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45화 (245/375)

245화. 소란의 시작

부둥켜안고 울고 나니 모녀는 왠지 조금 가까워진 기분을 느꼈다.

한 씨는 정미의 어깨를 안으며 말했다.

“울지 말거라. 사실 나도 네 큰언니의 미래를 예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란다. 입궁하자마자 태자의 미움을 받고, 태자비의 명분은 있었지만 보통 집안의 며느리보다 더 힘든 생활을 했을 테지. 이제…… 이제는 거기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 그저 아직 6개월도 안 된 네 조카가 불쌍하구나. 그 아이는 앞으로 어떡한단 말이냐!”

한 씨의 말은 그저 합리화일 뿐이었다. 하지만 딸을 잃은 어미로서 딸이 드디어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낼지도 모른다고 합리화해야만 자식을 잃은 아픔을 견뎌낼 수 있을 터였다.

한 씨가 물었다.

“미야, 네가 조카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 것 말이다. 사실이니?”

“저는 부의 방면에선 절대 허튼소리를 하지 않아요.”

한 씨가 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네가 화 귀비의 미움을 사고 황상께서 직접 집에서 반성하라 명하셨으니 앞으론 입궁할 기회가 없겠구나.”

한 씨는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불쌍한 우리 유야, 어떡하면 좋을까?”

정철의 위로는 정미에게 믿을만한 기둥이 되어주었기에 정미는 침착하게 한 씨를 위로할 수 있었다.

“나중에 방법이 있을 거예요.”

‘내 사부가 정말 국사라면, 화 귀비가 내게 씌운 오명도 당연히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 테지. 만약 사부가 그저 평범한 도사라면, 내가 더 노력해서 얼른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부의가 되면 돼. 그럼 어쨌든 조카의 병을 고칠 기회를 얻을 수 있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은 전혀 두렵지 않아.’

한 씨는 딸이 아무렇게나 위로하는 줄 알고 이 슬픈 화제에서 말을 돌렸다.

“오늘 오후에 네 큰외숙부님, 큰외숙모님, 그리고 셋째 외숙부님네가 찾아왔었다.”

한 씨는 오후에 누가 왔는지 무슨 얘길 나눴는지를 정미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그저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는 말들이었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한 씨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극도의 슬픔에 빠져있을 땐 잠시도 조용히 있을 수 없기 마련이었다.

정미는 창경제의 명령으로 외출할 수 없었기에 친척이나 벗이 찾아온다고 해도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그녀는 한 씨의 말을 진지하게 듣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물었다.

“어머니, 그럼 외조모님은요?”

한 씨는 잠시 목이 메 입을 닫았다가 겨우 얘기했다.

“네 외조모님도 당연히 마음이 편치 않으시지. 같이 오시겠다는 걸 네 큰외숙부님네가 겨우 말렸단다.”

한 씨는 위국공 노부인의 병이 재발할 뻔한 일에 대해선 정미에게 말하지 않았다.

“네 외조모님이 입궁해서 황상께 부탁드리려는 걸 큰외숙부님이 말렸다. 네 큰외숙부의 말이 맞아. 지금은 귀인들께서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니 찾아가도 좋을 게 없어. 며칠 지난 뒤 내가 네 외조모와 함께 궁에 들어가 보마. 어찌 되었든 네 금족령(禁足令)은 풀어야겠어.”

‘멀쩡한 아가씨가 황제에게 금족령을 받다니. 수도에 이름을 떨치게 되겠구나.’

한 씨는 곧 있을 차녀의 혼담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회인백부는 며칠 동안 분위기가 무거웠고 집안 하인들의 발걸음 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붕이 새는데 하필이면 밤새 비가 내리고, 배가 늦는데 하필이면 역풍이 부는 것처럼, 눈 깜짝할 새 정월 대보름이 되었다.

황제는 비빈들을 데리고 천중루(天重樓)에서 등불을 감상하며 백성들과 명절을 즐겼다. 그곳엔 마음에 드는 신하들도 불러 자리를 함께했다. 젊고 출중한 신참 장원랑도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부적절한 언행으로 황상의 심기를 건드렸고 한바탕 꾸중을 들은 뒤 곧바로 내쫓겼다.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가 황상의 미움을 받았다는 일은 하룻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충정후 부인 류 씨가 울다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후야(*侯爷: 중국에서, 후작 작위를 가진 사람에 대한 경칭), 회인백부에 큰일이 난 것 좀 보세요. 저희 용이는 어떡하지요?”

충정후는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찌할 수 있겠소. 시집갈 날이 코앞인데 퇴혼할 수는 없지 않겠소?”

류 씨가 입을 삐쭉였다.

“퇴혼한다면 용이에게 아무나 붙여주어도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장원랑이 뭐 어때서요. 3년마다 하나 나오는 것 아닙니까. 황상의 미움을 받았는데, 앞날이 어찌 창창할 수 있겠습니까? 회인백부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애초에 그 집과 혼약을 맺은 것도 순전히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 때문 아닙니까. 나리, 제가 나리께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중양절에 용이와 입궁했을 때, 귀비마마께서 용이가 우아하고 단아하다 칭찬하셨단 말입니다. 만약 용이가 정혼하지 않았다면, 태자의 양제 자리가 마 시랑 집안의 여식에게 넘어갈 수 있었겠어요?”

“그 얘긴 그만하시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성심성의껏 용이의 혼례를 준비하시오.”

충정후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창경제가 무의식적으로 ‘만약 정 수찬을 사위로 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탄식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어서 안양 공주가 정 수찬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문이 떠오르자, 충정후는 식은땀을 훔쳤다.

‘설마 내가 황상과 사위를 두고 경쟁한 건 아니겠지? 황상께서 원래 마음에 들어 했던 사위를 지금 미워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감히 황제에게 맞선 신하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쩐지, 어쩐지 오늘 천중루에 나를 부르지 않으셨더라니! 이 혼사는 정말 머리 아프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충정후는 흠칫하더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이제 허튼 생각 마시오. 이것도 용이의 운명이니.”

* * *

한편 회인백부의 둘째 나리는 최근 문밖에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정월 대보름 이후엔 어쩔 수 없이 관아로 나서야 했다. 앞에서든 뒤에서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집에 돌아오면 한 씨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괜히 자식들을 꾸짖어 집안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던 정월 말, 정가촌에서 대리 족장을 맡은 둘째 할아버지가 갑자기 백부에 찾아왔다.

둘째 할아버지는 혼자가 아닌 승 숙부와 마을에서 덕망이 높은 어르신들을 데리고 왔다. 모두 종족(宗族)에 대한 일을 논의할 때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정구백네 일가도 포함되어있었다.

염송당의 응접실 안.

여종들이 줄지어서 차와 간식을 내어오자 맹 노부인이 물었다.

“둘째 당형(*堂兄: 사촌을 일컫는 말)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연세도 있으신데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제가 찾아가도 되었을 텐데요.”

맹 노부인은 겉으론 겸손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왜 갑자기 백부로 찾아온 거지? 설마 마을의 사당을 보수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돈이 다 떨어졌나?’

도리대로라면 회인백부는 정가 일족 중 가장 유망한 집안으로 사당을 보수해야 한다거나 돈이 떨어졌다는 부탁을 하더라도 도의상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백부엔 그동안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고 앞길도 캄캄했기에 정월도 지나기 전에 돈을 받으러 오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맹 노부인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복, 차가 다 식었구나. 시중을 어찌 들고 있는 것이냐? 어서 새로 차를 내어오지 않고!”

“예.”

아복은 급히 차를 다시 내어왔고 맹 노부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최근 집안 주인들의 기분이 좋았던 때가 있었나? 됐어, 그냥 최대한 조심스럽게 일하자.’

둘째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차는 그리 급하지 않네. 근데 아우와 다른 이들은 어찌 보이지 않는가?”

맹 노부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둘째 당형께서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나리께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가십니다. 첫째와 둘째는 일하러 갔고, 셋째는 아직 의관에 있지요.”

“그럼 사람을 보내 여기로 불러오거라. 중대한 일이 있으니.”

“중대한 일이라면 제게 먼저 말씀해주실 수 없습니까?”

둘째 할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두 번이나 말할 필요가 없어서다. 모두 모이면 한 번에 말해주마. 그래, 다른 며느리들도 불러오너라.”

맹 노부인은 더욱 불안해져 티 나지 않게 모두를 한 번 훑어봤다. 어르신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이었고 정구백네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맹 노부인은 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저들이 무슨 사고를 쳐서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 찾아올 이유가 없는데.’

맹 노부인은 마음을 가다듬고 하인들에게 주인들을 불러오라 명했다.

회인백 부인 유 씨가 가장 먼저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씨와 풍 씨가 이어서 들어왔다. 부인들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린 후 아랫자리에 앉았다.

반 시진 뒤, 바깥에서 일하던 사내들도 돌아왔지만 노백야는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였다.

맹 노부인이 말했다.

“둘째 당형, 사실 저희 나리는 집안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되셨습니다. 주로 첫째가 집안을 관리하지요. 사람도 다 모였으니,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지요. 나리가 돌아오시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둘째 할아버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고 정구백에게 말했다.

“아홉째야, 네가 직접 말하거라.”

정구백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카매졌다. 정월의 날씨에도 이마엔 식은땀이 계속 맺혔다. 한참 동안 입술을 떨던 정구백은 결국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곽 씨를 쳐다봤다.

곽 씨에게선 평소의 억척스러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샛노래진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노부인, 저희가 예전에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백부에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맹 노부인의 눈빛이 굳었다. 그러고는 땀을 닦고 있는 정구백을 한 번 흘겨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말해 보거라, 빙빙 돌리지 말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무얼 용서하란 게냐?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어르신들이 너 때문에 시간을 끌어야 하지 않느냐?”

곽 씨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재빨리 고개를 들었고 방 안에 가득한 사람들 중 한 씨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열셋째……, 철이는 사실 제가 낳은 아이가 아닙니다. 예전에 저희 부부가 밭에 나갔다가 강가에서 주워온 아이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한 씨는 놀란 나머지 손가의 찻잔을 엎어버렸다. 찻물이 온몸에 쏟아져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둘째 나리는 벌떡 일어나다가 의자를 넘어트려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 큰 소리에 모두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맹 노부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송곳으로 머릿속에 구멍을 뚫는 것만 같았다.

둘째 나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의자를 짚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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