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37화 (237/375)

237화. 스승으로 모시다

정미는 급히 고개를 돌려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고 침상 위에 흩어져 있는 화선지를 끌어당겨 정철에게 건넸다.

“오라버니, 여기 시들 좀 봐.”

“어디서 발췌한 거야?”

정미는 그를 한 번 흘겨보며 따져 물었다.

“내가 쓴 거라곤 생각 안 해?”

정철이 웃었다.

“네가 쓴 건 알아. 근데 어디서 보고 발췌한 건지 물은 거야. 여기 시 중 어느 한 수든 퍼져나가면 꽤 떠들썩해질걸.”

‘그래, 오라버니의 마음속 나는 확실히 무학무능(無學無能)한 여동생이구나!’

“오라버니, 내 몸에 들러붙었던 고혼, 아직 기억하고 있지?”

정미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종이를 스치며 말을 이었다.

“그 고혼이 내 몸 안에 있을 때, 이 시는 그녀가 살아있던 시대에 널리 퍼진 것들이라 했어. 근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당대에 와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대.”

“그 고혼이 살았던 시대?”

정철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깨달았다.

“설마 이백 년 전 황조가 멸망하기 직전의 분서갱유를 말하는 거야?”

그 분서갱유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문인들로 하여금 깊이 원망하고 탄식하게 했다. 얼마나 많은 대유들이 생매장당하고 또 하나뿐인 서적들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몰랐다.

그때 이후, 많은 서적들이 실전(失傳)되었다.

“오라버니도 최근 수도에 널리 알려진 시 두 수를 알고 있지? 정요가 상국연 때 지은 시 말이야. 그걸 보고 이게 떠올랐어.”

정철은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그 묵직한 종이들을 쳐다봤다.

“네 말은, 지금까지 정요의 재능이 그저 기세도명(*欺世盜名: 세상 사람을 속이고 헛된 명예를 탐냄)이었단 거야?”

“그래!”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원래 이걸 다 퍼뜨려서 정요의 추악한 실체를 까발리려고 했거든. 근데 오라버니도 봤듯이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이 ‘어디서 발췌했냐’는 물음이었어.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걸 이대로 퍼뜨리면, 정요가 원래 자기가 썼던 거라고 말해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사람의 명성은 나무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정요에겐 수도 제일 재녀라는 명성이 있지만, 정미는 그저 무학무능한 소녀일 뿐이었다. 이 출처도 모르는 시를 퍼뜨린 뒤, 정요가 원래 자신이 썼던 거라고 말한다면 정미는 화만 입을 터였다.

“미미가 깊이 생각할 줄 알게 되었구나.”

정철은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정미의 찌푸린 미간을 평평하게 문질렀다. 정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철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 급히 손을 거둔 뒤 손에 든 시를 가리켰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 이 일은 오라버니에게 맡겨줘. 다른 사람의 시를 도용하는 건 원래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정미는 그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고마워, 오라버니.”

‘내가 아무렇게나 멍청한 수를 놓는 것보다 오라버니가 처리하는 게 훨씬 낫지.’

“그럼 오라버니는 먼저 돌아가 볼게.”

정철은 무의식적으로 목깃을 매만지며 방을 나갔다.

정미는 곧바로 침상 기둥에 얼굴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만져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다음, 다음엔, 다음엔 꼭 단정하고 얌전히 있을 거야.’

* * *

9월의 날씨는 쾌적했다.

가을옷을 입은 여종들은 걸음걸이마저 가벼웠지만, 정미는 여전히 매우 분주했다.

큰언니의 출산이라는 난제를 해결했으니 남은 세 가지 일을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첫 번째는 이제 태어난 조카의 정신 문제이고, 두 번째는 외조모님의 소갈증, 그리고 세 번째는 화서의 태생적으로 허약한 몸이었다.

조카는 아직 너무 어렸기에 정미가 치료할 수 있는 부술을 배운다고 해도 당분간은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외조모님과 화서가 악몽 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건 정미가 급계하는 해에 일어났을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미는 도저히 한가로이 있을 수 없어 매일 제생당에 가서 생사존망에 관한 일이 없는 한 후당(後堂)에 틀어박혀 새로운 부의 과목을 공부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0월이 되고 하룻밤 새 단풍이 하늘을 뒤덮었다. 환안은 낙엽을 밟으며 후당으로 와 정미에게 보고를 올렸다.

“아가씨, 전당(前堂)의 머슴이 소식을 전해왔는데 어떤 이상한 사람이 아가씨를 뵙고 싶어 한답니다.”

정미는 제생당 후당의 응접실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머슴이 ‘이상한 사람’이라 표현할만한 것이, 그자는 회백색의 길고 넓은 도포를 입고 머리엔 멱이(冪蘺)를 써 검고 얇은 비단이 눈과 코를 가리고 있었지만, 머리는 한 올도 틀어 올리지 않고 어깨까지 내린 채였다.

머리카락은 흰색이었고 옷의 색깔과 비슷해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정미는 문득 이자가 누군지 떠올라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도장이셨군요.”

그 사람이 멱이를 벗어 작은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새하얀 긴 머리가 드러났다.

정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발의 동안. 아주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외출할 때 이리 꽁꽁 가리고 다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백발 사내가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다른 사내가 시집갈 나이의 소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면 경망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백발 사내의 눈빛은 기나긴 세월을 겪어온 듯 차분하고 깊어 전혀 반감이 들지 않았다.

정미는 아래턱을 살짝 들고 그가 자신을 살펴보도록 두었다.

‘속세를 벗어난 분위기에 초혼술까지 부릴 줄 아는 걸 보니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일 거야. 이미 나와 아혜의 차이를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그럼 또 뭐 어때. 내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이 영혼도 내 거고 몸도 내 것인데. 제삼자가 이러니저러니 할 수 없지.’

아니나 다를까, 한참 침묵하던 백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젊은 벗이여, 저번에 만났을 때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정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

“혜안이십니다.”

백발 사내는 또다시 조용히 정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가만히 마주 앉아 있었기에 결국 참지 못한 환안이 고개를 내밀고 엿보다가 정미의 눈총을 받았다.

정미가 경직된 분위기를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도장, 무슨 의문이 있으시면 똑바로 여쭈셔도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느껴지면 물으면 되지. 숨길 생각도 없는걸. 한편으론 이 사람이 묻길 원하기도 하고. 그럼 이자가 혼을 잘못 불러냈던 일을 속 시원하게 지적할 수 있을 테니.’

백발 사내가 갑자기 웃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젊어 정철 또래로 보였다. 그 평온하고도 심오한 눈빛으로 웃자, 천천히 흐르는 달빛과도 같아 보여 조금도 엄숙하고 딱딱한 도사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군. 젊은 친구는 내가 저번에 만난 사람과 다른 사람이지?”

“도장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쩐지―”

백발 사내는 정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문득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

“어쩐지 그때 초혼에 성공하고 다른 영혼이 들어왔을 땐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왠지 조금 이상했던 바였다. 내 추측이 맞다면 그 이혼(異魂)은 젊은 친구의 몸에 오랫동안 지내왔었던 것 같군.”

정미가 묵인하자, 백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만약 그 이혼이 젊은 친구의 몸에 미리 적응하지 않았다면 몸이 거부반응을 일어 내가 진작에 눈치챘을 텐데 말이네. 그렇다면 빈도가 젊은 친구에게 사과해야겠어.”

정미는 그제야 아혜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깨닫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에 적응하고 내 혼백을 소모하게 하려고 아혜는 조금씩 치밀하게 계획해왔구나. 이렇게 보니 그때 절벽에서 떨어져 아혜가 미리 몸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었어.’

정미는 진심을 담아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도장께서 저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려야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죽어 다시 삶을 되찾지 못했을 테니까요.”

정미는 말하면서 눈을 들어 백발 사내를 향해 웃었다.

“다만 도장께 실망을 안겨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도장께서 마음에 두신 제자는 사라졌으니까요.”

백발 사내는 긴 눈썹을 조금 일그러트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히 문제긴 하군.”

정미의 입꼬리가 굳었다.

‘제자로 받아 달라 조른 것도 아닌데, 이렇게 격의 없이 말할 필요가 있나?’

“그럼 헛걸음을 한 게 아닌가…….”

백발 사내는 난처한 말투로 정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젊은 친구는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가?”

정미는 눈을 부라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떨떠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저 표정은 뭐야!’

정미는 건방지게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모시고 싶습니다.’였다.

정미는 그런 자신이 싫어졌지만 아혜와 다신 엮이지 않으려면 예전처럼 그녀에게서 부술을 배울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아혜에게 도움을 받다 보면 아혜를 막을 수도 없게 될 터였다.

‘이자의 내력도 모르고 부술이 아혜보다 뛰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들에겐 각자의 장기가 있으니까.’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내년에 급계한 뒤 현청관에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현청관?”

백발 사내가 가볍게 웃었다.

“이 스승도 현청관의 도사라네. 그럼 우선 자네를 제자로 기명해놓고 내년에 급계한 뒤에 정식으로 배사례(*拜師禮: 제자를 거두는 의식)를 치른 후 관에 돌아가 알리도록 하지.”

정미는 백발 사내의 능력을 본 적 있었기에 이런 명인이 자신 같은 어린 아가씨를 속일 리 없다고 생각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가 사부님을 뵙습니다.”

정미는 눈을 들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자는 아직 사부님의 존호(尊號)를 알지 못합니다.”

백발 사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때 봤던 아이보다 영리해 보이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구나. 큼큼, 이 정도 수준이 되니 조금 우둔한 쪽을 선호하게 되는 건가?’

“스승의 도호(道號)는 청령(靑翎)이다. 잊지 말거라.”

‘청령?’

정미는 현청관에서 유명한 도사를 머릿속에 한 번씩 떠올려보았지만 ‘청령’이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었다.

“새겨두겠습니다.”

이어서 청령 도장은 부술에 관련된 문제 몇 가지를 던져 정미의 수준을 시험해보았고 그 자리에서 부법 한 가지를 가르쳤다. 그는 정미의 수준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자 품에서 누르스름한 작은 책자를 꺼냈다.

“이걸 다 보고 모르는 게 있으면 우선 기록해두거라. 나중에 시험을 볼 테니.”

정미는 급히 책자를 건네받아 챙겼다.

그렇게 청령 도장은 갑작스레 방문했다가 빠르게 떠났다. 정미의 마음이 마침내 가라앉았을 때쯤, 탁자 위의 차는 이미 열기가 다 식어있었고 한 모금도 대지 않아 마치 아무도 온 적 없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정식 사부가 생겼어. 내게 함정을 팔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부님이.’

정미는 턱을 괴고 창밖에 흩날리는 단풍잎들을 보며 웃었다.

* * *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 눈 깜짝할 새 음력 섣달이 되었다.

세상 분위기는 조금 불안해졌다.

수개월 전 북제에서의 큰 가뭄으로 많은 소와 양이 죽었고 겨울을 견디기 힘들어 변방의 백성과 행상은 잦은 약탈을 당했다. 심지어 변방의 군대에 적지 않은 충돌까지 일어났고, 최근의 충돌은 규모도 꽤 커 출병하여 진압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주(靖州)에는 사흘 밤낮 동안 대설이 내려 많은 민가가 쓰러졌으며 사상자도 적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급히 이재민을 구제하러 나섰는데 수도의 부귀한 가문들조차 돈과 물자를 기부했다.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12월 20일이 되자 모든 관아가 문을 닫았고 관리들은 집에서 휴가를 보내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정미 나이대의 아가씨들에겐 당연히 별 영향이 없었지만, 이맘때면 자주 열렸던 떠들썩한 연회가 올해는 아주 많이 줄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섣달 대목이 되자, 신년을 맞이하며 헌 부적을 새 부적으로 바꾸었다. 정월 초이튿날이 되었을 때, 정미는 그제야 입궁할 기회가 생겨 꽤 많이 자란 조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