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급계
정미의 급계례 첩자(*帖子: 옛 초대장)가 곳곳에 뿌려졌다.
그러나 많은 집안의 여주인들은 첩자를 받자마자 아무렇게나 버려버렸고 그날 사람을 시켜 선물만 보낼 생각이었다.
위국공부와 왕래가 잦았던 집안에선 차마 가지 않을 순 없었지만, 속으론 불안해했다.
황상께서 위국공부 사촌 아가씨의 금족령을 풀어주셨다고는 하지만 황가에 밉보였다는 사실은 불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괜히 참석했다가 귀인들의 눈 밖에 난다면 큰일이었다.
장 재상 집안에서 이 첩자를 받았을 땐, 약간의 풍파가 일었다.
“어머님, 며느리로서 어머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정가 셋째 아가씨의 급계례는 가고 싶습니다.”
황 씨는 유모의 품에서 아이를 건네받고 장 부인에게 다가갔다.
“보세요, 어머님. 이미 3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예쁘기도 얼마나 예쁜지, 이게 다 정가 셋째 아가씨 덕분이지 않습니까. 예전엔 몇 번이나 회임해도 다 지켜내지 못하였지요.”
장 부인은 어린 손자를 보자 눈가에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나도 정가 셋째 아가씨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그저 지금 황손이 바보가 된 이유가 태자비가 출산할 때 정가 셋째 아가씨의 부수를 마셔서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어머님, 그건 정가 셋째 아가씨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장 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황 씨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정가 셋째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냐? 어쨌든 황상과 귀비마마, 태자 전하, 심지어 태후마마까지도 분명 셋째 아가씨에게 화가 나 계실 거다. 만약 네가 그 아가씨의 급계례에 갔다가 불만을 사면 어쩔 셈이냐?”
황 씨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 그러니까 그렇게 힘들 때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가 셋째 아가씨는 제가 무사히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고 제 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며느리는 그런 배은망덕한 짓을 할 수 없어요!”
말을 마친 황 씨는 아들을 안고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너―”
“그 말이 맞지!”
그때 장 재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장 부인이 일어나 꾸짖었다.
“나리, 어찌 나리께서도 함께 소란을 피우십니까?”
장 재상은 깔끔하게 빗질 된 수염을 어루만지며 언짢은 듯 말했다.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라 저 애의 말이 맞지 않소. 정가 셋째 아가씨가 어떻든 간에 우리 집안에 손자가 생긴 건 그 아가씨 덕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안더러 소심한 겁쟁이라 비웃게 둘 순 없지 않소? 은인에게도 이런 태도로 나오는데 남들이 보면 뭐라 생각하겠소?”
황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뻐하며 절을 올렸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장 부인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제발 허락해주세요. 이 며느리도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급계례를 다 본 후 바로 돌아오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장 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됐다, 됐어. 늘 너희 말이 다 맞지!”
* * *
눈 깜짝할 새 2월 초이튿날이 되고, 정미의 급계례는 백화만발한 계절에 열리게 되었다.
위국공부가 행사를 열 때 사용하는 정당(正堂)은 장엄하고 엄숙하게 꾸며졌고 꽤 많은 사람이 왔음에도 급계례가 시작될 때까지 여전히 빈 자리가 남아있었다.
찾아온 사람들은 이를 보고 조용히 소곤댔다.
단 노부인은 격자문을 한 번 쳐다봤다가 노위국공에게 작게 말했다.
“미가 속상하겠군요.”
노위국공은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우리 미가 얼마나 도량이 큰데, 이런 허례허식은 그리 마음에 두지 않을 거요. 그저 우리 어른들이 진심으로 미를 아껴주면 되지.”
단 노부인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조금 서운했다.
‘할 수 있다면 어린 외손녀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은데. 작은딸 옥주의 급계례는 참으로 성대했단 말이지. 그리고 그때 옥주의 미모가 수도를 뒤흔들게 되었고.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니, 지나치게 완벽하다면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하니, 단 노부인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입구가 술렁거리고 덕소 장공주가 계단 위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한 씨, 도 씨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 옆엔 다섯째 공주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정당 안의 빈객들은 깜짝 놀랐다.
‘정가 셋째 아가씨의 정빈(正賓)이 덕소 장공주라니?’
“윗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덕소 장공주께서 정빈을 맡았지요?”
“잊으셨습니까. 덕소 장공주의 부마가 저 아가씨 오라버니의 은사잖아요.”
“그 장원랑도 이미 두 집안과 아무 관계가 없게 되었다던데요. 게다가 황상의 노여움을 샀다고 들었어요.”
“관계가 없더라도 그간의 정은 여전하지 않습니까. 고 선생과 장공주라는 인맥이 있으니, 그 장원랑도 앞날이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빈객들은 잠시 수군거리다가 다시 조용해졌고 덕소 장공주가 천천히 주빈(主賓) 자리로 향하는 모습을 보자 복잡했던 마음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장공주도 왔는데, 우리가 뭐하러 쓸데없는 걱정을 하겠어?’
계례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덕소 장공주 옆에 서 있던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걸어 나와 손을 씻었다.
빈객들은 이 소녀가 바로 이번 계례의 찬자(贊者)라는 걸 깨달았다.
어떤 자가 궁금해하며 말했다.
“저 소녀는 낯선 얼굴이군요. 어느 집안 아가씨일까요?”
옆에 있던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더니 작게 소리쳤다.
“다섯째 공주예요!”
“예? 공주 전하였다고요?”
“그래요. 분명 다섯째 공주예요. 바깥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데 저도 저번에 덕소 장공주부의 연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뵙게 되었어요.”
‘정빈은 황제의 여동생이고, 찬자는 황제의 딸이라니. 저 셋째 아가씨가 정말 황가의 미움을 산 게 맞나? 농담이 아닌 게 확실해?’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해졌고 곧 나타날 정가 셋째 아가씨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위국공부와 회인백부는 서로 다른 인맥을 가졌기에 경왕부와 사가처럼 친인척 관계가 아닌 이상 여기 있는 대부분은 정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두 공주를 본 충격이 없었더라도 정미의 소문만으로도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정미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마침내 걸어 나왔다.
소녀는 검은색 위에 주홍색 면 테두리를 두른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쌍아계(*雙丫髻: 양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로 틀어올렸다. 그녀는 정당 가운데로 걸어가 빈객들에게 단정하게 읍례를 하고는 계자석(*笄者席: 급계를 하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철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둘째 오라버니의 자리가 눈에 띄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든 간에 오라버니가 가장 먼저 보이는구나.’
사람들의 놀란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최근 화제의 중심이었던 소녀가 이런 미모를 가졌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런 미모를 가진 소녀인데 황상께서 어찌 화를 내셨다는 거지? 큼큼, 얼굴을 보면 화가 다 가라앉을 것 같은데.’
이어진 순서는 다른 여인들의 급계례와 동일했다. 하지만 정미의 유사(有司)는 조청공이었기에, 소년들 사이에 있던 한지는 조금 난처해졌고 저도 모르게 그날 용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설마 정미가 정말 아직도 나를 놓지 못해서 일부러 조 아가씨가 유사를 맡게 한 건가?’
정미는 오늘의 주인공으로서 최대한 계례에 집중했고 미리 연습한 대로 차근차근 진행해갔다. 덕분에 계례는 아무 문제 없이 끝났다. 진행자가 ‘예성(禮成)’을 외쳤을 때는 2월 초의 날씨임에도 예복이 이미 땀에 젖어있었다.
이때, 입구에 서 있던 하인이 외쳤다.
“현청관 북명진인 납시오―”
‘북명진인?’
빈객들뿐만 아니라 위국공부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북명진인이 누구던가? 현재 현청관의 일인자 아닌가. 국사의 지위에 있진 않지만 사람들 눈엔 국사나 다름없는 자였다.
훈귀와 고관, 심지어 황가의 친척과 자제까지도, 만약 어느 장소에 북명진인을 모실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영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떠들썩한 자리에는 북명진인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황궁의 제천(*祭天: 하늘에 제사를 지냄)과 신년을 축하하는 날 등 중요한 날에만 진인의 풍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런 행사에서도 북명진인의 자리는 늘 예외 없이 백관들의 앞에 위치해있었다.
대량은 도교를 중시했기에, 역임 국사들마다 용맥(*龍脈: 풍수지리에서 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을 호위할 사명을 가지고 비바람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북명진인의 지위가 이리 비범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국사와 황제가 함께 나타났을 때, 국사가 황제의 다음 자리에 앉아 무릎을 꿇은 백관들을 지켜보던 모습도 기억했다.
널찍한 검은색 도포를 입은 북명진인이 걸어들어오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미친 듯이 맴돌았다.
‘북명진인이 왜 온 거지? 정가 셋째 아가씨의 급계례에 참석한 건 아닐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사람들은 순간 황당했다.
‘설마 그럴 리가!’
거대한 정당 안의 모든 참석자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활시위를 당긴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의문에 대한 답을 기다렸다.
노위국공이 일어나 맞이했다.
“진인께서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다니요. 정말 영광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북명진인은 그 자리에 서서 웃으며 말했다.
“노우(老友), 그간 별일 없었는가?”
노위국공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정합니다. 오늘은 외손녀가 급계하는 날이라 마침 기분이 좋았는데, 이렇게 뜻밖에 진인도 뵙게 되니 더욱 기쁘군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무슨 일?’
북명진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어안이 벙벙한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원래는 관문을 닫고 있었는데 이미 오랫동안 뵙지 못한 스승님이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끌고 나와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문을 여는 것 아닌가.
– 북명아, 네게 어린 사매를 하나 들였다. 오늘 그 아이가 성년이 될 테니 어서 마중해 와서 정식 배사례를 치르자꾸나.
‘어린 사매? 이제 막 성년이 되었다고?’
북명진인은 자신의 나이를 떠올려보고 또 사부의 나이를 떠올려보다가 곧바로 속이 불편해졌다.
‘가장 중요한 건 스승님이 얼마나 그 사매를 아끼기에 나보고 직접 마중을 가라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일흔이나 되었지만, 북명진인은 사부 앞에선 여전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 질문을 꺼냈고 결국 사부에게 총채로 얻어맞았다.
– 난 사십 년 넘게 사람을 만나지 않았지. 속세의 사람은 물론이고 네 제자들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게다. 제자인 네가 마중 가지 않으면 내가 직접 가라는 말이냐? 그러다 이 스승이 양가(良家)의 여식을 꾀어내 팔아넘기는 놈으로 오해받게 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네 스승을 데리러 감옥으로 올 테냐?
북명진인은 생각했다.
‘사부님의 말도 일리가 있어. 일국의 국사가 인신매매범으로 오해받아 관아로 보내진다면 현청관에 얼마나 큰 창피인가. 분명 전무후무한 일이 될 텐데.’
그렇게 북명진인은 관문을 닫은 수개월 만에 첫 목욕을 한 뒤 환골탈태하여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