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벗어나다
한 씨가 정미를 데리고 떠나고, 정가의 장로들도 쉬러 돌아간 뒤 집안사람들만 남자 맹 노부인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둘째야, 그렇게 대답하다니. 그 애의 혼수를 어찌 돌려줄 셈이냐?”
둘째 나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혼수는 돌려 줄 수밖에 없습니다. 전처의 혼수를 떼어먹었다는 창피를 당할 순 없지요. 요 몇 년간 백부의 사정도 많이 좋아졌고 거기에다 아들의 봉록을 더하면 일부는 메꿀 수 있을 겁니다. 정 안되면 재작년에 추가로 사들인 점포 두 개를 양도하지요.”
둘째 나리가 회인백과 셋째 나리에게 절했다.
“큰형님과 셋째에게 미안하게 되었어.”
둘째 나리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그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큰형님은 무능하고 셋째는 벼슬도 없으니, 이 백부는 나 혼자 이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지금 내게 사정이 생겼으니 백부의 힘을 모아 함께 난관을 극복해야 마땅해.’
회인백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셋째 부인 풍 씨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둘째 아주버님, 공동 재산으로 아주버님의 혼수를 메꾸는 건 부적절하지 않습니까? 아직 분가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아주버님의 혼수를 전부 집안에 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동안 풍 씨가 지켜본바, 한 씨의 혼수 중 적지 않은 금액은 둘째 나리가 관리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쓰여왔다.
‘게다가 둘째 나리의 첩이 먹는 음식과 옷, 장신구는 정처인 나보다도 좋은 것들이었어. 그리고 어머님의 방 안에 놓인 장식품들을 다시 둘러보니 예전에 이연원에서도 본 적 있는 것들이었지. 좋은 건 이 사람들이 다 누리고 나쁜 건 같이 부담해야 하다니. 정말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구나. 한 씨가 이 추한 곳을 떠나 비웃고 있겠어.’
“너 그게 무슨 말이냐!”
맹 노부인이 풍 씨를 노려봤다.
풍 씨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셋째 나리에게 손을 꽉 붙잡혔다.
풍 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됐다. 나는 나리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훨씬 낫지.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한 씨보단 복이 많구나.’
맹 노부인은 모두를 한 번 훑어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일은 둘째의 말대로 하겠다. 모두 물러나거라.”
사람들이 침묵한 채 방을 나서자 노백야도 그들을 따라갔다.
맹 노부인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노백야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집에 있으니 답답해서 새장을 들고 산책하러 가겠소!”
방 안은 순식간에 텅 비었고, 맹 노부인은 태사의에 기대앉았다. 한 씨의 혼수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 와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 * *
정미는 한 씨를 따라 밖으로 나가다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봤다.
회인백부의 대문 앞에 있는 두 마리의 돌사자는 여전히 맹렬했다. 이제 저길 지나기만 하면 이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될 터였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정미는 눈을 들어봤다. 모처럼 햇살이 화창했고 조금도 춥지 않았다.
“미야, 왜 안 가니? 마차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정미가 한 씨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드디어 여길 떠나네요.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는 아직 여기 남아있는걸요.”
한 씨가 작게 말했다.
“걱정 말거라. 곧이다.”
정미는 오라버니와 어머니가 진작에 얘기를 나눠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사실 걱정이 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꿈이 현실이 되자 믿기 어려울 뿐이었다. 정미는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모녀가 이어서 앞으로 걸어 나가자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언니―”
고개를 돌려보자 정동이 치맛자락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정동은 모녀 앞으로 오더니 한 씨를 보자 조금 어색한지 ‘한 부인’이라 불렀다.
한 씨가 정미에게 말했다.
“어미는 먼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너도 얼른 오거라.”
한 씨가 떠나자, 정동은 정미를 보며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봤다.
결국 정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정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가 다시 물었다.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울 리는 없을 테고.”
정동은 입을 꾹 다물더니 갑자기 정미의 허리를 끌어안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정미는 순간 온몸이 굳어 손을 움찔거리며 이 울보를 품에서 떼어내고자 했지만, 혹시나 정동이 더 크게 울어 소란이 일어날까 봐 마지못해 한숨을 쉬었다.
“정동,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동이 나를 껴안고 통곡하는 건데?’
정동은 정미를 껴안았던 손을 풀며 붉어진 눈을 닦았다.
“그냥 무서워서―”
“뭐가?”
정동은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또 만나’라는 말만 남기고 뒤돌아 달아났다.
정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뒤돌아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먼저 마차에 타고 있던 한 씨가 물었다.
“정동이 네게 볼일이 있었던 거니?”
“딱히요.”
“그럼 왜 너를 안고 울어?”
한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네가 정동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또 무슨 꾀를 쓴 거니?”
정미는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이제 회인백부의 사람도 아닌데 정말 괴롭히더라도 어찌할 수 있겠어요?”
정미는 말하면서 창발을 걷고 앞쪽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머니, 앞으로 위국공부에서 지내는 거예요? 큰고모님네처럼요?”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지. 싫니?”
“아니요. 외조부님, 외조모님과 함께 지낼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요.”
정미는 창발을 내려놓고 옅게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 정요가 위국공부로 시집오게 되면 매일 얼굴을 보게 될 텐데 너무 눈엣가시잖아.’
잠시 뒤 모녀는 위국공부에 도착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단 노부인의 거처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씨가 정미를 데리고 들어가자 단 노부인이 정미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우리 미가 또 살이 빠졌구나. 이 할미는 걱정이 되어 죽겠다.”
정미도 단 노부인을 껴안으며 위로했다.
“울지 마세요, 외조모님. 저는 멀쩡한걸요. 앞으로 매일 외조모님과 붙어있을 테니 귀찮다고 여기지만 않으시면 돼요.”
단 노부인은 눈물을 그치고 웃었다.
“귀찮을 리가. 보고 또 봐도 모자라는데.”
그러고는 한 씨를 보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왔느냐? 제대로 처리했고?”
“예, 사흘 뒤 큰오라버니가 가서 혼수를 받아오면 됩니다.”
단 노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한 씨는 멋쩍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넷째 부인 조 씨가 다가와 한 씨를 붙잡고 웃었다.
“큰시누이가 돌아온 게 그 무엇보다 좋은 일이지요. 노국공과 노부인께서 매일 기다리고 계셨답니다. 그리고 미도, 집안에 자매가 많아졌으니 외롭지 않을 거고요.”
넷째 외숙부가 엄숙한 표정으로 정미에게 말했다.
“앞으로 네 어머니를 잘 아껴드리거라. 네 어머니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단다.”
정미는 넷째 외숙부와 어머니의 사이가 가장 좋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정미가 태어나자마자 쌍둥이 오라버니의 죽음에 관련되어서인지 정미에게 냉담하게 굴었다.
그러나 정미는 많은 일을 겪고 나니 중요하지 않은 일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웠기에 넷째 외숙부의 말을 듣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넷째 외숙부님의 말씀이 맞아요. 신경 쓰겠습니다.”
넷째 외숙부는 정미가 꽤 의젓해졌다고 생각해 보기 드문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명주와 미도 이제 막 돌아왔으니 가서 쉬거라. 넷째 며느리가 둘을 안내해주렴.”
단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조 씨는 한 씨 모녀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을 안내받던 중, 한 씨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형무원(蘅蕪苑)으로 가는 겁니까?”
“예, 노부인께서 며칠 전에 이미 사람을 시켜 형무원을 정리해놓으라 하셨습니다.”
한 씨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써 버티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눈가가 붉어질 뻔했다.
형무원은 그리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진 않지만, 위국공부 중 가장 아름다운 거처였다. 한 씨는 시집가기 전 바로 여기서 지냈었는데 시집간 뒤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가장 아름다운 거처를 남겨둔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걸 가졌음에도 나 스스로를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만들고 딸에겐 평범한 가정도 주지 못했구나.’
조용히 뒤따라오는 차녀를 쳐다보자 한 씨는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껴 부끄러워졌다.
“어머니?”
정미가 조금 어리둥절해서 어머니를 부르자 한 씨가 정미를 토닥였다.
“이따 거처를 정리하면 부산스러울 테니 사촌 자매들과 놀고 있거라.”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금족령이 풀리지 않았는걸요. 이제 위국공부가 제 집이라 황상의 뜻을 거스르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조 씨가 웃으며 정미를 쳐다보더니 칭찬했다.
“미가 정말 다 컸군요. 큰형님, 미가 형님을 모실 테니 앞으로 즐겁게 지내셔야 해요. 자기 집이 그 어느 곳보다 편할 테니까요.”
조 씨와 한 씨의 사이는 좋았기에 한 씨는 조 씨의 말에 마음이 많이 누그러질 수 있었다.
형무원에 도착하자 기화이초(*奇花異草: 진귀한 꽃과 풀)가 예전보다 더 무성하게 핀 것이 보였다. 청석길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한 씨는 이를 보고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마침내 정말 집에 온 기분을 느꼈다.
정리라곤 하지만 사실 실내든 실외든 이미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저 방에 둘 병풍과 장식품, 휘장, 문발 같은 건 모두 한 씨의 마음에 드는 대로 고르면 되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자 대부분 마무리되는 듯했다. 정미는 한 씨를 따라 단 노부인에게로 가 식사를 들었다.
한 씨 모녀가 돌아온 날이니, 단 노부인은 일부러 식탁을 세 개나 내오게 해 각 방의 사람이 모두 모여 식사를 들게 했다. 심지어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다섯째 아가씨까지 함께였다.
식사를 마친 뒤, 어른들은 방 안에 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잇따라 밖으로 나갔다.
한추화가 정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정미, 내 방으로 가서 앉아있자.”
그러나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무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금 내 거처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걸. 아니면 언니가 내 방으로 올래?”
“그것도 좋아.”
그때 한추몽이 한추정을 데리고 다가와 물었다.
“미 언니, 큰고모는 정말 이혼하신 거야?”
정미는 한추몽이 윗사람에겐 저자세를 취하고 아랫사람에겐 가차 없이 짓밟는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한추몽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태자비마마가 돌아가신 건 황손 때문이야? 미 언니, 황상께서 금족령을 내리신 것도 그와 관련이 있어?”
정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추몽, 내 큰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 앞으로 그런 말은 다신 듣고 싶지 않아. 너도 눈치가 좀 생겼음 좋겠네.”
정미가 뒤돌아가려고 하자 한추몽이 뒤에서 짜증을 냈다.
“고작 얹혀사는 주제에, 자기 집도 아니면서 뭐가 저렇게 당당한 거람!”
한추정이 한추몽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한추몽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우리가 위국공부의 정당한 아가씨지, 저쪽이 뭐라고? 네가 무서울 게 뭐 있어!”
정미는 다시 뒤돌아왔다. 키가 한추몽보다 머리 반 정도 큰 덕분에 의도하지 않아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방금 한 말, 할 수 있으면 외조모님 앞에서도 해보든지. 그럴 용기도 없으면 입 닫아! 네가 위국공부의 정당한 아가씨인 게 뭐 어때서. 외조모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손녀는 나인걸.”
그러고는 한추정을 한 번 훑어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기억해. 내가 내 자신을 원망하고 다른 집에 얹혀사는 데에 열등감을 가지게 하는 건 불가능해. 외조모님만 원하신다면, 내게 얼마나 잘해주시든 난 그냥 즐겁게 지낼 테니까. 너희들은 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해도 돼. 앞으로 내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나 마. 다음엔 이렇게 좋게 말하지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정미는 한추화를 데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훌쩍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