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두려움
눈 온 뒤의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길 위의 눈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지만 급하게 달리면 여전히 쉽게 미끄러질 만한 상태였다. 정미는 바닥에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다시 기어 일어났다. 외투를 걸치지 않아 무릎이 화끈거렸고 이어서 살을 에는 추위가 느껴졌다.
하지만 정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염송당으로 달려갔다.
비서거는 염송당과 꽤 떨어져 있었기에 정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응접실을 가득 메운 채였다.
한 씨는 이미 눈이 복숭아처럼 부어있었는데, 정미가 들어오자 우물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맹 노부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눈빛에는 한이 가득했다.
“조모님, 큰언니가―”
정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맹 노부인이 훌쩍 다가와 정미의 뺨을 매섭게 내리쳤다.
“이 짐승 같은 것, 네가 태자비를 해친 게다. 오늘 내가 가법으로 처벌하여 네 목숨으로 태자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한 씨가 달려와 정미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는 무고합니다―”
“무고하다고? 어디가 무고하다는 게냐? 이것이 태자비에게 부수를 먹이지 않았다면 태자비가 어찌 바보를 낳았겠으며, 바보를 낳지 않았다면 어찌 수치스러움에 자살했겠느냐!”
맹 노부인은 목소리가 엇나갈 정도로 크게 고함쳤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도 같이 처벌하겠다!”
유 씨와 풍 씨가 급히 다가와 막았다.
“어머님, 말로 하세요―”
정미는 주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자살할 리 없어, 큰언니는 절대 자살할 리 없다고…….”
맹 노부인이 지팡이를 들어 정미를 때렸다. 한 씨가 감싸고 있음에도 정미는 몇 대나 얻어맞았다. 살갗이 여려 분명 화끈거릴 텐데도 정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유 씨는 손을 뻗어 막다가 팔을 한 대 얻어맞았지만, 그럼에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맹 노부인의 손목을 붙잡고 외쳤다.
“어머님, 황궁에서 저희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정미를 처벌하시더라도 돌아와서 다시 얘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궁 안에서 까닭 없이 죽는 여인은 아주 많았다. 보통은 죽어도 아무 소식 없이 궁에서 내보내기에, 가족들이 궁으로 가 얼굴을 보는 건 바랄 수도 없었다. 부고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태자비는 달랐다.
생전에 어떠했든 간에, 태자비가 죽으면 황릉에 묻어져야 마땅했다. 그리고 태자의 처가 여주인들, 맹 노부인, 유 씨와 한 씨는 궁으로 가 태자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맹 노부인은 유 씨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해 유 씨를 밀쳐낸 뒤 지팡이를 들고 몇 차례 더 휘둘렀다.
“그만!”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노백야(*老伯爺: 백부의 전前 주인을 가리키는 말)가 걸어들어왔다.
그는 손에 새장을 받쳐 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놀러 나갔다가 백부의 하인이 급히 찾아 데려온 모습이었다.
진지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던 노백야가 엄숙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맹 노부인의 손에서 지팡이를 빼앗았다.
“손녀 하나를 보내놓고 또 하나를 때려 보낼 셈인가? 너희는 멍하니 뭘 보고 있는 게냐. 어서 궁으로 갈 채비를 해야지!”
노백야가 보기 드물게 위세를 부리자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맹 노부인은 숨을 가다듬고 노백야를 빤히 쳐다보다가 발을 굴리며 말했다.
“너희는 나를 따라 궁으로 가자. 내 불쌍한 손녀의 마지막 얼굴은 봐야지!”
유 씨는 맹 노부인을 부축해 안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고, 한 씨는 정미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멍하니 넋을 놓은 채였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했다.
셋째 부인 풍 씨가 다가와 차마 보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가셔야지요. 늦으면 정아를 못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한 씨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급히 밖으로 나갔다.
정미도 정신을 차리고 치맛자락을 들고 쫓아가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한 씨는 장녀가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고개를 휙 돌렸다가 처량한 모습의 차녀가 보이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미를 품에 안았다.
“미야, 네 큰언니가 죽었단다! 멀쩡하던 아이가 어찌 죽었다는 것이냐? 네 큰언니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다섯 살 때부터 붙잡혀 규율을 배우고, 머리에는 그릇을 올려놓았단다. 조금만 흔들려도 그릇이 떨어져 머리에 물이 쏟아졌지.
네 조모는 그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을까 그릇 안의 물을 얼음물로 바꾸기까지 했어. 네 큰언니는 너무 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지. 네 조모의 심기를 건드리면 나를 괴롭힐까 봐…….”
한 씨가 정아의 어린 시절을 눈물로 호소하자 듣는 사람들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정미는 멍하니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한 씨의 손을 꽉 붙잡았다.
“어머니, 큰언니를 보러 가셔야 하잖아요. 이따 기회가 되면 큰언니를 자세히 살펴 봐주세요. 저는 언니가 자살했을 거라 믿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한 씨가 멍하니 물었다.
정미는 한 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 말은, 큰언니가 자살할 리 없다는 뜻이에요. 큰언니가 어찌 황손의 정신이 맑지 않다는 이유로 자살하겠어요? 제가 고칠 수 있다고 진작 말해두었는걸요!”
‘아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어머니가 6개월도 되지 않은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고? 게다가 황궁처럼 무서운 곳에서 어머니가 지켜주지 않는 아이가 적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앞으로의 길이 평탄할 리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정말이니?”
한 씨는 정미의 손을 맞잡았다. 지나치게 힘을 주어 정미의 손목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미는 여전히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씨는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듯 손을 놓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알겠다. 미야, 너도 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 * *
수습이 끝나고, 맹 노부인과 부인들은 소복으로 갈아입은 뒤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내시와 함께 급히 황궁으로 갔다. 그러자 응접실은 순식간에 휑해졌다.
노백야는 잎담배를 꺼내 한 모금 피우며 말했다.
“다들 여기 넋 놓고 있을 필요 없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살아있는 사람은 그래도 잘 살아가야지!”
말을 마친 노백야는 담배를 아무 의자 등받이에 툭툭 털고 나가버렸다.
응접실의 어른은 풍 씨만 남게 되었다. 풍 씨는 우선 세자인 정명에게 말했다.
“아내가 홑몸이 아니니 어서 방으로 돌려보내거라. 여기는 어수선해서 아이가 놀랄 수 있어.”
정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정미 옆으로 걸어가 어깨를 토닥였다.
“정미, 아무리 힘들어도 다 지나갈 일이야. 넌 아직 어리잖아. 너무 스스로 힘들게 하지 마.”
정미가 아무 반응도 없자, 정명은 긴 한숨을 쉬고는 아내 장 씨와 함께 방을 나갔다.
그렇게 방 안에는 정미와 정동, 정희, 그리고 투명인간 같은 동 이낭이 남았다.
풍 씨가 정미에게 권했다.
“미야, 너도 방으로 돌아가거라.”
정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풍 씨가 정동을 한 번 쳐다보자 정동이 급히 말했다.
“저와 셋째 동생도 여기서 기다릴게요!”
“너희―”
풍 씨는 고개를 저은 뒤 더는 말하지 않고 여종에게 화로와 아이들이 먹을 간식, 차를 내어오라 했다.
뒤이어 발소리가 들려오자, 풍 씨가 급히 맞이했다.
“나리, 돌아오셨군요.”
방에 들어온 사람은 셋째 나리였다. 그는 피풍을 벗고 위의 눈을 털어낸 뒤 여종에게 건네며 물었다.
“어머니는? 이미 입궁하신 거요?”
정월 초사흗날엔 술집과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지만, 아픈 사람이 찾는 곳은 문을 닫을 수 없었다. 셋째 나리는 소식을 듣고 제생당에서 달려온 것이었다.
풍 씨가 조용히 말했다.
“이미 입궁하셨습니다. 하지만 둘째 나리와 철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셋째 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미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 영리하고 침착했던 조카딸이 생기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파 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미야, 괴로워 말거라. 나도 알고 있단다. 네 부술이 절대 문제를 일으켰을 리 없어. 황손의 병은 그저 운명의 장난일 뿐, 태자비의 죽음은 너와 조금의 관련도 없다. 숙부님의 말을 듣고 허튼 생각 말거라.”
“셋째 숙부님―”
정미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눈물을 흘렸다.
‘지금 그 누가 내 두려움을 이해하겠어. 난 큰언니의 죽음에 마음 아픈 것보다 이미 알고 있는 운명이 더 두려워. 큰언니는 결국 죽었고, 바보가 된 황손만 남게 되었구나. 악몽 속의 장면처럼. 설마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건가?’
“울지 말거라. 오늘 의관에서 너를 찾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환자들이 작은 신의가 얼른 돌아오길 기대하고 있단다.”
셋째 나리가 정미를 가엾게 여기며 토닥였다.
“너, ‘작은 신의’ 같은 말은 앞으로 다신 꺼내지 말거라!”
그때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둘째 나리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둘째 형님―”
셋째 나리와 풍 씨가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정동은 아버지가 걸어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날 서재 밖에서 본 아버지의 눈빛도 저런 눈빛이었어!’
둘째 나리는 정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아무 말 없이 정미를 거칠게 걷어차 버렸다.
정동이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달려가 막으려고 하자, 동 이낭이 그녀를 꽉 붙잡았다.
셋째 나리는 둘째 나리가 오자마자 폭력을 행사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둘째 나리의 발이 이미 조카의 코앞에 있었다.
셋째 나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둘째 나리를 확 밀어냈지만, 정미는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기에 결국 둘째 나리의 발은 정미의 갈비뼈를 걷어찼다.
정미는 바닥에 쓰러졌다.
“형님, 미는 여자아이입니다. 어찌 폭력을 휘두르신단 말입니까!”
둘째 나리가 셋째 나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너는 비켜있거라. 내가 내 딸을 가르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셋째 나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님이 딸을 가르치는 건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긴 하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교육한다면 어쨌든 참견해야겠습니다! 여자아이의 귀한 몸을 어찌 폭력으로 교육하신다는 겁니까!”
둘째 나리는 늘 조용하고 말수가 적던 서제(庶弟)가 감히 말대꾸하자 차갑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너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지금 날 막는다고 평생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짐승만도 못한 것은―”
그는 손가락으로 정미를 가리키더니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매몰차게 말했다.
“정말 불길하고 재수 없는 계집이야. 이 계집이 여기 있으면 우리 정가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황손을 해치고 태자비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 계속 가만뒀다간 이 애비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형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둘째 나리가 차갑게 웃었다.
“의관에서 진료를 본다고 내게 가르치려 드는 게냐? 비켜라, 내 오늘 이 못된 계집을 없애버려야겠다. 내가 정가의 해악을 제거해야겠어!”
이때,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철은 어느새 입구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그는 서리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둘째 나리를 쳐다봤다.
정철의 분위기가 너무 거센 탓인지 둘째 나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철은 정미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아 올렸다.
정미는 큰 키임에도 야윈 몸 때문에 아주 가벼웠다. 정철은 그녀를 꽉 안고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방에서 떠났다.
동 이낭은 그제야 다가가 손수건으로 둘째 나리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나리, 화 좀 삭이세요. 우선 차라도 한 모금 드세요―”
그러나 둘째 나리는 동 이낭을 확 밀치고 방을 나가버렸다.
결국 염송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그제야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