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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41화 (241/375)

241화. 심혈 한 방울

남매는 회인백부로 돌아온 뒤에야, 한 씨가 이미 위국공부에 새해 인사를 올리러 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았다.

정철은 어머니의 무신경함에 어이가 없었지만 곧 폭풍우가 닥칠 것을 알고 아예 계속 정미와 함께 있었다.

점심이 되었을 때, 새해 인사를 올리러 가지 않은 주인들은 모두 염송당에 모여 식사를 했다.

그때 둘째 나리가 노발대발하며 들어와 외쳤다.

“정미는?”

정미는 이미 많이 침착해진 상태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둘째 나리가 빠르게 다가와 손을 높이 들어 내리치려 했을 때, 정철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버지, 신년을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실 말씀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맹 노부인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철이 말이 맞다. 둘째야,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둘째 나리는 화가 나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로 외쳤다.

“어머니, 이 못된 계집이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까?”

“무엇을 말이냐?”

맹 노부인이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면 한 번에 말씀드릴 생각이었어요.”

정미는 정아가 소진 도사의 부수를 마신 일은 숨기고 오전에 궁에서 일어난 일만을 설명했다.

맹 노부인은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져 정미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망할 것, 백부의 명성을 날려버릴 셈이냐. 이 세상에 어떤 집 여식이 황상께 집에서 반성하란 명령을 받는단 말이냐? 뭘 잘했다고 밥이나 먹고 말이야.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다신 밖으로 나와 백부의 낯을 더럽히지 말고!”

“어머니, 방으로 돌아가게 하면 어떡합니까? 오늘 이 못된 것을 잘 가르쳐놓지 않으면 수도 모든 사람들이 제가 딸을 엄하게 교육하지 않는다고 말할 겁니다. 그럼 앞으로 이 아들이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떡하겠단 말이냐?”

둘째 나리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 차갑게 말했다.

“가묘로 보내 수양하게 하지요. 앞으로 다신 밖으로 나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맹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철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아들도 셋째 여동생과 함께 마을로 돌아가 집안의 사당을 지키겠습니다.”

“철아, 그게 무슨 뜻이냐?”

둘째 나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철이 도포를 펄럭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들의 불효입니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신 그 의미가 맞습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게냐?”

“협박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동생이 가묘에서 수양하고 있는데 오라버니로서 어찌 마음 편히 관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아들의 마음은 이미 확고합니다.”

그때, 입구의 여종이 갑자기 외쳤다.

“둘째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한 씨는 다급히 들어오다가 안의 상황을 보고 멈칫하더니 정미 앞으로 달려들어 물었다.

“미야, 밖에서 들리는 소문이 정말이냐? 황손이, 황손이 정말―”

정미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자, 한 씨는 비틀거리다가 다시금 정미의 손을 꽉 잡고 물었다.

“그럼 네 큰언니는, 네 큰언니는 어떻게 되었느냐? 황가에서 죄를 묻지 않았어?”

정미가 천천히 손을 빼며 대답했다.

“죄를 면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큰언니는…… 무고하니까요. 황가에서도 이 일로 언니를 폐위할 순 없을 거예요.”

한 씨는 잠시 멍해졌다가 정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큰언니의 운명이지, 네 탓이 아니―”

“이 못된 것이 태자비에게 함부로 부수를 먹이지만 않았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었겠소?”

둘째 나리가 고함치자 한 씨가 눈을 부라렸다.

“미의 부술은 저도 압니다. 절대 미의 탓이 아닙니다!”

“당신은 시비도 분간하지 못하는군!”

맹 노부인은 머리가 아파 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됐어. 황상께서 반성하라 했으니 방으로 돌아가게 하거라. 앞으로 외출하지 말고. 너희 싸우는 소리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구나.”

* * *

회인백부가 난장판이 된 사이, 황궁도 분위기가 무거웠다.

화 귀비가 소진 도사에게 물었다.

“황손의 병은 정말 아무 방법이 없는 겁니까?”

“빈도가 아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황손의 병은 상령(*爽靈: 인간의 3개의 혼 중 하나)에 손실이 있어 그런 것인데, 지친(*至親: 가까운 가족)의 심혈 한 방울으로 상령을 채울 수 있습니다. 지친은 남성이어야 하고요.”

“태자 말이냐?”

화 귀비가 옆의 태자를 쳐다보자, 태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시도해보십시오. 심혈은 어찌 뽑을 수 있습니까?”

“왼손 중지 끝의 피 한 방울이면 됩니다.”

“편히 뽑으셔도 좋습니다.”

소진 도장은 태자의 심혈 한 방울을 뽑은 뒤 부적을 그려 부수를 만들고 곧바로 용훤에게 먹인 뒤 한참 동안 용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패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방법으로 상령을 채우는 건 원래 아주 어렵습니다. 허나―”

“말씀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황상께선 진룡(眞龍)의 몸을 가지고 계시니, 심혈에도 선천적인 용의 기운이 있을 겁니다. 만약 황상의 심혈로 황손의 병을 치료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절대 안 됩니다!”

화 귀비가 벌떡 일어났다.

화 귀비의 반응이 너무 격한 탓인지 태자는 어리둥절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이 와중에도 소진 도사는 차분히 바라보기만 했다.

화 귀비가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기침했다.

“황상께선 황제라는 존귀한 지위를 갖고 계신데, 어찌 심혈을 소모할 수 있겠습니까. 도장, 앞으로 그 이야긴 다신 꺼내지 마세요.”

“모비―”

태자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화 귀비는 담담하게 태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두고 소진 도사에게 물었다.

“이 외에 다른 방법도 있습니까?”

소진 도사가 고개를 저었다.

“빈도에게 그 외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는 겁니까?”

화 귀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진 도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빈도의 스승님께 방법이 있을지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최근 관문을 닫으셔서 언제 나오실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본궁은 진인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궁녀들이 소진 도사를 배웅하고 나서야, 태자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모비, 어째서 소진 도장이 말한 방법을 시도해보지 않는 겁니까. 부황께서 심혈 한 방울 정도는 아끼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유야는 부황의 손자인데―”

화 귀비가 태자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침(琛)아, 말하지 않았느냐. 그 일은 그만 얘기하라고!”

“모비!”

지켜보는 사람이 없자 태자의 감정이 격하게 드러났다.

“그저 손끝의 피 한 방울을 빼는 것뿐 아닙니까. 부황께서도 죄를 묻지 않으실 겁니다. 유야를 치료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 모비께선 유야가 바보로 커가고, 아들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화 귀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북명진인께서 관문에서 나오길 기다리는 게다. 그는 소진 도장의 사부이니 도법도 소진보다 훨씬 뛰어나겠지.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소진 도장의 방법은 안 된다. 태자, 그만 염두하거라.”

“도대체 어째서입니까?”

태자는 화 귀비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들이 사촌 여동생과 서로 마음이 통하여 그 아이를 입궁시키고자 했을 때도 어머니께선 그저 안 된다고 하셨지요. 지금 아들이 유야를 치료하고자 부황의 심혈 한 방울을 부탁드릴 때도 그저 안 된다고만 하시는군요. 늘 아무 이유 없이 아들의 희망을 짓밟으십니다. 모비,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태자는 무표정한 화 귀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실망감이 밀려 올라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사촌 여동생은 이미 내 아이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모비는 그녀가 입궁할 길을 막아버리셨고, 궁지에 몰린 그녀가 아이와 함께 자살하고 말았지. 그리고 지금은 내 적장자의 바보 같은 모습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하는구나. 내가 태자인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태자는 마음이 싸늘해져 화 귀비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에서 나가다가 마침 입구로 들어오고 있던 궁녀를 걷어찼다.

“꺼지거라!”

궁녀는 그렇게 백옥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흘렀지만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화 귀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지만 손에 쥔 손수건을 너무 세게 당겨 망가질 지경이었다. 한참 뒤, 화 귀비가 등안에게 분부했다.

“저녁 식사 때 태자를 모시고 오거라.”

* * *

밤이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펑펑 쏟아졌다. 다음 날 바깥을 보니, 온통 눈으로 뒤덮여 수도는 얼어붙은 마을처럼 보였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자, 정철은 조용히 백부에서 나와 현청관으로 향했다.

정월 초사흗날엔 집집마다 친척이나 친우의 집에 방문하느라 바빴고 손님을 맞이하는 폭죽 소리가 수시로 울려 퍼졌다. 폭죽 소리가 끝난 뒤엔 바닥에 붉은 종이가 가득해 마치 눈 속의 홍매처럼 보였다.

하지만 회인백부는 어제 일어난 일로 여전히 분위기가 무거워 신년의 경사스러운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미의 비서거는 더욱 조용했다.

“아가씨, 탕원(*湯圓: 찹쌀가루 반죽에 소를 넣어 새알 모양으로 빚은 중국요리) 좀 드세요. 어젯밤도 제대로 못 드셨잖아요.”

화미가 벽색 사기그릇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릇 안엔 반투명한 백색의 탕원이 먹음직스럽게 들어있었다.

“우선 두고 가.”

화미는 탕원을 탁자에 두고 환안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환안이 다가가 정미에게 권했다.

“아가씨, 탕원은 오래 두면 맛이 없어져요. 낭비하면 아깝잖아요. 아가씨께선 모르시지요. 최근 정주에 대설이 쏟아져 민가를 쓰러뜨리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며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화미가 이마를 짚었다.

‘이 바보 같은 계집. 권유할 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아가씨가 고작 탕원 한 그릇도 낭비하면 안 될 형편인 줄 알아?’

그러나 정미의 속눈썹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탕원을 받쳐 들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지. 어쨌든 음식은 낭비하면 안 되지.”

정미는 고개를 숙여 통통한 탕원을 반쯤 베어먹었다. 탕원 안에서 걸쭉한 팥앙금이 흘러나오자 아주 달고 맛있었다.

따뜻하고 달달한 탕원이 뱃속에 들어가니, 정미는 답답한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정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때,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아무런 보고도 없이 두꺼운 면으로 만든 문발이 걷히며 찬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염송당의 여종 아복이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셋째 아가씨, 어, 어서 염송당으로 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정미는 그릇을 내려놓는 것조차 잊고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아복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다급한 목소리엔 약간의 흐느낌이 묻어났다.

“셋째 아가씨, 어서 소인을 따라오세요. 정말 큰일이 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아무리 급해도 아무것도 모른 채 갈 순 없잖아.”

정미는 그릇을 아무렇게나 높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복이 정미의 한쪽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셋째 아가씨, 궁에서 소식을 보내왔는데 태, 태자비 마께서 돌아가셨답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높은 탁자 위의 사기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고 그릇에 남아있던 탕원이 바닥에 가득 쏟아졌다.

정미의 얼굴엔 조금의 핏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복의 손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다시 말해봐!”

“태자비, 태자비마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미는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가씨, 아직 외투도 걸치지 않으셨어요―”

화미는 여우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들고 급히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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