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내 사람
‘마을 하나와 은 만 냥으로 철이를 데려가는 것도 동의하지 않았다니. 어머니께서 붓으로 장책을 그어버리기까지 했는데!’
둘째 나리는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한 씨의 거절이 이해가 되었다.
‘그 사람 말이 맞다. 철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미 성년이 된 사내이니 집안에서 철이를 괴롭힐까 걱정할 필요 있겠는가! 내가 잘못 계산했군.’
위국공이 차용증을 앞으로 밀어내자, 둘째 나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국공야, 이 차용증엔 1년 안에 모두 갚겠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저희더러 지금 바로 갚으라 하시면 차용증의 내용과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위국공은 차용증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정 대인, 아까 내가 급히 떠나느라 차용증에 서명도 지장도 찍지 못했소. 게다가 여동생이 동의하지 않았으니, 이 차용증은 폐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둘째 나리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아까 내가 지장을 찍고 위국공에게 차용증을 건넨 건 위국공도 지장을 찍으란 의미였는데!’
위국공은 한 씨의 큰오라버니였고 한 씨의 혼수에 관한 일은 그가 담당하여 처리하니, 위국공이 지장을 찍기만 하면 차용증은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 위국공이 한 씨의 혼수 대신 철이를 보내는 게 어떻냐는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놀란 나머지 잊고 말았구나! 그걸 잊어버리다니! 그걸 잊다니!’
위국공이 앞에 없었다면 둘째 나리는 표정 관리는커녕 이미 울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위국공을 돌려보내고 염송당에 가서도 줄곧 어두운 표정이었다.
“뭐라? 동의하지 않았다고?”
맹 노부인은 엉망이 된 둘째 나리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철이가 한 씨 배에서 나온 친아들은 아니라 해도 그동안 내가 지켜본 그 애는 철이에게 진심이었다. 특히 예전엔 셋째 계집보다도 더 사이가 좋았어.”
둘째 나리는 가슴이 답답해져 한숨을 쉬고는 피곤한 듯 말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듯 그건 예전의 일입니다.”
위국공이 했던 이야기를 전한 둘째 나리가 이어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철이는 이미 성인이고 또 관직에도 올랐으니, 그 사람도 당연히 철이가 집안에 남는 것을 걱정하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철이가 양자의 신분이 되면 가족을 부양할 의무도 없게 되지요. 나중에 혼인하면 분가를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분가해서 나가면 그 사람이 데려가는 것과 다를 게 뭐 있습니까?”
맹 노부인은 둘째 나리의 말을 조용히 듣더니 성나서 발을 굴렀다.
“역시 독한 계집이로군. 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동안 키운 아들을 이리 내쳐버리다니! 그 애가 계산을 참 잘했구나. 지금 이게 혼수도 다 돌려주어야 하고 아들도 결국엔 자신에게 올 거라는 뜻 아니냐?”
둘째 나리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냥 방영에게 우선 그 아이의 마을을 양도하고 나중에 집안에 돈이 생기면 다시 돌려주겠다고―”
맹 노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 일은 꺼내지 말거라. 방영이 마을을 양도한다는 말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그 아이는 네 친동생 아니냐. 딸도 있는데 그리 쉽지 않을 게다!”
둘째 나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럼 나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둘째 나리는 친동생인 정방영에게 적지 않은 불만이 쌓인 채였다.
맹 노부인은 집안의 골칫거리들을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 * *
둘째 나리는 백부를 나와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위국공부로 향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위국공부 근처 찻집에서 만난 정미가 제 아버지에게 차분히 물었다.
정미가 부르는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이미 조금의 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호칭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둘째 나리가 정미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미야, 둘째 오라버니를 위국공부에 불러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으냐?”
정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러고 싶지요.”
둘째 나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 사람은 철이를 포기할 수 있어도 이 딸은 오라버니를 못 놓지.’
“그러고 싶다면 아비에게 방법이 있다.”
둘째 나리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정미에게 당부했다.
“가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그러자 정미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번 시도해볼게요.”
오후가 되자, 정미는 다시 둘째 나리와 만나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제가 간절히 부탁하니 결국 이기지 못하고 그 마을은 포기하겠다 하셨어요. 하지만 은 만 냥은 3년 안에 갚아야 한대요.”
하나라도 덜게 되자 둘째 나리는 맹 노부인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곧바로 위국공과 약속을 잡아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 * *
저녁이 되자, 정미는 정철을 만날 수 있었다.
정미는 그를 만나자마자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마을 하나로 바꿔온 거야. 나와 어머니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어?”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더니 따뜻하게 웃었다.
“어머니껜 당연히 감사해야지. 근데 마을이 미미 것도 아닌데, 미미한테는 왜 감사해야 해?”
정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왠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오라버니가 위국공부로 오고 나서 나한테 더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당연히 항상 친하게 지내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부러 조금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었는걸. 최소한 언행 상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리낌 없이 굴지는 않았어.’
정미가 눈을 들어 정철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녀는 미소 짓는 정철의 얼굴에서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자 조용히 속으로 중얼댔다.
‘설마 나처럼 회인백부를 떠나서 기쁜 마음에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건가. 어쨌든 간에 이제 우리 둘 다 그 엉망진창인 곳을 떠나왔으니 아주 좋은 일이긴 하지.’
정미는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어머니의 혼수는 나중에 내 것이 될 거였는걸. 오라버니가 내게 고마워하는 게 뭐가 이상한데?”
정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숙여 정미를 보고 작게 말했다.
“그 말은, 미미가 나를 샀다는 거야?”
정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오라버니가 방금 한 말,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데? 내가 샀다면 내 사람이 되었다는 뜻 아냐? 내 사람? 아, 더 생각하면 안 되겠다. 얼굴이 불타오를 것 같아!’
정미는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정철의 앞에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가볍게 기침하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게 이해해도 돼.”
정철이 가볍게 웃었다. 낮고 걸걸한 웃음소리에 정미는 얼굴의 열기가 한참 동안 가시지 않았다.
밤이 되자, 위국공부의 사람들이 모두 단 노부인의 거처에 모여 정철을 환영했다.
신중한 언행에 침착한 분위기의 정철을 보자 위국공부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고 단지 그의 험한 팔자를 안타까워했다.
술과 요리를 어느 정도 먹었을 때쯤 위국공이 말했다.
“철아, 이제 회인백부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위국공부에서 지내거라. 앞으로 여기가 네 집이다. 우리도 이미 상의해보았는데, 곧 황도길일(*黃道吉日: 어떤 일을 처리하기에 좋은 날짜)을 받아 네 어머니 이름에 널 정식으로 올릴까 한다. 앞으로 집안을 지탱하려면 네 어머니와 여동생이 너를 의지해야 할 테니.”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위국공에게 읍을 했다.
그러자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정철이 천천히 허리를 펴고 낭랑하게 외쳤다.
“국공야의 두터운 보살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성인이고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능력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위국공부 근처에 제가 지낼 작은 집을 빌려놓았습니다. 어르신들께 문안 인사를 드리기에도 편하고 집안일을 보기에도 편할 겁니다. 어르신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 씨는 놀란 표정으로 정철을 쳐다봤다.
정수문과 이혼한 과정은 거의 다 아들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최소한의 대가로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갈 수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과정 하나하나마다 한 씨의 장자는 백부 사람들의 반응을 모두 꿰고 있는 듯 굴었다.
한 씨는 이미 정철을 친아들처럼 여겼고 자신과 정미의 버팀목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위국공부에 머물지 않으려고 할 줄은 몰랐다.
위국공 부인 도 씨가 입을 열었다.
“철아, 그렇게 말하면 너무 섭섭하지 않으냐. 위국공부는 크기도 크고 네 거처도 이미 마련해놓았는데, 어찌 다른 집을 구해 살겠다는 말이냐. 괜히 돈만 나가는 일 아니겠니.”
단 노부인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철아, 내 눈엔 너는 미와 마찬가지로 내 친손주다. 걱정하지 말고 여기 지내거라. 한지와 다른 손주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철은 공손한 태도로 확고하게 말했다.
“어르신들의 깊은 배려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내라면 부모님과 아내가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만들기 위해 독립하려 노력해야지, 어르신들의 보호 아래 숨어있어선 안 되지 않습니까. 마침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어르신들께서 제 계획을 이루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도 씨가 말을 이으려고 하자, 위국공이 말을 끊었다.
“하하하, 철이 말이 맞구나. 사내라면 하늘을 떠받치고 서야지. 나가서 살기로 결심했다면 우리도 막지 않겠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혼자 앓지 말거라. 위국공부는 앞으로 영원히 네 집일 테니.”
노위국공은 장자의 말에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고생을 해봐야 더 강인해지는 법이지.”
전 가주와 현 가주가 이리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철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름을 올리는 일은…… 어르신들, 특히 어머니께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위국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 주관이 있고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수문이 돌아온 그해 위국공부로 달려와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창법을 가르쳐달라 부탁하지 않았을 테니.’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정철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사람에게 뿌리가 없다면 물 위의 부평초나 다름없습니다. 제 출신이 드러난 이상 친부모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는 영원히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이 철이의 이기심을 용서해주세요.”
정철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한 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한 씨는 멍하니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아들을 쳐다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철아, 나를 어미로 여기지 않는 것이냐?”
방 안은 조용해졌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혀있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정철의 불효를 지적하는 듯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정철은 곧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아직도 아들을 모르시는 겁니까? 어머니는 영원히 제 어머니이십니다.”
“그럼 왜 이름을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냐?”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에 한 씨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네 친부모를 찾는다고 해도, 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찾지 못하면 어쩔 셈이고?”
“아들은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 뜻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철이 몸을 숙여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고개를 들자 이마가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