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58화 (258/375)

258화. 떠보다

사 노부인의 웃음 띤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모두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할 때, 단 노부인과 한 씨에게 작게 말했다.

“큰언니, 명주야. 정미도 이미 급계 했으니 혼사도 고려하기 시작했겠지? 우리 사이에 굳이 숨기지 않겠어. 우리 사철이 어때?”

단 노부인은 사철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화서와 정미를 맺어줄 생각이 있었기에 사 노부인의 말을 듣자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사철과 화서 모두 괜찮은 아이여서 어미인 한명주의 의견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명주야,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단 노부인이 한 씨에게 물었다.

한 씨의 마음이 흔들렸다.

사가와 왕래가 잦아진 작년부터 사실 두 집안의 어른들 모두 혼담의 뜻을 품고 있었다. 특히 올해 정월 회인백부에 그런 일이 일어나 남들이 다 피했을 때도 사가는 왕래를 끊지 않았고 정미의 급계례에도 가장 먼저 도착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사가 사람들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

회인백부에서 지냈던 한 씨에겐 고귀한 대부호 가문이든 창창한 앞날이든, 품행이 단정한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한 씨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사철이 좋습니다. 하지만 정미는 이제 스승을 모셨으니 혼담을 꺼내려면 사부의 의견을 물어야 할 거예요.”

사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내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마.”

‘정미가 내 손자며느리가 되면, 흐흐, 국사를 몇 번 더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정철은 찻잔을 들고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뛰어난 청력으로 이 대화를 모두 귀에 담고 있었다.

‘보아하니 어르신들이 사가의 동생과 미미를 마음에 두셨나 보구나. 사가의 동생은…… 괜찮은 아이지. 무예에는 그리 재능이 없는 것 같지만. 조금 문약해 보이기도 한데, 정미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아, 만일 마음에 든다면?’

“철 형님, 철 형님―”

정철은 정신이 들어 한지를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한지가 그의 소매를 가리켰다.

“차가 쏟아졌습니다.”

정철은 그제야 손에 든 찻잔이 어느새 기울어 있다는 걸 깨달았고 소매는 이미 조금 젖어있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세자.”

정철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발걸음을 떼 밖으로 나갔다.

남은 한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세자?”

‘언제부터 철 형님이 나를 지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세자라는 낯선 호칭으로 부르며 말투도 깍듯해졌지? 설마 지금 독립했다고 위국공부와 관계를 분명하게 가리려는 셈인가?’

한지는 생각할수록 모호해지는 기분에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 * *

정미는 청령진인을 따라 유실(*幽室: 조용하고 그윽한 곳에 있는 방)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청령진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현미, 스승을 따른 뒤 무슨 분야에 전념할지 정해두었느냐?”

“다 배울 순 없습니까?”

정미가 솔직하게 물었다.

어린 제자의 담백함에 청령진인은 웃음 지었다.

국사 대인의 얼굴은 아주 청수했다. 은발은 전혀 그를 늙어 보이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속세를 벗어난 적선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런 그가 웃자 방 안이 환해지고 온갖 꽃이 만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이 언제까지라도 죽지 않고 너도 살아 있다면 당연히 다 배울 수 있겠지. 하지만 네가 다 배웠을 때쯤이면 이미 천명을 다할 나이일 게다. 스승에게 중점으로 배우고픈 분야가 없는 게 확실하느냐?”

“알겠습니다.”

정미는 괴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스승을 저도 모르게 계속 쳐다봤다.

“그럼 제자는 사부님께 서금과를 배우고 싶습니다.”

정미는 결연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자는 우선 초혼과 음양을 통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정아의 죽음은 정미의 가슴에 박힌 대못과도 같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미는 여전히 정아가 자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유야는 아직 어린 데다가 큰언니가 아주 기대하며 낳은 아이이잖아. 다른 사람이 바보가 된 유야를 미워한다고 해도 어머니인 큰언니는 걱정만 할 뿐 포기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게다가 내가 분명 유야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얘기했는걸. 하지만 큰언니는 황궁에서 죽었고 내겐 평범한 길로 진상을 파헤칠 방법이 없어. 그럼 초혼을 통해 직접 물어보지 뭐.’

“초혼술을 배우고 싶다고?”

청령진인은 놀라지 않았다.

이 사제 간의 인연도 초혼술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어린 제자가 이에 관심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좋다. 현청관에 들어왔으니 스승을 따라 음양을 통하는 법을 배워야 할 터. 그러니 잠시 관에서 머물거라. 입문까지 성공하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예. 감사합니다, 사부님.”

‘서금과의 수준이 너무 높고 깊다며 지금은 가르쳐주지 않으려 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순조롭게 일이 풀릴 줄은 몰랐네. 서금과에 대한 내 인상은 모두 아혜가 준 것인데, 아혜가 늘 이 주제를 피하려 하길래 당연히 그런 줄 알았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아혜가 내게 서금과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였구나.’

“그래, 이만 가족들에게 알리러 가보거라.”

“그럼 제자는 우선 물러나 보겠습니다.”

정미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나왔다.

* * *

유실에서 객실로 가는 길 양쪽엔 은행나무가 무수히 심겨 있었다. 높게 우뚝 솟은 은행나무엔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았고 외진 길에다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길에는 정미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게 홀로 길을 걸으니, 기분이 왠지 가벼워졌고 이 도관에서 지낼 나날들에 기대감이 솟기 시작했다.

그러다 앞쪽에 익숙한 모습이 보이자 정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은 유난히 크고 무성한 은행나무 아래 서 있었는데 청색의 직철을 입어 뒷모습이 더욱 우뚝 솟아 보였다. 마치 싱그러운 백양나무처럼 조금 말라보이긴 해도 백절불굴한 기개가 느껴졌다.

정미의 걸음이 빨라졌다가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서는 손을 뻗어 그 사람의 눈을 가렸다.

정철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렇게 하고 싶었다.

따뜻하고 큰 손이 정미의 손을 감싸자 손끝에서부터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류가 흐른 듯 찌릿했다.

“미미.”

정철이 뒤돌아서 웃으며 검은색 도포를 입은 소녀를 쳐다봤고 사랑스럽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또 장난을 쳐.”

정미가 손을 거두고 한숨 쉬었다.

“오라버니가 무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한 번도 못 속이잖아. 재미없어.”

정철이 멈칫하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미는 무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좋다는 뜻이야?”

‘사가의 동생도 무술 선생을 모신 적 있는 것 같던데 듣기로는 그다지 재능이 없어서 몸을 단련하는 정도에 그쳤다지. 사가의 동생은 다른 서생들만큼 약골처럼 보이지 않지만 나처럼 눈과 귀가 밝지는 않으니, 미미가 좋아하는 부류 아닐까?’

정철의 반문에 정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오라버니처럼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좋지.”

정철의 귀 끝이 붉어졌다.

정철은 귀가 예뻤다. 윤곽이 또렷했고 귓불은 두툼했다. 하지만 늘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붉어지곤 했다.

“그래? 그렇지만 미미가 방금 재미없다고 했잖아.”

정미는 고개를 돌려 정철을 쳐다봤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오라버니를 속일 수 없으니까 재미없는 거지. 다른 사람이면 눈을 가리러 가지도 않을 거라고.”

정철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미미를 향한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구나. 막을 수도 없을 만큼. 특히 어머니가 이혼하고, 내가 두 집안과 율법상으로 아무런 관계가 아니게 되고 혼인이라는 압박도 사라졌을 때, 꾹 눌러둔 마음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했어. 혼약이 깨지고 출신이 폭로되어 나를 가엾게 여긴 하늘이 내게 조금의 기회를 준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많은 사람이 나를 지적하더라도, 미미만 다치지 않는다면 한번 시도해보고 싶어.

하지만, 미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만약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를 그저 오라버니로만 봐왔고 내 마음을 안 뒤 나를 더럽다고 여긴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정철은 따뜻한 눈빛으로 지척의 소녀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내가 용감해질지 나약해질지는, 눈앞의 이 소녀에게 오라버니가 필요한지 사내가 필요한지에 달렸어.’

“미미, 만약 그 사람이 네 부군이라도 눈을 가리지 않을 거야?”

정철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이자 숨결이 소녀의 복숭아 같은 뺨에 닿을 것만 같았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두 뺨에 분홍색 꽃잎이 피더니 뽀얗고 긴 목덜미까지 내려갔다.

정미는 갑자기 정철의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앞으로 걸어가다가 한참 뒤에야 작게 말했다.

“나한텐 오라버니가 있는데, 부군이 어디 있어.”

정미의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정철은 멍해졌다.

그는 정미도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솔직히 물어볼 수 없었다.

‘만약 미미가 나를 오라버니로만 여기고 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무척 친했기에 정철은 오히려 정미의 반응을 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정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정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철을 불렀다.

정철은 손을 들어 흘러내린 정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청수한 사내의 눈엔 따뜻한 웃음기가 피어올랐고 긴 속눈썹은 매미의 날개처럼 약하게 흔들렸다. 정미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미미도 이제 급계했으니 곧 생길 거야.”

‘부군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왜 꺼내는 거람. 오라버니도 분명 나를 좋아하면서. 인정하면 죽기라도 해?’

정미는 왠지 짜증이 났지만 애써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그럼 오라버니는 기쁠 것 같아?”

“당연히…… 기쁘지.”

정철이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미의 시선이 아래로 옮겨가더니 정철의 입술에 꽂혔다.

선명한 정미의 입술과는 달리 정철의 입술은 조금 창백한 편이었다. 정미는 정철에게 용감하게 입 맞췄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해야만 솔직하게 나올까? 요즘처럼 모호한 태도로 이상하게 굴면서 조금의 실마리도 주지 않는 게 아니라?’

정미는 저도 모르게 발꿈치를 들었다.

그러자 정철이 긴장한 표정으로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미미가 또 입을 맞추려는 건가? 소녀의 호기심일까 아니면, 아니면 정말 나와 입 맞추고 싶은 걸까?’

정철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반걸음 다가갔다.

‘답을 알고 싶어.’

정미는 까치발을 들어 갑자기 정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철은 온몸이 굳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오라버니 어깨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어.”

정미가 손끝으로 마른 나뭇잎을 집어 올리고 흔들어 보였다.

“아, 모르고 있었네.”

정철은 미소 지었지만 속으론 조금 실망스러워했다.

정미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사실 오라버니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어.”

“뭔데?”

정철의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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