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오해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위국공부엔 매화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고 거대한 매화숲 외에도 창밖 곳곳에 있어 어디든 구불구불한 매화나무 가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계절에는 백매도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다.
정미는 용흔을 등지고 서서 작게 말했다.
“이유도 없고 제가 뭐가 되어서도 아닙니다. 용흔, 만약 한 사람을 진심으로 연모하게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이유가 없는 것이니까요.”
정미는 마침내 뒤돌아서 용흔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안 좋아하기 때문에 안 좋아하는 겁니다. 아무도 속일 수 없지요. 제가 한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어찌 되었든 간에 앞으로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오늘 제 여종이 억울하게 문틀에 이마를 부딪쳤지 않습니까.”
용흔은 멀리 떨어진 정미의 말을 들으며 창가에 서 있는 소녀가 먼 하늘에 있는 듯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 생각이 들자, 용흔은 당황스러워져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만약 정말 좋아한다면?”
“제 어떤 점이요? 고칠 수 있어요.”
정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용흔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못난 계집,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뇨, 진심입니다. 저는 시집갈 생각이 없어요. 세손이 그렇게 제멋대로 굴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용흔이 대답하려 하자 정미가 이어서 말했다.
“용흔, 만약 어떤 사내가 남 군주에게 달려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남 군주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쫓아내야지. 개나 소나 내 여동생 앞에서 허튼소리를 할 수 있는 줄 알아, 간도 크지!”
용흔이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채고 덧붙였다.
“하, 하지만 이건 좀 다른데…….”
“다른 건 없습니다.”
정미가 웃었다. 용흔은 왠지 그 웃는 얼굴에 약간의 비웃음이 비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용흔,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거지요.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내려준 사내든 아니면 보통 사내든 여인의 눈엔 똑같아 보입니다. 최소한 제 눈에는 그렇지요. 말씀하셨듯이, 만약 어떤 사내가 남 군주에게로 가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분명 쫓겨났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언행이 이와 다를 게 뭐 있습니까? 부모의 명이 없고,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묵약(默約)이 없는 이상, 당신이 내게 와서 한 말들은 그저 당신이 경왕세손이라 가능했던 것일 뿐이고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식의 애정은 조금도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용흔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 당황한 나머지 말꼬리를 잡았다.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어째서?”
이미 여기까지 얘기한 이상 정미는 몹시 태연했다.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저는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도 원치 않습니다.”
‘못난 계집이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용흔은 대로했다.
‘아직도, 아직도 한지를 좋아하고 있다니! 여우에게 홀려서 정신도 못 차리는 녀석이 뭐가 좋다는 거야? 안 되겠어. 못난 계집은 눈이 멀어서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니 방금 들은 말이 일리가 있긴 해도 여기서 포기할 순 없겠어. 어찌 되었든 간에 못난 계집을 한지라는 구덩이에서 빼내 내게 빠트려야겠다고.’
용흔이 굳은 표정으로 비웃었다.
“나보다 좋은 사람 같지 않은데? 최소한 나는 널 마음에 두고 있고 이렇게 네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도 있지. 근데 그자는 할 수 있어? 못난 계집, 내가 이러는 게 널 존중하지 않는 거라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않도록 하마.”
‘하하, 어쨌든 이제 못난 계집이 내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머니를 설득해야겠어. 찾아와 혼담을 꺼내라고 말이야!”
용흔의 우렁찬 한마디에 정미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미가 당황하는 사이, 용흔이 다가와 정미의 옥비녀 하나를 뽑아내더니 빙그레 웃었다.
“이건 우선 가져가지. 혼례 하는 그날에 다시 꽂아줄 테니.”
작은 패왕은 이 말을 남기고 뒤돌아 달아났다.
정미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돼. 저 무뢰한이 내 비녀를 훔쳐 가면 결혼을 약속했다는 증거물이 되는 거 아냐? 그건 절대 안 되지!’
작은 패왕이 입구까지 달아나자 정미는 도무지 따라잡을 자신이 없어 다급한 나머지 재빨리 자수 신발 한 짝을 벗어 던졌다.
신발은 용흔의 뒤통수에 가 맞았고 용흔이 비틀거리는 사이 정미는 재빨리 쫓아가 비녀를 다시 빼앗았다. 그러곤 문을 열고 작은 패왕을 걷어차 쫓아냈다.
문을 닫은 정미는 그곳에 기대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조용해졌구나.’
하지만 주위가 조용해지니 정미의 귓가에 용흔의 말이 맴돌았다.
‘나보다 좋은 사람 같지 않은데? 최소한 나는 널 마음에 두고 있고 이렇게 네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도 있지. 근데 그자는 할 수 있어?’
‘오라버니가 할 수 있을까?’
정미는 허리춤의 향낭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는 당연히 그러지 않을 거야. 퇴혼한 뒤 혈혈단신이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온 세상을 깜짝 놀랄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 눈에 우리는 여전히 남매잖아. 정말 그놈의 남매, 짜증 나 죽겠다니까!’
정미는 입술을 깨물다가 더는 생각하기 싫어 창가의 책상 앞에 앉아 사부가 준 책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 * *
용흔은 아주 구린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걷어차여서 쫓겨나고 신발로 맞기까지 하다니. 게다가 더 중요한 건, 비녀도 잃고 신발도 빼앗지 못했다는 거야!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용흔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못난 계집, 기다리고 있거라. 나중에 내 아내가 되면 네 자수 신발을 들고 엉덩이를 세게 때려버릴 테니까. 그때가 되면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을걸. 그리고 일야십차랑(一夜十次郞)이 되어서 침상에서 내려가지도 못하게 할 거다!”
작은 패왕은 최근 많은 걸 알게 된 바였다. 그 멍청한 사동이 마침내 그림책을 사는 데 성공했고 안에 적힌 이야기는 예전에 보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도대체 어떻게 침상에서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건진 정확히 모르지만,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는걸. 남편이 밤에 여덟 번이고 열 번이고 아내를 호되게 괴롭히면 다음 날 분명 고생하게 될 거라고. 흥, 그때가 되면 못난 계집이 아무리 불쌍한 척해도 절대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거다. 홍소 돼지고기를 들고 침상 옆에서 먹으면서 못난 계집은 그저 쳐다볼 수만 있게 해야지.’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용흔이 소리를 따라 쳐다보자 한지와 한평이 근처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웃음소리는 한지가 낸 것이었다.
용흔은 한지를 보자마자 화가 들끓어 성큼성큼 다가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왜 웃어?”
한지는 주먹을 입에 대며 작게 웃었다.
“방금 뭐라고? 일야십차랑?”
용흔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랑 무슨 상관인데!”
“하하.”
한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용흔,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아닌데, 이상한 책을 많이 봤다고 해도 너도 이미 소성년식을 치렀잖아. 근데도 그런 농담을 해?”
용흔이 경멸하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소성년식과 무슨 상관인데? 한지, 이리 와. 안 그래도 너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으니!”
용흔이 한지의 멱살을 잡고 담벼락 아래로 끌고 갔다. 한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용흔, 뭐 하는 짓이야?”
용흔은 주먹을 휘둘러 한지의 얼굴에 꽂았다.
한지가 급히 고개를 젖혔지만, 주먹에 스친 뺨은 얼얼하게 아파 왔다.
한지는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라 용흔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용흔이 한지에게 발길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다 네놈 탓이다. 곧 혼례도 치를 놈이 왜 아직도 못난 계집에게 집적거리는데?”
“못난 계집?”
한지는 잠시 멍해졌다가 그제야 떠올랐다.
“정미를 말하는 거야? 이게 정미와 무슨 상관인데?”
용흔은 화가 나 한지를 다시 걷어찼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래, 그 말도 맞지. 넌 네가 원하는 바를 이뤘지만, 못난 계집은 너 때문에 앞으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까지 했다고! 한지, 네가 내게 무슨 약속을 했는지 잊었어? 정말 못난 계집을 위한다면 앞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시집을 가지 않는고?’
한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용흔에게 종아리를 걷어차였음에도 반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소녀의 모습이 스쳤다.
‘도도하고 냉담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그게 다 그저 내게 화를 내고 있었던 거였단 말이야?’
용흔이 더 때리려 하자, 한평이 막아섰다.
“세손, 저흰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싸우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용흔은 이미 실컷 때려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주먹을 거두고 투덜댔다.
“이번만 봐주지!”
한평은 그제야 손을 놓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정미에 대해 하신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앞으론 다신 입 밖에 꺼내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미가 정말 시집을 못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한평도 작은 패왕이 정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런데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는 거지, 큰형님은 왜 끌고 오는 건데? 큰형님은 곧 혼례를 치를 거고 정미에게 집적거린 적도 없다고. 근데도 굳이 그 말을 큰형님께 알리는 건 두 사람을 도와주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냐? 나였다면 죽어도 알려주지 않았을 텐데. 연적이 될 생각도 없었던 사내라 해도 어떤 소녀가 자신 때문에 평생 시집을 가지 않을 거라 하면, 큼큼, 정상적인 사내라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지 않을까?’
한평은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용흔을 쳐다봤다.
‘이런 사람을 정미가 좋아할 리 없지. 내가 봐도 역시 사가의 형님이 더 믿음직스러워.’
용흔이 씩씩대며 떠나자, 한평은 조용히 한지를 쳐다봤다. 한지는 미묘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평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한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큰형님, 큰고모님과 정미는 내일 다시 보러 오자. 그럼 마침 셋째와 넷째를 기다렸다가 함께 올 수 있으니.”
한지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그러고는 한평을 한 번 쳐다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평, 용흔의 말이…… 사실일까?”
“뭐가?”
한평은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한지는 낯을 조금 붉힌 채 말했다.
“정미가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
한평이 웃었다.
“세손은 제멋대로인 성정이잖아. 사실인지 아닌지,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늘 중요시하지 않고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곧장 말하지. 내가 보기엔 세손이 오해하신 것 같은데.”
한평은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세손의 말은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마.”
한지가 멋쩍은 듯 말했다.
“그런 적 없어. 잠시 놀랐을 뿐이지.”
한평은 더 이상 이 이야기에 대해 거론하고 싶지 않아 그저 웃기만 했다. 형제는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형무원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왔을 때, 한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생각했다.
‘만약 정미가 정말 아직도 나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한 거라면 난 미안할 수밖에 없겠어. 사실…… 정미도 나쁘지 않아. 최근 2년 동안 철도 꽤 들어서 다신 교만하고 제멋대로 굴지 않으니. 하지만 내겐 이미 정요가 있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어.’
한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근 1년 동안 소원해진 사촌 동생이 자신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하지만 이 기쁨은 아주 은밀한 것이었기에 한평에게는 물론 자신조차 인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