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권유
점심이 되자, 맹 노부인과 부인들이 돌아왔다.
집안 분위기는 놀랍도록 무거워졌다.
정미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연원으로 가 시종을 내보낸 뒤 한 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큰언니를 보셨어요?”
“봤다. 목을 매달았더구나.”
한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방에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내가 통곡하며 정신 나간 척 달려들어 네 언니를 덮고 있는 흰 천을 당겨 내렸다. 그리고 목에 졸린 자국을 봤고…….”
한 씨는 말을 잇지 못하며 정미의 손을 잡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목에 졸린 자국이 있다고 큰언니가 자살한 거라 할 순 없어요.”
한 씨는 눈을 꾹 감았다.
“바보 같은 것. 내가 네 큰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아이가 태자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황가에서 부검을 허락할 리 없지 않니! 이제 그만 생각하고 그냥 자살로 여기렴. 그래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겠니…….”
그러나 정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마음이 편한 건 원치 않아. 진상을 원할 뿐! 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프든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나아!’
그때 설란이 입구에서 외쳤다.
“부인, 둘째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한 씨가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들라 해라.”
정철은 방에 들어와 정미를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미미, 오라버니가 어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넌 우선 칸막이 방에 가서 쉬고 있어.”
“응.”
정미는 얌전히 대답한 뒤 칸막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귀를 병풍에 붙이고 몰래 엿들었다.
“철아.”
한 씨는 목이 다 잠겨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보자 다시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정철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와 조모님께서 입궁한 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한 씨의 안색이 굳었다.
“철아, 갑자기 왜 무릎을 꿇는 게냐? 어서 일어나렴.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거니?”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미미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 씨는 조금 부끄러웠다.
“미는 늘 나와 얘기를 많이 나누지 않으니까. 철아,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말해 보거라. 네가 무릎을 꿇으니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구나.”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뒤, 정미를 때려죽이려 하셨습니다. 만약 셋째 숙부님께서 막아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왔을 때쯤 미미는 이미―”
“뭐라?”
한 씨의 입술이 떨렸다. 눈빛은 충격에서 점점 분노로 바뀌었다.
“네 아버지가 그리 악랄한 짓을 했단 말이냐?”
한 씨도 궁에서 돌아온 뒤 둘째 나리와 잠깐 만났었지만, 둘째 나리는 그저 차녀를 잘 가르치고 정신 좀 차리게 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때 한 씨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파 한 귀로 듣고 흘렸고 이런 일이 일어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어찌 그럴 수 있어!”
한 씨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팔걸이에 기대 넋을 잃었다.
소녀 시절 제멋대로였던 한 씨는 부모님의 속을 많이 썩였다. 그녀가 했던 가장 심한 짓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수문(程修文)에게 시집가 수도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님은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저 그녀의 손가락 하나 정도만 건드렸을 뿐 친딸을 때려죽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정철의 거침없는 말은 한 씨의 한계치를 깨트렸다.
정철이 옆에 앉아 물었다.
“어머니, 이혼을 염두해두신 적 있으십니까?”
“이혼?”
한 씨는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며 정신을 차렸다.
‘미도 저번에 이혼 얘길 꺼낸 적 있었지. 그땐 허튼소릴 한다고 꾸짖었고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어. 하지만 최근 일 년간 있었던 일은 내 마음을 점점 식게 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후회하고 있나? 솔직히 후회되긴 하지만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니 어쨌든 견뎌내야 해. 처가로 돌아가 하소연할 순 없지 않은가? 나 한명주가 아무리 힘들게 지내든 그렇게 염치없을 순 없지!’
“어머니, 생각해보신 적 없다면 지금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지금 답을 듣고 싶습니다.”
한 씨가 정철을 쳐다봤다.
“철아, 이게 네 뜻이니?”
정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께서 이혼하시든 아니든 아들은 이미 결심했습니다. 정미를 데리고 그 아이를 다치게 하는 이곳을 떠날 겁니다.”
한 씨는 아들이 두말하지 않는 성정임을 알고 있었기에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혼하지 않는다면, 네가 정미를 데리고 어딜 갈 수 있단 말이니?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고 조부 조모님도 살아 계시는데. 분가하여 떨어져 지내겠다는 말이야? 그건 안 될 게다.”
정철이 옅게 웃었다.
“정미를 데리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 다신 수도에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정미는 귀를 붙이고 엿듣다가 병풍을 밀어 넘어뜨릴 뻔했다.
‘오라버니, 분명 정당하고 떳떳하게 나를 데리고 갈 거라 했잖아? 머나먼 곳으로 떠나다니? 그 말은…… 사랑의 도피와 다름없는 거 아냐? 수도로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정미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이 가슴 뛰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렇게 이기적일 순 없어. 그렇게 떠나버리면 외조모님과 화서의 병은 어떡하려고? 불쌍한 내 조카는?’
정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한 씨도 깜짝 놀라 한참 정철을 빤히 쳐다보다가 정철의 확고한 표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기 시작했다.
“어찌 그런 소릴 함부로 하니? 어렵게 장원에 급제해 한림원의 관직에 올랐거늘 모두 포기할 셈이야?”
“공명과 관록은 모든 사내가 원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저는 아들로서의 책임도 있으니. 하지만 이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든 아들에겐 정미의 안위와 즐거움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한 씨는 깜짝 놀랐다.
한 씨도 정철이 차녀에게 극진히 대해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충정후부의 방 아가씨는 어쩔 셈이냐? 곧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아내도 버릴 셈인 것이야?”
정철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 살면서 모든 것을 다 빈틈없이 고려할 순 없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들은 이 선택밖에 할 순 없습니다. 여생 동안 방 아가씨께 진 빚은 절대 갚을 수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갚으려 노력할 겁니다. 방 아가씨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반드시 전심전력으로 도울 것입니다.”
한 씨는 정철의 말을 듣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회인백부의 환경과 신분을 떠나면 네가 어찌 네 여동생을 책임지겠단 말이야?”
정철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생각해둔 방법이 있습니다.”
‘내 육출화재는 이미 수도 밖까지 커졌고 정 안되면 또 책을 쓰면 되니까.’
한 씨가 생각에 잠긴 듯하자, 정철이 이어서 말했다.
“어머니, 저는 어느 날 백부로 돌아왔을 때 정미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는 날이 올까 두렵습니다. 어머니는요?”
“나는―”
한 씨는 태사의(*太師椅: 등받이와 팔걸이가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다리를 접을 수 있는 나무 의자)에 기대 지난날을 떠올렸다.
‘살구꽃이 막 폈을 무렵, 젊고 차가운 학자를 우연히 만났고 화가 나 채찍을 들었었지. 하지만 마음속은 꽃이 만개한 것만 같았어.’
그러다 혼인을 강행했지만, 이후 쓸쓸함과 외로움이 끊이지 않았다. 부군을 잃었을 때의 고통과 다시 되찾았을 때의 기쁨이 지나간 후 한 씨는 수없이 아픔을 겪었고, 그 맹목적인 사랑은 마침내 다 타버린 재가 되어 지금은 텅 빈 쓸쓸함만 남아있었다.
한 씨는 눈을 꾹 감았다. 눈가에는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네 말이 맞다. 난 이미 딸 하나를 잃었지. 다신 잃고 싶지 않아. 정아가 떠났으니, 이제 그 아이가 난처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 이 집안엔 이제 미련 가질 것도 없어.”
정철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고 진심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만약 어머니께서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며칠 후에…….”
이후 정철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정미는 하나도 들리지 않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시 후, 한 씨가 말했다.
“미야, 나오렴.”
정미는 다급히 나가 사방을 둘러봤다.
“오라버니는요?”
한 씨는 결정을 내린 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아까의 무너질듯한 모습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방금 갔다.”
정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 엿들은 거니?”
“아주 일부분만 들렸어요…….”
한 씨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됐다. 네 오라버니를 찾아가고 싶으면 얼른 가보렴.”
“네.”
정미가 치맛자락을 들고 쫓아나가자 정철은 발소리를 듣고 뒤돌아섰다.
“오라버니.”
정미가 가까이 다가와 숨을 약간 헐떡이며 말했다.
“가는 길이 같으니 함께 가자.”
‘정일헌과 비서거가 어떻게 같은 길이란 말이야?’
정철은 속으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정미와 함께 비서거로 향했다.
길을 걷던 중 정미는 참고 참다가 결국 물었다.
“오라버니, 만약 어머니가 이혼하지 않으면 정말 나를 데리고 떠날 거야? 혼약도 포기하고?”
정철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옅게 웃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께서 어찌 결심을 내릴 수 있었겠어?”
‘거짓말이라고?’
정미는 조금 실망했지만 거짓말인 게 정상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거짓말이라 해도 빈말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정미는 조용히 정철을 노려보고는 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면 집안에서도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가는 걸 기꺼이 환영할걸. 그럼 오라버니는 어떡해?”
‘오라버니는 앞날이 창창한 장원랑이야. 조모와 아버지처럼 제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이 오라버니를 그냥 보낼 리 없잖아? 게다가 오라버니는 정식으로 양자로 들인 아들이자 양사자(*養嗣子: 상속인인 양자를 이르던 말)야. 족보에서든 세상 사람들 눈에든 공명정대한 아버지의 적장자라고. 어느 집 부부가 이혼할 때, 어머니 쪽이 적장자를 데리고 갈 수 있단 말이야?’
정미는 진가의 진서택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고모가 이혼할 때, 진가는 그저 수도 근교의 보통 부호 가문이었고 태자비와 소첨사가 있는 회인백부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런데도 그 사나운 성정의 고모조차 진서택 오라버니를 진가에 둔 채, 진령운만 백부로 데리고 올 수 있지 않았던가.
‘만약 내가 어머니를 따라가면, 오라버니는 여전히 이 시궁창에 남아있게 되겠지. 심지어 그렇게 되면 서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질 텐데 어떡하면 좋지?’
정미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져 눈살을 찌푸렸다.
정철이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 다 해결될 테니.”
* * *
비서거로 돌아오자 사방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자 가족을 잃은 아픔이 천천히 밀려 올라왔다.
정미는 창가에 앉아 오후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다행히 아까의 불안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환안과 다른 시종들은 정미가 걱정되긴 했지만 차마 방해하지는 못했다.
화미의 말로는 누구든 이런 일을 맞닥뜨리면 상심할 수밖에 없다고, 속에 담아두어 몸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쏟아내는 게 아가씨에게 더 좋을 거라고 했다.
저녁 무렵, 한 씨가 찾아왔다.
“미야, 왜 거기 앉아있니.”
한 씨가 걸어와 창문을 닫고 정미의 손을 잡아보았는데 역시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미는 정신이 들어 조금 시린 눈을 끔뻑거렸다.
“어머니, 오셨어요.”
모녀는 서로를 마주 봤다. 두 사람 모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였고 아리따운 얼굴도 조금 부어있었다.
모녀가 그간 얼마나 소원했든 간에 지금 느끼는 상심은 같았다.
정미는 갑자기 참지 못하고 한 씨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 아직도 큰언니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생생한데. 어젠 나를 잡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는데. 어떻게 눈 깜짝할 새 사라질 수 있지?’
한 씨는 눈을 꾹 감으며 정미의 머리를 토닥였다. 이렇게 친밀한 적이 없었던 모녀였기에 한 씨의 동작은 조금 어색하고 뻣뻣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미도 네 큰언니가 아직 살아있는 것만 같구나.”
모녀는 다시 슬픔이 밀려와 울기 시작했고, 울음소리가 그치자 화미가 건넨 따뜻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화미는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치우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