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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51화 (251/375)

251화. 우연한 만남

정미는 용흔이 문밖으로 쫓겨나자마자 자신을 큰 구덩이에 빠트렸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금족령이 풀리자 곧바로 환안에게 명령했다.

“이 시각이면 곧 둘째 오라버니가 일을 마치고 나올 거야. 네가 한림원 입구로 가서 기다리다가 오라버니를 보면 내 금족령이 풀렸다는 소식을 알려줘. 오라버니가 안심할 수 있게.”

“예.”

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화미가 찐 밤떡을 조금 챙겨가도록 해.”

* * *

환안은 정미의 명령을 받은 뒤 면포로 꼼꼼히 가린 바구니를 들고 한림원 밖에서 기다리다가 정철이 나오는 게 보이자 급히 맞이하며 다가갔다.

“환안? 셋째 아가씨가 보낸 것이냐?”

정철의 시선이 환안이 든 바구니에 꽂히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먹을 걸 챙겨줄 생각도 한 것 보니 미미에게 큰일이 난 건 아닌 모양이구나.’

“따라오거라.”

정철은 환안을 데리고 한림원 근처의 찻집으로 갔다. 그들은 구석지고 조용한 아실로 들어가 앉은 뒤, 그제야 정철이 환안에게 물었다.

“셋째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느냐?”

‘요 이틀 동안 집에 돌아가면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지. 미미와 따로 만나지도 못했고. 미미가 불안해하고 있진 않을까? 이혼은 부부에게도 큰일이지만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니까.’

아직 급계도 하지 않은 소녀가 안 좋은 일을 겪게 되었으니 정철은 마음이 아팠다.

‘다행이야. 조금만 더 있으면 해결될 테니.’

“아가씨는 잘 지내세요. 노위국공 부인께서 형무원에 거처를 마련해주셨어요.”

둘째 공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라는 주인의 명령이 떠오르자, 환안은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형무원은 부인께서 예전에 지내셨던 곳인데 이연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 안에는 녹매도 몇 그루 심겨 있고요. 어찌나 희한한지 저희가 보기에도 아주 신기하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꽃이 다 지고 없지만요…….”

정철은 조용히 환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환안이 아무리 재잘대도 전혀 싫은 기색 없이 입가엔 옅은 웃음기를 계속 띠고 있었다.

‘시종들이 마당의 녹매도 신경 쓸 겨를이 있다니. 미미의 기분도 그리 나쁘지 않은가 보구나.’

정철은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부를 떠나는 건 미미가 줄곧 바라왔던 일일 텐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있겠어?’

“아, 맞다. 아가씨께서 저를 보내신 이유는 아가씨의 금족령이 풀렸다는 걸 둘째 공자님께 알려드리기 위해서였어요.”

환안은 드디어 중점을 떠올렸다.

“음?”

정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에는 기쁜 기색이 스치는 듯 싶다가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설마 경왕세손이 찾아간 건가?”

환안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정철이 따스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오늘 아침에야 미미를 데리고 위국공부에 갔으니 노위국공 부인도 당연히 오늘 입궁하시진 않았겠지. 아무리 빨라도 내일일 테고. 그 외에 감히 황상을 귀찮게 굴 사람은 용흔밖에 없으니까.’

정철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용흔이 날 찾아와 미미에 관해 물어봤을 때부터 경왕세손이 분명 이 일에 끼어들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경왕세자비의 성정이면 며칠 전부터 용흔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도록 잡아두었을 테고. 그러다 어머니께서 이혼하셨으니, 가장 약해 보일 시기고 황상께서도 이혼한 어머니와 딸인 정미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 터. 거기다 경왕세자비와 위국공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풀어줄 법도 해.’

정철은 고작 여종에게 이런 말을 자세히 할 필요 없었으므로 그저 옅게 웃었다.

“아무렇게나 추측해보았다.”

환안이 눈을 반짝이며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정철을 쳐다봤다.

“둘째 공자님은 정말 잘 맞히시네요.”

그러더니 뭔가 떠오른 듯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경왕세손께서 저희 아가씨께 무슨 말을 했는진 못 맞히실걸요.”

“음? 경왕세손이 미미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했느냐?”

정철의 눈빛이 굳었다.

환안은 조금 곤혹스러워했다.

“소인이 듣기엔 꽤 이상했어요. 놀라서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한걸요. 하지만 아가씨는 침착하셨어요.”

‘시종이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놀랐다니 자세히 물어봐야겠군.’

“경왕세손이 무슨 말을 했느냐?”

정철이 참을성 있게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환안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소인도 한마디밖에 듣지 못했어요. 경왕세손께서 아가씨를 미래의 아내라고 하셨고 그렇기에 아가씨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둘째 공자님, 저희 아가씨가 언제부터 경왕세손의 아내가 될 분이셨나요? 소인은 그때 듣자마자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고요. 결국 찻잔을 지키려다 머리를 부딪쳤고…….”

정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입가엔 여전히 웃음기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굳어있었다.

‘나는 그런 매제를 인정한 적 없는데?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용흔이 정미의 앞에서 당당하게 그런 말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철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당황할만한 일은 아니지. 몇 년 동안 지켜봤지만 용흔이 미미와 혼인하고 싶다고 해도 절대 이루어질 수 없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왕세자비라는 관문을 넘을 수 없을 테니. 경왕세자비가 왜 이 일을 그리 꺼리는지 그 속사정은 나도 알지 못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결국 다 비슷하니까. 용흔이 경왕세자비를 설득한다고 해도 내가 허락지 않을 거고.

여인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내려 하는데 그 깊고 큰 저택에서 어떻게 사내의 마음에만 기대어 살 수 있겠어. 게다가 사람의 마음은 늘 복잡하고 변덕스러우니까.

원래는 위국공부의 한지와 한평이 미미와 나이가 비슷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한지는 성정이 지나치게 고집스럽더군. 미미가 한지에 대한 마음을 포기해서 다행이지. 한평은 평소 말수가 적지만, 사실은 총명한 아이지. 하지만 미미에겐 그저 순수한 남매의 감정 있을 뿐.’

정철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라버니로서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고 아무리 조건에 맞는 사람이 되어도 그저 오라버니로만 남아야 한다니. 이게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둘째 공자님?”

환안은 정철이 갑자기 입술을 꾹 다물자 분명 옥처럼 부드러운 귀공자인데도 왠지 두려워져 저도 모르게 불러보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밀어내며 말했다.

“이건 아가씨께서 챙겨주신 밤떡이에요. 맛이 아주 좋답니다.”

정철은 생각을 접고 바구니를 가린 면포를 걷어냈다. 바구니 안엔 솜이 두껍게 깔려있었고, 찬합을 열어보자 따뜻한 밤떡이 들어있었다.

밤떡은 위와 장에 좋은 음식이었다.

‘예전에 미미가 늦게까지 공부하는 내 속이 걱정되어 종종 여종들에게 밤떡을 만들라 시켜 보내오곤 했었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나도 잘 먹게 되었어. 습관이 되어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좋아서 습관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

정철은 밤떡 한 조각을 집어 먹은 뒤 말했다.

“너희 아가씨께 안심하고 기다리면 걱정하고 있는 일은 모두 해결될 거라 전해드리거라. 그리고 또―”

정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마음속에 차오르는 씁쓸함을 꾹 참고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 아가씨께선 시집을 가지 않고 출류발췌한 부의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걸 지지할 거고. 만약…… 만약 마음이 바뀌어 연모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라버니인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게 알려줘야 한다고 전해드리거라.”

“예.”

환안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찻집을 나올 때까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가씨께서 시집을 가지 않겠다 하셨다고? 오늘 충격적인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때, 멍하니 걷던 환안이 돌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마침 앞에 있던 사람의 다리가 보여 무의식중에 그 사람의 바지를 붙잡자 그 사람의 바지도 환안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뜻밖의 봉변을 당한 사내는 양손으로 바지춤을 꽉 붙잡고 당황하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이오?”

환안이 연거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수로 넘어졌어요…….”

“손이나 놓으시오!”

사내는 거의 글썽거리며 말했다.

‘이 망할 여자, 힘이 어찌 나보다도 센 거야? 바지를 놓칠 것 같다고!’

환안이 황급히 손을 놓고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동시에 멍해졌다.

“너였어?”

“너였구나!”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환안이 급히 일어나자 사동 차림을 한 사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 계집, 드디어 따로 마주치게 되었구나. 네가 그 책을 빼앗아서 내가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아?”

‘심지어 오늘도 주인님이 돌아오신 뒤, 왠지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고. 내가 눈치가 빠르지 않았다면 진작에 걷어차여 죽었을걸. 지금도 주인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좋은 책이 있나 잠깐 나와본 거였고. 혹시 찾으면 만사대길일 테니. 근데 왜 또 이 후안무치하고 힘만 센 여종을 만난 거야?’

사동이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저번 일은 오늘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내 이번에 또 지면 저 계집의 성을 따르지!’

환안이 엄숙한 표정으로 외쳤다.

“잠깐!”

“뭐냐?”

사동은 멍해졌다.

환안은 사동이 방심한 사이 잽싸게 달아났다.

사동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급히 쫓아가며 외쳤다.

“어이, 돌아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게 어디 있냐고!”

* * *

정철은 회인백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하인들은 모두 복잡한 표정으로 인사하고는 급히 고개를 떨구고 피해갔다.

정철은 차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정일헌으로 돌아왔다.

“공자님.”

팔근이 맞이했다.

“오늘 집안 분위기는 좀 어떻더냐?”

팔근이 성난 표정으로 불평했다.

“그 건방진 것. 평소엔 그리 친근하게 굴더니 지금은 은을 몇 조각이나 쥐어 줘야 겨우 몇 마디 내뱉고 말입니다!”

정철이 옅게 웃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느냐. 우리가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중점만 말하거라!”

팔근은 정철의 말을 듣고 속이 시원해졌다.

‘그래, 우리 공자님이 누구신데? 그 유명한 한수 선생이시잖아. 육출화재도 공자님이 여신 거라고. 돈이라면 집안 누가 우리 공자님과 비교할 수 있겠어? 흥,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노부인께서 회인백 부인을 불렀고 셋째 부인은 계속 장부를 조사하며 하루 종일 창고를 정리하셨답니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다 팔았다고 하더군요. 아, 참. 교외에 계신 부인께서 오늘 오후에 급히 돌아오셨다가 집안 어른들과 크게 싸웠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소매가 쟁반을 받치고 들어와 찻잔을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공자님, 차 드세요.”

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쪽 무릎을 내어 인사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팔근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소매는 정말 다른 교활한 여종들보다 훨씬 훌륭하네요. 하하, 역시 공자님이 사람을 잘 가르치십니다.”

정철이 팔근을 한 번 흘겨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팔근, 소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팔근은 잠시 멍해졌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고, 공자님, 소인이 하늘에 맹세하건대 절대 다른 뜻으로 드린 말은―”

팔근은 정철의 심복 하인이었지만, 정일헌에 머무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주인이 소매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공자님 같은 사람이 고작 통방과 관계가 뜨거워지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공자님은 평소엔 상냥하시지만 실은 무척 위엄있으시다고. 나도 항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만약 공자님께서 내가 소매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오해하시면 정말 목숨이 달아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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