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황손
“유(*瑜: 용훤의 아명)야, 이분은 외조모이시고 이분은 작은이모님이시란다.”
정아는 5개월 된 용훤(容煊)을 안고 한 씨와 정미에게 아이를 보여주었다.
용훤은 진홍색 자수 상의를 입고 목에는 금테를 걸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벌써 또렷해진 상태였고 어머니 쪽을 조금 더 닮아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매끄러운 것이 마치 옥으로 만든 인형 같았다.
한 씨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아기를 안고 얼굴에 연신 뽀뽀를 해댔다.
“작은 황손께서 참 잘생기셨습니다.”
정아는 정미와 한 번 마주 보고는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정미는 정아의 뜻을 알아채고 손을 뻗어 큰언니의 손을 쥐며 말없이 위로했다.
아들이 울지 않자, 정아가 말했다.
“어머니, 유야가 어머니와 잘 맞나 봅니다. 그럼 조금 안고 계세요. 저는 정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정월이 지나면 정미도 급계를 할 테고, 급계를 하면 다 큰 처녀가 되니 혼사를 논해야 할 터였다. 한 씨는 장녀가 여동생의 혼사를 신경 써주는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가보세요, 가보세요. 제가 유야를 보겠습니다.”
정아는 정미를 칸막이 방으로 데리고 간 뒤, 입가의 웃음기를 거두고 불안해하며 물었다.
“정미, 유야가 어때 보이니?”
정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도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유야가 정상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종종 유야의 눈빛이 둔한 것 같다는 느낌이―”
그 말을 듣자 정아는 도무지 말을 이어갈 수 없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렀다.
정미는 문에 들어설 때부터 조카를 자세히 살펴봤고 이미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상태였다. 큰언니가 눈물을 훔치자 마음은 달갑지 않았지만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큰언니, 그때 제가 언니한테 말씀드린 대로예요. 태아는 연악하니, 임산부는 함부로 음식을 먹어선 안 되지요. 하지만 언니는 소진 도장의 부수를 드셨고 태아의 정신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제가 방금 유야를 보았는데, 유야는…… 다른 아이와 조금 다릅니다―”
“정말이야?”
정아는 정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정미는 고통을 느꼈다.
“큰언니, 흥분하지 마세요―”
정아가 손을 놓고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그 정도는 아닐 줄 알았어……. 정말 정신에 문제가 있단 말이야? 정미,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큰언니, 제 말을 들으세요.”
정미는 손수건을 꺼내 정아의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유야의 병은 제가 고칠 수 있어요. 다만 지금은 너무 어려요. 두개골조차도 아직 어린 시기지요. 부수의 힘을 견디지 못할까 걱정이 되니, 돌이 지난 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돌?”
정아는 점점 차분해져 사색에 잠겼다.
‘내가 의심이 많은 게 아니야. 만약 유야에게 정말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면 지금 후회해봤자 소용없어. 확실히 숨겨야 할 뿐. 유야의 돌이 지난 후, 정미에게 치료를 받아야 안심할 수 있겠지. 다행히 겨우 몇 개월 된 아기가 다른 아기들보다 반응이 느린 건 그리 눈에 띄지 않으니까.’
정아는 그제야 마음이 완전히 진정되어 정미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했다.
“정미, 그때가 되면 너만 믿을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야는 제 조카인걸요. 걱정 마세요. 꼭 잘 치료해줄 거예요.”
정아의 일그러진 눈썹이 그제야 펴졌다. 그리고 곧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정미―”
“네?”
정미는 큰언니를 완전히 의지하며 믿고 있었다.
“소진 도장의 일은 내게 계획이 있어. 너, 넌 실수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만 않으면 돼.”
정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알고 있어요.”
‘지금의 큰언니는 이 비밀을 숨길 수밖에 없겠지. 만약 소진 도장이 부수를 마시도록 꼬드겼다는 얘기가 발설된다면, 소진 도장의 명성에 사람들이 그 말을 믿는지 아닌지가 우선 관건이고. 믿는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큰언니의 명성도 끝장날 테니. 얼마나 어리석다고 생각할까. 그 존엄한 태자비가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부수를 먹다니!’
여동생의 약속을 받은 정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방에서 나올 땐 들어갈 때보다 솔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씨는 두 딸이 나오자 웃으며 말했다.
“유야는 참 얌전하군요. 침을 많이 흘릴 뿐이지. 보세요, 제 소매가 다 이 녀석의 침으로 젖었답니다.”
정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곧바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이를 다시 건네받고 품에 안으며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유야가 갈수록 무거워집니다. 어머니, 힘들진 않으셨나요?”
“힘들 리가요.”
한 씨는 피곤한 모습의 장녀가 안타까워 말을 얹었다.
“아직 몸이 허할 테니 계속 유야를 안고 계시진 마세요. 나중에 요통에 시달리십니다.”
“걱정 마세요. 참, 어머니. 오후엔 외가에 가신다고요?”
용훤은 조용히 어미의 품에 기대있었다. 정아는 아이를 더욱 세게 안았다.
“예, 마침 정미의 급계에 대한 얘기를 나눌 겸 해서요. 제겐 마마와 정미 두 딸밖에 없으니 급계는 대사지요.”
한 씨는 장녀가 더욱 피곤해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새해엔 일도 많고 바쁠 테니 푹 쉬셔야 합니다. 저는 정미를 데리고 이만 돌아가 보지요.”
정아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최근 계속 졸려서 조금 버티기가 힘드네요.”
궁에 들어온 여인은 아무리 존귀한 신분이라도 부모를 보고 싶다고 하여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아는 오랜만에 한 씨를 만나 보내기 아쉬웠지만, 아들이 낫기 전에는 도저히 면목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정아는 용훤을 유모에게 넘겨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했다.
그런데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내시의 외침이 들려왔다.
“태자 전하 납시오―”
잠시 후, 태자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더니 한 씨와 정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장모님, 어찌 벌써 가십니까?”
한 씨는 예를 올린 뒤 입가의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태자비께서 피곤하시다 하여 편히 쉬실 수 있게 다음에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장녀가 황손을 낳은 뒤 태자의 태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예를 들어 예전엔 담담하게 한 씨를 ‘부인’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장모’라 부르며 말도 정중하게 하였다.
한 씨는 그런 것에 그리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장녀가 고생 끝에 드디어 해 뜰 날을 보는 게 기뻤다.
태자는 정미를 훑어본 뒤 정아에게로 걸어갔다.
“태자비, 피곤하시오?”
정아는 지금 시간에 태자가 찾아오리라 예상치 못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조금 어지럽습니다.”
태자가 입을 꾹 다물더니 말했다.
“그럼 푹 쉬시오.”
그러고는 유모에게로 성큼 걸어가 용훤을 건네받고 뒤돌아서 웃었다.
“모비께서 유야가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본궁이 데리고 가겠소.”
정아의 표정이 굳더니 조금 쉰 목소리로 물었다.
“모비께서 유야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태자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시오?”
정아는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며 가까스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첩의 말은, 오늘은 목은백 노부인께서 입궁하는 날 아닙니까. 유야는 아직 어리니, 만약 울었다가 모비와 목은백 노부인께 불편을 끼칠까 걱정이 되어서요.”
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투에선 불만을 드러냈다.
“노부인이 입궁했으니 모비께서 유야를 보여주고 싶으신 것 아니겠소. 유야는 외조모님의 증손자이니.”
정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차마 태자 혼자 용훤을 데리고 가게 할 수 없었다.
“그럼 신첩이 유야를 데리고 함께 가겠습니다.”
“태자비,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소?”
“신첩도 노부인께 인사를 드려야지요. 다시 돌아온 뒤 쉬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럼 가지.”
태자는 용훤을 유모에게 넘겨주고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정아는 정미를 스쳐 지나가며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정미는 응원하는 눈빛을 보낸 뒤, 무거운 마음으로 한 씨와 궁을 나섰다.
* * *
장춘궁 안은 봄날처럼 따뜻했고, 순금 향로에서는 향기가 천천히 피어나고 있었다.
정아는 태자 옆을 따라 걷고 있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마치 솜 위를 걷는 듯 기우뚱거리며 걸었다.
내시의 외침이 들려오고 뒤이어 새하얀 여우 가죽 융단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화 귀비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소진 도장이 보였다.
정아는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태자가 고개를 돌려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책문했다.
“태자비,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요!”
“신첩이 아직 몸이 허해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정아는 고개를 돌려 유모 품에 안겨있는 황손을 한 번 쳐다보고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태자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외조모님,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러고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진 도장을 보며 웃었다.
“도장도 오셨습니까?”
소진 도장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태자에게 절을 올렸다.
화 귀비가 말했다.
“외조모께서 최근 불면증이 심하시다 하여 도장을 모셔보았다.”
화 귀비 옆에는 예순이 조금 넘어 보이는 노부인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진한 홍갈색의 상의를 입고 머리엔 녹주석 머리띠를 쓰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희끗했지만 얼굴 주름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화 귀비의 모친이자 목은백 노부인 진(秦) 씨였다.
진 노부인은 태자가 들어오자 곧바로 토항 위에서 내려와 말했다.
“어서 유야를 이리로 안고 와 보세요. 한 번 봅시다.”
화 귀비는 급히 일어나 진 노부인을 앉혔다.
“어머니, 어서 앉으세요. 유야는 바로 앞에 있지 않습니까.”
태자가 유모를 흘끗 쳐다보자, 유모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용훤을 진 노부인에게 넘겨주었다.
진 노부인은 용훤을 품에 안아 천천히 흔들다가 방긋 웃었다.
“마마, 유아가 마마의 어릴 때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래요?”
화 귀비는 가까이 다가가 아이를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이렇게나 어린데 저를 닮은 걸 알아보시다니요.”
진 노부인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딱 보면 알지요.”
그러고는 손을 뻗어 용훤의 얼굴을 살짝 건드렸다.
“며칠 일찍 태어났는데도 아주 튼튼하게 생겼습니다.”
화 귀비가 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태자비가 정성으로 키우고 있으니.”
정아는 손에 땀을 쥐고 급히 말을 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이 며느리는 아직 서툴지만, 모비께서 골라주신 유모가 경험이 많은 덕분이지요.”
그 말에 화 귀비가 빙긋 웃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진 노부인은 담담한 안색으로 정아를 별로 상대하지 않았다.
정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전에 진 노부인의 적장손녀가 화 귀비의 제지로 입궁하지 못해 자살했고 정아가 태자와 혼인했으니, 정아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지어지앙(*池魚之殃: 연못에 사는 물고기의 재앙이란 뜻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재앙을 입었다는 뜻)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으응―”
용훤이 갑자기 소리를 내자 진 노부인이 놀라며 기뻐했다.
“마마, 유야가 이 할미를 보고 웃었습니다. 아이고, 웃다가 침이 다 흘렀네.”
진 노부인은 손수건을 꺼내 용훤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잠시 후, 손수건이 반이나 젖자 말했다.
“침이 어찌 이리 많이 흐르지?”
정아는 가슴이 철렁하여 급히 대답했다.
“이빨이 나서 그런가 봅니다.”
진 노부인은 용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이빨이 난다 해도 침이 이리 멈추지 않고 흐르진 않을 텐데요.”
갓난아이가 침을 흘리는 건 정상이었기에 진 노부인은 의아해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계속 용훤에게 장난을 쳤다.
“유야, 여길 보거라. 내가 네 증조모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