇게 일찍 혼사를 정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은 마, 오라버니. 얌전히 기다릴게.”
마음을 밝힌 소녀는 물처럼 부드러워서 정철은 갑자기 조금 멀리 떨어지고 싶어졌다.
정미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정 급하면 아무 때나 내게 입을 맞추면 되잖아. 어쨌든 난 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정철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정신을 차리자,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미미, 여자아이는 진중하게 굴어야지.”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지금 날 꾸짖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텐 진중하게 행동한다고. 하지만 만약 내가 오라버니한테 너무 진중하게 굴면 오라버니 손해 아니야?”
정철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오라버니라는 신분이 없으면 난 이 녀석을 말리지 못하는구나.’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쏴 쏴 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얽히고설킨 감정이 눈빛에 드러났다.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를 살짝 밀어냈다.
“오라버니?”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누가 왔어.”
‘누가?’
정미의 표정이 굳었다.
‘아, 잊고 있었다. 여긴 바깥이었지! 이게 다 오라버니가 내게 입을 맞춰서야. 계속 그 달콤한 맛만 떠올랐다고. 누가 봤음 안 되는데…….’
정철은 정미의 걱정을 알아챘는지 작게 말했다.
“아까는 없었어.”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덧붙여 말했다.
“결국 무술도 쓸모 있지?”
‘지금부터 미미에게 내가 사가의 동생이나 경왕세손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해.’
정미는 안심했다.
‘응, 역시 무술은 아주 쓸모가 있어.’
“철 형님, 미 동생. 여기 있었구나.”
한지가 다가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왠지 그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어디가 이상한진 알 수 없었다.
정철이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지는 그 이상한 느낌을 무시하고 웃으며 말했다.
“식사를 시작했거든요. 철 형님이 돌아오지 않아서 어른들께서 제게 형님을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정미와 함께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은행나무에 가려져서 못 볼 뻔했어요.”
“세자께 수고를 끼쳤군요. 그럼 가지요.”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를 일으켜 세웠다.
한지는 정미를 흘끔 쳐다보았고 정미의 살짝 부어오른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방금의 그 이상한 느낌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정미가 예전보다 더…… 더 어엿한 여인이 된 느낌인데. 설마 급계를 해서인가?’
한지가 정미를 빤히 쳐다보자, 정철은 기분이 좋지 않아 정미를 다른 쪽으로 휙 잡아당기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안 가십니까? 세자.”
한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