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52화 (252/375)

252화. 차용증

팔근은 생각할수록 후회가 되어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정철을 바라봤다.

“공자님,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정철이 실소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보라고 한 것뿐이야. 여기 백부에 남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거든.”

최근 주인이 집안에 벌인 일들을 보아 팔근도 당연히 여길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소매를 남겨두려고 하자 왠지 동정심이 일어 소매를 좋게 말해주었다.

“소매는 온화하고 진중하지요. 다른 사람과 쓸데없는 말을 하지도 않고요. 주인님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간에 소인이 본 소매는 늘 한결같았습니다. 소인이 보기에는, 소매는 다른 아가씨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집안의 여종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여인인 것 같습니다.”

정철이 팔근을 빤히 쳐다보았다. 팔근은 스스로 또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데, 정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팔근, 소매를 네 아내로 맺어주는 건 어떠하겠느냐?”

“예?!”

팔근은 무릎을 꿇을 뻔했다.

주인이 가졌던 여종을 하인에게 상으로 주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은혜로 여기기도 하니까. 하, 하지만 공자님도 그런 짓을 하실 분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그, 그, 그건…… 공자님, 소인은 그러려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정철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소매와 몸을 가까이한 적 없다.”

“예?!”

팔근은 이번엔 더 크게 놀라 떨어질 것만 같은 아래턱을 받치며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자님, 그럼, 그…… 그런 책들은 어떻게 그려내신 겁니까?”

정철이 굳은 표정으로 팔근을 한 번 훑어봤다.

팔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소매는 좋은 아가씨이고 성의를 다해서 나를 몇 년간 모셨지. 원래도 그 아이에게 좋은 혼사를 마련해줄 생각이었어. 이 일은 급하지 않으니, 너도 조금 고민해 보거라. 원치 않으면 다시 다른 곳을 찾아볼 테니. 어쨌든 내 서재의 지배인도 열몇 명이나 되지. 그중에 젊은이도 적지 않거든.”

‘젊은 지배인’이라는 말에 팔근이 발끈했다.

“원합니다!”

주인이 웃음을 머금고 쳐다보자 그는 무안한 듯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소매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할진 모르겠네요.”

정철이 웃었다.

“물러나거라.”

팔근이 휘청거리며 나갔다.

정철은 이미 식은 밤떡을 조금씩 먹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한편 염송당의 분위기는 그리 화목하지 않았다.

정방영은 손수건을 쥐고 눈물을 닦고 있었다.

“어머니, 제가 급히 돌아와서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았음 둘째 오라버니의 뜻에 따라 제 혼수로 보냈던 마을을 양도하실 셈이었지요?”

맹 노부인은 유일한 딸을 진심으로 아꼈기에 이 말을 듣고 해명하려 했다.

“방영아, 네 둘째 오라버니 탓이 아니다. 오늘 장부를 계산해봤는데 한 씨의 혼수를 돌려주려면 어떻게 해도 부족하더구나. 네 그 마을은 위치가 좋으니 양도한다면 백부의 재산이 바닥나진 않을 게야. 네 오라버니와 조카들이 굶으며 살 순 없는 노릇 아니냐?”

“어머니,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딸을 위해 한 번만 더 생각해보세요. 저도 이혼한 뒤 령운을 데리고 백부에서 지내곤 있지만, 평생 이렇게 지낼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게 아무런 재산도 남아 있지 않으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한 씨의 혼수에 조금 부족하더라도 괜찮을 거예요. 그동안 한 씨가 오라버니에게 얼마나 일편단심이었어요? 지금은 이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어머니도 여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라버니가 조금 자세를 낮추고 몇 마디만 좋게 얘기하면 그 애가 봐줄지도 모릅니다.”

맹 노부인은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사흘이 지났고 이른 아침부터 위국공이 찾아왔다.

위국공은 젊은 시절 각지를 전전하며 싸우다가 손을 다쳐 다시는 창을 들 수 없게 되었고, 병권(兵權)을 내려놓은 뒤 수도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니 위국공의 얼굴엔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와 책을 많이 읽은 학자처럼 살짝 창백한 안색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그는 천천히 장책(*帳冊: 장부)을 넘겨보고 있었다. 방 안은 유난히 조용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둘째 나리는 그 옆에 앉아있었는데 곧 꺼낼 말을 떠올리니 기분이 왠지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위국공이 마침내 장책을 덮어 옆에 두고는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

“정 대인, 맹 노부인과 장로분들은 어디 계신가?”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둘째 나리의 낯이 뜨거워졌다.

“국공야(*国公爷: 국공부의 주인을 부르는 경칭).”

둘째 나리가 공수하며 말을 이었다.

“소제(小弟)에게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명주를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위국공의 날카로운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정 대인과 내 여동생은 이미 남남이니 앞으로 내게 자신을 ‘소제’라 칭하지 마시오. 그건 적절치 않으니. 그리고 내 여동생의 규명(閨明)도 바깥 사내가 함부로 부를 수 없으니 정 대인이 염두에 둔다면 좋겠군.”

둘째 나리는 면전에 대고 비난을 받았음에도 출신이든 명망이든 자신과 급이 다른 사람 앞에서 그저 화를 꾹 삼킬 수밖에 없었다.

“국공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저 한 씨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니 국공야께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말했듯이, 둘은 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아직 할 말이 있단 말이오? 정 대인이 내 여동생을 보고 싶다고 해도 미안하지만 허락할 수 없소.”

둘째 나리의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어머니의 제의는 나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명주에게 무정하게 굴었고 지금은 이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내가 고개를 숙이고 몇 마디만 하면 한 씨가 손을 들 거라 자신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할 줄이야!’

둘째 나리가 위국공을 흘끗 쳐다봤다.

‘위국공은 수도로 돌아온 뒤 한 번도 직무를 맡은 적 없고 아마도 술에 빠진 것 같던데, 나도 다른 이들이 아쉬워하는 걸 많이 들었지. 그리고 내 기억 속 위국공은 집안일에 그리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한 번 사이가 나빠지면 이리도 어려운 사람이었군.’

“정 대인, 이 장책은 다 보았소. 마을 하나와 골동품들을 환산한 만 냥 정도가 비는 듯한데.”

둘째 나리가 소매로 식은땀을 닦았다.

“국공야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백부의 사정에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를 메운 것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차용증을 쓸 테니 기한을 조금 늦춰주십시오. 저와 그 사람이 이혼했다고 해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부로 지내왔지 않습니까. 게다가 철이는 아직 백부에서 지내고 있고, 곧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낳아야겠지요. 여기저기 돈이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저희 백부에서도 이미 최대한 혼수를 메웠으나 재산이 바닥나게 되면 저희는 둘째치고 철이도 고생하게 될 겁니다.”

“정 대인의 말도 일리가 있군.”

위국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나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제가 차용증을 쓸 테니 잘 챙겨두십시오.”

차용증을 쓰면 우선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아무리 종잇장일 뿐이라도 쓰여진 돈은 어쨌든 갚아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철이의 혼례와 돈이 필요한 곳을 잘 말하기만 하면 철이를 아끼는 그 사람이 정 없이 내치지는 않겠지.’

둘째 나리는 급히 차용증을 쓰고 지장을 찍은 뒤 위국공에게 건넸다. 위국공은 차용증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칭찬했다.

“정 대인은 필체가 참으로 훌륭하군.”

“과찬이십니다.”

둘째 나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먹 자국이 마를 때쯤, 위국공은 차용증을 잘 접어 소매에 넣다가 멈칫하더니 웃으며 둘째 나리를 쳐다봤다.

“사실, 내게 생각이 있긴 한데.”

“예?”

“이혼 전에 내 여동생이 철이를 데려가고 싶어 했다던데, 사실인가?”

둘째 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국공이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내 여동생은 돈에 그리 마음을 두는 아이가 아니지. 정 대인은 왜 그 아이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소? 여동생의 기분이 좋으면 이 차용증도 아무렇게나 태워버릴지도 모르는데.”

둘째 나리의 마음이 흔들렸다.

‘시간을 끌 목적으로 차용증을 쓰긴 했지만, 위국공부에서 인정사정없이 돈을 갚으라 백부를 압박한다면 이 빚더미에서 헤어날 수 없을 테지.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상황은 이대로 무기한 연장되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은 고작 며칠의 시간이라도 얻게 되는 것이다. 철이와 충정후부의 혼사가 무산되긴 했지만 1~2년 안으로는 혼례를 치러야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집안의 여식을 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때가 되면 또 돈이 많이 들 거다. 하지만 만약 철이가 그 사람을 따라간다면…….’

둘째 나리는 왠지 달갑지 않았다.

그는 그 양자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총애는 원래 종잡을 수 없고 철이는 아직 젊으니, 평생 일어나지 못할 리 있겠는가? 이렇게 한 씨에게 보내버리는 건 확실히 아쉬운 일이긴 하군.’

위국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여동생에게 말해보겠소. 만약 그러겠다고 하면 정 대인께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둘째 나리는 여전히 마음이 정해지지 않아 긍정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위국공이 떠나자, 그는 곧바로 맹 노부인을 찾아가 이 일을 상의했다.

“아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철이는 우리 집안에 남기는 게 좋겠습니다. 고생해서 기른 아이이니 나중에 백부에 조력이 되어 줄 테지요.”

맹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둘째야, 어리석은 생각 말거라. 철이가 한 씨와 셋째 계집과는 사이가 어떻고, 또 너와는 사이가 어떤지 생각해보았느냐? 네가 한 씨와 이혼한 뒤, 억지로 백부에 남겨두긴 했지만 사람은 붙잡아둘 수 있어도 마음은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더냐? 게다가 지위를 양자로 바꾸기로 했으니, 속으로는 이혼한 일을 원망하고 있을 게다. 나중에 조력은커녕 몰래 나쁜 꾀를 쓰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둘째 나리가 침묵하자 맹 노부인이 이어서 말했다.

“애초에 철이를 보내지 않으려던 것도 첫째는 한 씨의 뜻에 따라주기 싫음이오, 둘째는 집안에 장원랑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듣기엔 좋기 때문 아니었느냐. 지금 한 씨가 그런 뜻을 내비쳤으니, 이 기회에 보내버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

맹 노부인은 잘 정리된 장책을 가져와 붓을 들고 휙 그어버리며 웃었다.

“기다려 보거라. 철이를 데려간다는 것도 분명 한 씨의 뜻이겠지. 마을 하나와 은 만 냥은 너무 값싼 것 아니겠느냐? 이것들도 다 보낼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둘째 너는 네 친아들인 희와 양이나 잘 키우거라. 나중에 그 아이들이 출세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아비로서 네 능력이 인정되는 셈이니.”

맹 노부인의 말에 둘째 나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이 되기도 전에 위국공은 다시 둘째 나리와 만나 아까의 차용증을 밀어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동생이 그리 완강할 줄은 나도 몰랐군. 그때 백부에서 철이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으니 여동생도 필요 없다고 하였소. 게다가 철이는 이미 가관까지 한 사내이니, 그리 걱정이 되지도 않는다고. 백부에서 철이에게 잘 대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소. 아 참, 이 차용증도 동의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겨우 설득해서 사흘 정도는 미룰 수 있게 되었소.”

위국공이 애초에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둘째 나리도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한 씨가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일말의 망설임과 복잡한 마음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 사람이 동의하지 않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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