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설렘
정미는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문을 열었을 때부터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발갛게 물든 정철의 이마가 보였다. 그러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를 잡아당기며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 살살 할 순 없어?”
정철은 눈만 들어 정미를 한 번 쳐다보았다. 입가엔 웃음기가 띠어있었다.
한 씨는 그 자리에 서서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십몇 년간 키운 아들이 내 이름에 올라가는 걸 거부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이때, 단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명주야, 철이가 친부모를 찾고 싶다 하니 난처하게 하지 말거라. 지금 네 이름에 올렸다가 만약 친부모를 찾게 되면 또 성가신 일이 되지 않겠느냐?”
이름에 올리는 건 보통 양자를 들이는 것과는 달랐다. 양사자로 들이는 것처럼 친부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 그 양사자는 친부모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철에게 친부모를 찾을 마음이 있고 만약 찾게 된다면 다시 한 씨 쪽에서 제명해야 하는데 그럼 더욱 일이 복잡하게 되는 것이었다. 차라리 마침 회인백부에서 벗어난 김에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았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 단 노부인이 이 말을 한 씨에게 전했다.
한 씨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요. 하지만, 하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주 예전부터 철이를 친아들처럼 여겨왔는데 앞으론 ‘어머니’라고 불릴 수도 없게 되니…….”
단 노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호칭이 뭐가 중요하다고. 심성을 봐야지. 그동안 내가 지켜보니, 철이는 그리 양심 없는 아이가 아니다. 너와 미에게 늘 진심으로 잘해왔지 않느냐. 게다가 철이가 정말 달아난다고 해서 그 아이를 붙잡아둘 셈이냐? 사람은 붙잡을 수 있어도 마음은 잡지 못하는데, 우리 집안이 은혜를 빌미로 남을 으르는 사람들이더냐?”
한 씨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정철은 위국공부에서 머물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챙길 물건도 없었다. 정미는 곧바로 그를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갔고 화미가 차를 올리자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뒤 급히 물었다.
“오라버니, 정말 나가서 살 거야?”
정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진짜지.”
정미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는 6품 수찬이잖아. 봉록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위국공부 근처의 집세는 그리 싸지도 않다고. 또 팔근이랑 소매, 그리고 다른 하인들도 책임져야 할 텐데, 그럼 밥도 굶게 되는 거 아냐?”
정철은 자신을 걱정하는 여동생을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정미가 말을 마치자 웃으며 물었다.
“그럼 미미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잠시만 기다려봐.”
정미는 뒤돌아서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잠시 후 되돌아와 그리 크지 않은 함을 건넸다.
“오라버니, 열어봐.”
정철은 웃음을 머금고 함을 열어보았다.
함 안은 휑했으나 바닥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은표였다.
정철은 돈 관리의 고수였기에 은표의 규격과 두께만 보고도 그것이 대략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이내 깜짝 놀랐다.
“미미,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이 난 거야?”
정미는 접힌 은표를 집어 들어 정철의 손에 쥐여주었다.
“진료로 번 돈이야. 오라버니, 돈 걱정은 하지 마. 내가 오라버니를 책임질게.”
정철은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미가 정말 오라버니를 산 거야? 나를 책임질 준비를 하고 있었어?”
‘분명 아무 문제도 없는 말인데, 오라버니의 말투와 태도 그리고 입가의 웃음기를 보니까 왜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지?’
정미는 또 얼굴이 빨개진 느낌이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빨개지는 거람.’
정미는 조용히 스스로를 미워했고 정색하며 말했다.
“당연히 오라버니를 책임져야지. 근데 오라버니는 왜 어머니 쪽에 이름을 올리는 걸 거부한 건데? 어머니께서 많이 낙담하신 것 같았어. 외숙부님들도 꽤 불만스러우신 것 같았다고.”
“그럼 미미는?”
“응?”
정철이 정미의 눈을 응시하며 웃었다.
“미미는 내가 이름을 올렸으면 좋겠어?”
“나도 당연히 오라버니가 떠나는 게 아쉽고 앞으로 오라버니를 ‘둘째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없는 건 더 아쉬워.”
정미가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사실 ‘둘째 오라버니’ 말고,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데.”
정철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정철’이 ‘둘째 오라버니’보다 더 듣기 좋은 것 같은데, 미미는 어떻게 생각해?”
정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오, 오라버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어떤 가능성이 떠오르자 정미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회인백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고 어머니 이름에도 올라가지 않으면, 그러니까, 명목상으로는 우린 이미 남매가 아닌 거잖아. 그럼, 그럼―’
정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럼 나와 오라버니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조금 생긴 건가?’
여전히 막연한 희망임을 알았지만, 소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의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나 온 마음을 뒤덮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하게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날이 많이 어두워졌네.”
“이렇게 가는 거야?”
정미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자그마한 기대를 떠올리자니 눈앞의 사람과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눈에 짙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가야지. 이제 상황이 다르니까.”
정철이 정미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정철이 멈춰서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미미, 기억해. 앞으론 사내가 봉록이 적다고 아내를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은 하면 안 돼.”
정미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그저 오라버니가 그렇게 많은 하인을 책임지지 못할까 봐 걱정한 거였지. 아내고 뭐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녀가 고개를 숙여 다시 손에 쥐어진 은표를 보자 급히 그를 쫓아가 문에 기대 외쳤다.
“오라버니, 이건 필요 없는 거야?”
정철이 빙긋 웃었다.
“미미가 오라버니 대신 보관해줘. 앞으로 오라버니의 봉록도 미미가 보관할래?”
“왜?”
정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정철이 낮게 웃었다.
“미미가 오라버니를 샀잖아. 그러니까 뭐든 다 미미 거지.”
그러고는 뒤돌아 떠났다.
정미는 문가에 멍하니 서서 정철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찬바람이 불자 그제야 정신이 들어 거처로 돌아간 후 침상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뒹굴면서 오늘 정철이 했던 말과 표정을 하나씩 떠올렸다.
‘오라버니가 드디어 알아차린 건가? 나가서 살겠다고 하고 어머니 밑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거절한 게 다 나를 위해서였나?’
정미는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쿵쿵대는 심장을 느꼈다가 천천히 얼굴을 가렸다.
‘한 번 확인해 볼까? 오라버니도 먼저 고백해야 하는 건지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에이, 사실 망설일 필요도 없어. 기꺼이 내가 먼저 나설 수 있다고!’
흥분이 가라앉은 후, 정미는 천천히 침착해졌다.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돼! 희망이 생길수록 급한 마음에 일을 그르쳐선 안 되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오라버니의 계획을 정확히 알게 된 후 다시 얘기해보자고. 만약 내가 오해한 거고 집을 빌린 것도 나중에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거면 어떡하려고? 오라버니가 나를 연모하는 건 거짓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십몇 년간 남매로 지내온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을까?’
소녀는 침상 위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에 들지 못해 짜증이 나 손수건을 쥐어뜯었다.
‘이게 다 오라버니 때문이야. 별거 아닌 말로 내 얼굴도 가슴도 뜨겁게 만들다니. 계속 온갖 상상이 떠오르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제까지는 이런 짜증이 나면서도 달콤한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미는 달콤하고도 복잡한 마음을 안고 요 며칠 내 처음으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정미는 단 노부인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고 남아서 식사하려 할 때 처음으로 한지의 서장자를 마주쳤다. 석(碩)이라는 아명을 가진 아이였다.
석이는 태어난 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지만 난처한 신분 때문에 만월례도 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뽀얗고 튼튼해 보였고 이목구비가 한지를 아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반반에게 안긴 석이는 울지도 시끄럽게 굴지도 않았고 까맣게 빛나는 눈으로 단 노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증손주를 볼 정도로 나이가 든 단 노부인은 석이의 신분을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증손주를 진심으로 아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서장손을 아끼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티 내선 안 됐다. 나중에 집안이 어지러워지는 근원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사람들이 다 흩어지자 단 노부인이 정미에게 말했다.
“기뻐도 기뻐할 수 없고, 화나도 화낼 수가 없구나. 할미는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단다. 나중에 네 지 오라버니는 또 얼마나 힘들겠느냐? 우리 미야, 걱정 말거라. 할미가 네게는 꼭 순박하고 단정한 사내를 골라줄 테니.”
정미가 웃었다.
“그렇게 얼른 저를 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외조모님 곁에서 몇 년은 더 지내고 싶은걸요.”
‘오늘 이른 아침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내가 급계하는 날 사부가 사람을 보내 나를 현청관으로 데리고 가 배사례를 치를 거라고 했어. 현청관의 정식 제자가 된 후에는 혼사 얘기를 꺼내려면 사부의 허락을 꼭 받아야 하지. 그 사람이 둘째 오라버니라면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평생 시집가지 않을 거야. 이러든 저러든 내가 손해 보는 일은 없어.’
이렇게 생각하자, 정미의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단 노부인은 원래도 정미를 유난히 아꼈고 고생스러운 처지를 가엾어 해왔다. 그래서 꽃처럼 아리따운 외손녀를 보고 또 봐도 아쉬운 나머지 점심까지 정미를 머무르게 했다.
시종들이 응접실에서 식사를 내오고 있을 때, 양신이 들어와 보고했다.
“노부인, 사촌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단 노부인의 눈이 반짝였다.
“어서 들라 하라.”
잠시 후, 면으로 된 문발이 걷히더니 화서가 걸어들어왔다.
화서는 늘 허약했기에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던 모습이 감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색은 꽤 좋아 보였고 뺨엔 발간 혈색이 올라와 더욱 출중해 보였다.
단 노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서야, 어서 곁에 와서 앉거라. 여기 누가 있는지 보렴.”
“외조모님을 뵙습니다.”
화서는 절을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이미 정미에게 꽂혀있어 웃으며 말했다.
“정미, 돌아왔구나.”
정미는 화서의 안색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꽤 괜찮아 보이자 기뻐하며 말했다.
“마침 잘 돌아왔어. 앞으로 여기서 계속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었거든.”
화서는 어리둥절하며 단 노부인을 쳐다봤다.
그간 화서는 온천마을에서 요양하고 있었기에 이런 복잡한 일은 감히 아무도 화서에게 알리지 못해왔다.
“네 큰이모와 정수문이 이혼했다. 그래서 앞으로 정미와 위국공부에 지내기로 했단다.”
단 노부인이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정미와 꼭 닮은 화서의 눈에 웃음기가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작게 말했다.
“정말 잘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