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약을 바르다
정동은 동 이낭을 따라 연교거에 돌아갈 때까지도 덜덜 떨고 있었다.
딸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동 이낭이 정동에게 물었다.
“동아, 무슨 일이니?”
“어머니, 무서워요―”
정동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동 이낭은 정동을 품에 안으며 위로했다.
“걱정 말거라. 네가 정미도 아니고 내 자식들은 늘 얌전했으니, 아버지께서 네게 그럴 일 없을 게다.”
정동은 동 이낭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셋째 언니를 때려죽이려는 거죠? 셋째 언니가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을 망쳐서, 그래서 언니가 아버지의 친딸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어서 입 다물거라!”
동 이낭이 정동의 입을 막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까 염송당에서도 말하려고 했는데, 네 아버지가 네 셋째 언니를 걷어차는데 왜 네가 나서는 게야? 사내가 화났을 땐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네가 그 발을 맞았으면 큰일이 났을 거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어미는 어쩐단 말이냐?”
동 이낭은 정동을 안고 흐느꼈다. 하지만 정동은 조금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동 이낭은 그런 정동의 모습을 보자 조금 당황스러워 딸을 밀어내고 말했다.
“허튼 생각 말거라. 정미가 저지른 잘못이 보통 잘못이니? 어느 집이든 절대 가벼운 처벌을 받지 못할 죄야! 동아, 너는 그저 사고를 치지만 않으면 된다. 알겠니?”
“네.”
정동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가슴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정철이 정미를 안고 비서거로 돌아오자 여종들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
그러다 정철의 굳은 표정을 보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따뜻한 물과 수건, 연고를 가져오너라!”
정철은 명령을 마친 뒤 정미를 안고 곧바로 동차간으로 가 소녀를 나한상(*羅漢床: 중국의 전통 가구 중 하나로, 침상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평상과 같은 쓰임새로 쓰임)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소녀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였고 왼쪽 뺨은 퉁퉁 부어올라 입가엔 피가 배어 나왔다. 옷은 흙이 가득 묻어 엉망이었다.
정철은 가슴이 아파 차마 쳐다보기도 힘들어 눈을 꾹 감으며 말했다.
“이 오라비가 너무 늦었구나.”
환안과 다른 시종들이 세숫대야와 물건들을 들고 급히 들어오자, 정철은 따뜻한 손수건을 건네받고 정미의 얼굴을 살살 닦아주었다.
얼굴이 깨끗해질수록 붉은 붓기는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여종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정미는 꿈쩍 않고 조용히 잠든 채 오라버니의 손길을 받았다.
정철은 입을 꾹 다문 채 정미의 뺨에 붓기와 멍을 빼는 연고를 발라주었고, 정미의 옷에 선명한 발자국이 보이자 이를 악물고 옷깃을 젖히려 했다.
“둘째 공자님, 소인께 맡기세요.”
화미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물러나거라!”
정철이 고함쳤다.
이어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여종들은 결국 물건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물러났다.
정철은 정미의 옷자락을 살살 젖혀냈다. 두꺼운 옷을 입었음에도 소녀의 옆구리엔 보랏빛 멍이 들어있었다.
늘 침착하던 정철은 손을 떨며 그곳을 살살 어루만졌다.
차가운 손끝이 닿자 소녀의 연약한 피부가 살짝 떨려왔다. 정미는 눈을 뜨고 굴리다가 그제야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보이자, 정미는 그제야 고통과 공포가 밀려와 정철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그의 허리를 꽉 안고 쉰 목소리로 울며 말했다.
“오라버니, 큰언니가 죽었어. 큰언니가…….”
“오라버니도 알아, 알고 있어. 울지마, 미미.”
정철은 품속의 소녀를 더 꽉 껴안았다. 혹시라도 손을 놓으면, 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연약한 소녀가 갑자기 닥친 폭풍우에 꺾일까 두려웠다.
정미는 정철의 품에 파묻혀 펑펑 울며 물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죽을 거야? 제발 무사히 살아가 줘.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적어도, 적어도 내가 오라버니보다 먼저 죽게 해줘―”
정철의 팔이 굳더니 부드럽게 물었다.
“미미, 지금 뭐에 겁먹은 거야?”
정미는 쉴 새 없이 덜덜 떨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씩 나를 떠나고, 내가 어떻게 해도 그걸 막을 수 없다는 게 두려워. 오라버니, 말해줘.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거야? 어떻게 노력해도 바꿀 수 없어?”
큰언니를 잃은 고통과 확고한 신념이 완전히 무너지자,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는 그 무게에 눌려 좌절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정철이 정미의 등을 토닥였다.
“‘사람의 노력은 하늘도 이긴다’는 말도 있잖아. 미미, 혼자서 노력하는 게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앞으로 오라버니가 함께 노력해줄게. 어때? 미미 네가 너 자신을 못 믿는다고 하더라도 오라버니는 믿고 있어.”
정철은 늘 강인하던 여동생이 무슨 까닭으로 의지를 잃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상태는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한 사람을 완전히 망가트릴 수 있는 상태였다.
정철은 남녀 간의 선도 개의치 않고 소녀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미미, 오라버니랑 같이 노력하자. 응?”
정미는 감정이 점점 차분해져 작게 대답했다.
“좋아. 오라버니만 있으면, 다 좋아.”
정철은 눈을 꼭 감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물었다.
“미미, 백부를 떠나고 싶지 않아?”
“백부를 떠난다고?”
정미는 이 한마디를 계속 곱씹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정철을 바라봤다.
“떠나고 싶어. 꿈에서라도 떠나고 싶어.”
정철이 정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주 봤다.
“그럼 며칠만 참고 기다려줘. 그럼 같이 떠날 수 있어.”
정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떠나? 사랑의 도피 같은 거야?”
‘사랑의 도피’라는 말에 정철의 귀 끝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곧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사랑의 도피는 아니지…….”
정철의 목소리는 여러 해묵은 술처럼 걸걸하면서도 맑았다. ‘사랑의 도피’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자 뺨이 어렴풋이 달아올랐고 왠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정철은 손을 들어 정미의 헝클어진 머리를 재차 빗겨주었다.
“우리 같은 집안에서 널 데리고 가출할 순 없어. 게다가 만약 그렇게 가출한다고 해도 ‘사랑의 도피’라고는 말하지 않고…….”
‘누가 남매가 함께 떠나는 걸 사랑의 도피라고 부른다는 거야. 미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정미는 그제야 방금의 말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달아올라 중얼대며 물었다.
“그럼 오라버니가 떠나자고 한 건 무슨 뜻이야?”
정철은 손을 내려놓고 쌓인 눈에 휘어버린 창밖의 파초나무를 쳐다봤다.
“떳떳하고 정당하게 떠난다는 뜻이야. 오늘 오라버니가 현청관에 다녀왔는데 북명진인은 뵙지 못했어. 현청관의 도사들이 북명진인은 관문을 닫아 볼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럼 오라버니, 다른 도사들에게 알아보진 않았어?”
“몇 명에게 물어봤는데 청령이라는 사람은 다들 모르더라고.”
정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입술에 흰 자국이 났고 곧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사부님이 나를 속일 리 없어.”
‘저번에 사부가 처음 찾아온 뒤로 몇 번 만난 적 없었지만, 사부의 경험이 가득 쓰인 책자와 내가 뭔갈 물었을 때 귀찮아하지 않고 잘 대답해준 걸로 봐서, 사부는 날 제자로서 꽤 중시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사부님이 그걸로 날 속일 이유가 없어.”
정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미미가 사부가 현청관 출신이라는 걸 확신하고 부법 수준이 높고 깊지만 아무도 그자를 모른다면 오라버니가 감히 추측하건대, 사부는 현청관에서 이미 사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관주이자, 우리 대량의 국사(國師)가 아닐까 싶어.”
“국사?”
정미는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럴 리가? 사부님은 머리가 은발이긴 했지만,얼굴은 오라버니 또래로 보였는걸. 만약 그 사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국사라면, 나이가 얼마나 많겠어?”
정철이 웃었다.
“미미, 역대 대량의 국사들은 모두 신통력이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었어. 그러니 젊은 얼굴로 늙지 않는 것도 가능할 테지. 그리고 오라버니도 도사(道史)를 본 적 있는데, 역임 현청관 관주들이 직무를 이어받을 때 원래 쓰던 도명은 버리고 다시 도호를 짓는다고 했어. 만약 네 사부가 현청관의 관주라면 아무도 그의 도호를 모르는 것도 이해가 돼.”
“그럼…….”
정미는 살짝 충격을 받아 멍해진 채로 손가락을 꼽으며 뭔갈 계산해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소진 도장의 사숙(師叔)이라는 거야?”
여동생이 기운을 조금 되찾자, 정철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추측이 맞다면 그런 셈이지. 하지만 이 일은 우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
“왜?”
정철의 목소리는 몹시 멀리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당연히 미미를 아프게 하는 여기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지. 그러니 앞으로 당분간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무서워할 필요 없어. 원래 규칙을 깨트려야만 새로운 규율이 생기기 마련이고, 비바람이 지나가야 하늘이 트이니까.”
“알겠어.”
정미가 고개를 들어 정철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점점 가라앉자 마비되어있던 고통이 다시 몰려와 눈살을 찌푸리고 숨을 들이켰다.
“오라버니, 아파―”
“어디가?”
정철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은 정미의 정신상태가 조금 이상했기에 혹시나 자칫하면 무너져버릴까 봐 상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는데, 정철은 그제야 뭘 잊고 있었는지 떠올렸다.
“여기.”
정미가 옆구리를 가리켰다.
정철은 급히 시선을 피하며 가볍게 기침했다.
“환안을 불러 약을 바르게 할게.”
아까는 상황이 너무 급했던 탓에 아무렇지 않게 소녀의 새하얀 피부와 연두색 속옷을 똑바로 보았지만, 침착해진 상태에서 어떻게 또다시 그럴 수 있겠는가?
정미가 고개를 저으며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해줘.”
둘째 나리의 발길질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부녀의 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낳아주신 은혜든 키워주신 은혜든 정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옆구리의 상처는 자신의 연약함과 난처한 처지를 나타냈기에, 정미는 오라버니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미―”
정철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완고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미를 보고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어.”
정미가 자리에 눕자, 정철이 깜짝 놀라 난처한 표정으로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누울 필요 없어. 눕지 마.”
정미의 의아한 눈빛에 정철은 가까스로 차분한 표정을 지어냈다.
“앉은 채로도 바를 수 있으니까.”
“아.”
정미는 똑바로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정철을 쳐다보며 약을 발라주길 기다렸다.
정철은 애써 손을 옷자락까지 뻗었다가 멈칫하며 말했다.
“미미, 다친 곳을 보여줘 봐.”
정미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옷을 걷어 올렸다.
그녀는 겉옷으론 살구색 짧은 솜옷을 입고 있었고 안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채였다. 두 겹의 옷을 들추자, 새하얀 옆구리와 커다란 보랏빛 멍이 드러났다. 그리고 연두색의 가는 띠가 둘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정철은 차마 자세히 보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약을 바른 뒤 급히 정미의 옷을 내려놓고 가볍게 기침했다.
“미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편히 누워있어. 오라버니도 옷을 갈아입으러 가야겠다.”
정미는 아쉬운 듯 정철을 한 번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