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호의로 일깨워주다
“미미―”
방문이 벌컥 열리자, 가을바람이 밀려 들어와 정미의 책상 위에 가득한 종이들이 펄럭였다.
정미가 뒤돌아서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둘째 오라버니?”
정철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정미가 쥐고 있던 붓을 재빨리 빼앗아 한쪽에 치우고는 정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미의 얼굴에 묻은 먹물을 닦아주다가 여동생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꾸짖었다.
“네 여종이 네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다고 하더구나. 도대체 몸을 살피고 있는 거야? 정미, 계속 이러면 오라버니 곁에 묶어둬야 안심이 되겠어.”
정미는 몇 시진 동안이나 시를 써 내렸기에 머리가 아주 어지러운 상태였다. 그녀는 정철의 말에도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멍하니 양손을 뻗었다.
“그럼 묶어줘.”
그러고는 두 눈을 감더니 스르르 쓰러졌다.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를 껴안은 뒤, 놀라 휘둥그레진 화미에게 명령했다.
“가서 물을 길어오거라.”
“의, 의원을 모실까요?”
늘 말주변이 좋던 화미마저 말을 더듬었다.
정철은 정미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그저 과로했을 뿐이니.”
잠시 후, 화미가 세숫대야와 부드러운 수건을 들고 걸어들어오다가 입구에 서서 멈칫했다.
정철은 이미 정미를 침상 위에 눕히고 곁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는데 왠지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화미는 고개를 휘휘 저어 마음속 이상한 느낌을 떨쳐낸 뒤 대야를 받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둘째 공자님, 물을 길어왔습니다.”
화미는 말하며 팔보문(八寶紋) 대야에 수건을 적셔 물기를 짠 후 다가와 정미의 얼굴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자 정철이 손을 뻗어 수건을 건네받았다.
“내가 하마.”
화미는 그 자리에 서서 정철이 수건으로 아가씨의 얼굴을 닦아주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정철의 표정은 진지했고 손길은 부드러워 그 주인을 모시는 시종들로 하여금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정철은 정미의 얼굴을 다 닦은 후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먹물을 세심히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뒤돌아서 화미를 보며 분부했다.
“가서 첨탕(*甜湯: 달콤한 맛이 나는 탕)을 데우고 있거라. 이따 아가씨가 깨어나면 들고 오고.”
“예.”
화미는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다가 입구에 서서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왠지 정철과 정미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만약 나중에 아가씨의 부군께서도 둘째 공자님처럼 이렇게 아가씨께 잘 대해주시면 좋을 텐데……. 퉤퉤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가씨의 부군께서 아가씨께 잘해주는 거랑, 둘째 공자님께서 아가씨께 잘해주는 거랑은 당연히 다르지! 음, 근데 어디가 다르다는 거지?’
화미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감히 더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 대야를 들고 급히 나갔다.
문이 닫히자, 사방이 고요해져 서로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정철은 침상 위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정미의 눈썹 뼈를 따라 조금씩 아래로 쓸어내리며 이미 익숙해 마지않는 얼굴을 따라 그렸다.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은 결국 정미의 입술에서 멈추더니 소녀의 부드럽고 차가운 입술에 닿자마자 불똥이라도 튄 듯 황급히 움츠렸다.
정철은 차갑게 굳은 안색으로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 그 위를 가득 채운 종이들을 주워보았다.
방 안은 점점 어두워졌다. 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철이 뒤돌아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촛대 옆으로 가 등불을 켰다.
방은 순식간에 환해졌지만 왠지 더욱 조용해진 느낌이 들었다.
화미는 깊게 잠들어있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 또 책상 옆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를 정철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소리 없이 방에서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철은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리고 정미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등불이 비추는 정철의 표정은 어두웠다가 밝았다가 했다.
‘미미가 또 귀신에 씐 건 아니겠지? 기절하기 전의 상태는 내가 알던 정미의 모습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는 어떻게 쓴 거란 말이야.’
정철은 생각할수록 더 이상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뻗어 정미의 인중을 꼬집었다.
몇 시진 동안 시를 쓰는 일은 아무리 튼튼한 사람이라도 버티지 못할 일이었다. 깊게 잠든 정미는 갑자기 조금 아픈 느낌이 들었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차마 뜨지 못하고 ‘아파’라고 중얼대며 손을 휘저었다.
정철은 반사적으로 정미의 손목을 잡고 다급히 말했다.
“미미, 어서 일어나봐!”
몽롱한 상태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미는 순간적으로 안전한 방향을 찾아 몸을 굴렸고 곧바로 따뜻한 품에 안겼다.
‘응, 이번엔 제대로 안겼구나.’
소녀는 편안한 듯 웅얼거렸다. 마치 반어가 애교를 부릴 때처럼.
정철은 침상 옆에 앉아 있다가 정미가 품에 안기자 손발이 굳어 멍해졌다. 심지어 품 안의 소녀는 그의 팔뚝에 얼굴을 문지르기까지 했고 편안한 곳을 찾은 듯 그대로 깊게 잠들어버렸다.
가볍고 옅은 숨결과 따뜻한 콧김이 정철의 팔꿈치에 닿았다.
정철은 전류가 등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났다.
정미는 기댈 곳을 잃어 갑자기 아래로 떨어졌고 얼굴이 땅에 닿을 때쯤 정철은 머리보다 행동이 앞서 정미를 다시 품에 안았다.
정미는 눈을 뜨고 정철을 빤히 쳐다봤다.
정철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표정으로 멍하니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정신이 들어 눈을 끔뻑거리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왜 나를 안고 있어?”
그 마른 목소리는 작은 불꽃처럼 사라진 전류를 다시 일게 했고, 전류는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흘러갔다.
정철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방금 떨어질 뻔해서…….”
정미는 정철의 허리를 안고 돌이켜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맞아, 깜빡 잠들었던 것 같아. 오라버니, 나 얼마나 오래 잤어?”
정미의 태연한 표정에 정철은 부끄러우면서도 안심이 되어 그녀를 다시 침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한 시진 정도.”
그러고는 아직도 먹 향이 남아있는 화선지를 끌고 와 물었다.
“말해봐, 이게 무슨 일이야?”
정미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오라버니, 어디 아파? 목소리가 이상해.”
“그래?”
정철은 귀 끝이 빠르게 달아오른 상태였지만 침착한 척 대답했다.
“어젯밤 일교차가 커서 그런지 목이 조금 불편하네.”
“그렇구나. 그럼 내가 환안한테 추리고(*秋梨膏: 배꿀즙)를 달여오라 할게.”
정미는 손을 뻗어 정철의 이마를 짚었다.
“얼굴도 빨갛고, 열이 나는 거야?”
정철은 바로 정미의 손을 뿌리쳤다. 정미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그냥…… 그냥 옷을 좀 많이 입어서 그래.”
정철은 말하면서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너무 힘을 준 탓에 그대로 옷깃이 풀어지고 말았다.
정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튀어나온 목젖과 쇄골에 꽂히더니 잠시 멍해졌다.
정철은 온몸이 굳어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정미는 순간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가 내 앞에서 옷을 벗다니! 어, 어떡해야 하지? 아무 짓도 안 하면 나 자신한테 미안할 것 같은데. 근데 무슨 짓을 했다가 오라버니가 화내면 어떡해? 하지만 오라버니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다는 건, 분명 내가 무슨 짓을 하길 원하는 거 아닐까?’
정미는 귀신에 홀린 듯 정철의 목젖을 만지며 변태 같은 본색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여기가 나랑 다르게 생겼는데…….”
“정미!”
정철은 벌떡 일어나 화풀이하듯 꾸짖었다.
“여자아이가 아무 데나 함부로 만지면 어떡해!”
그는 휙 뒤돌아서서 깊게 숨을 들이켜고 최대한 빨리 몸의 이상을 가라앉히려 했다.
‘큰일 났다. 오라버니가 진짜 화났어. 근데 난 아무 짓도 안 했는걸!’
“오라버니―”
불러도 대답하지 않자, 정미는 좋은 마음으로 알려주었다.
“빨리 옷섶을 안 여미면 화미랑 다른 아이들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걸.”
정철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익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잘 여몄다. 정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자, 그는 관자놀이가 펄쩍 뛰는 느낌에 옷깃을 다시 위로 잡아 올렸다.
‘앞으론 목깃이 높은 옷만 입을 수 있겠군. 어떡하지? 안 되겠다. 미미와 이야기를 잘 나눠봐야겠어!’
“미미.”
정철이 자리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이제 열네 살이지?”
정미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이면 급계를 해야 하고.”
정미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집은 가고 싶지 않다고?”
“응!”
정미는 이번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철은 조용히 숨을 들이켜곤 가볍게 내쉬었다.
“너도 이제 다 컸고 시집도 안 가고 싶다면서 사내한테 그렇게 호기심을 가져선 안 돼.”
“호기심이 아니라―”
“그럼 뭔데?”
정철은 이를 악물었다.
‘호기심도 아니면서 내 목젖을 만지고 함부로 입을 맞춘다고? 이런 여동생은 밖에 내놓기도 겁난다고!’
정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기심이 아니야. 그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뿐.’
정미는 어쩔 땐 갑자기 오라버니를 때려 기절시킨 후 인적이 드문 산굴로 데려가 평생을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갑작스러운 충동과 억누를 수 없는 반항은 자신과 다른 아가씨들이 다르다는 걸 일깨워주었다.
다른 아가씨들과 달리 자중하지도 정렬하지도 않은 자신이 유일하게 자신 있는 거라곤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마음뿐이었다.
정미가 정철을 빤히 쳐다봤다.
그림 같은 이목구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철은 마치 눈 폭풍 속에 우뚝 솟은 송백처럼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든 꿋꿋이 버텨 가장 좋은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명분으로 어찌 정철의 인생을 망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칭찬하며 부러워하는 장원랑에게 남매의 사랑이라는 죄명을 씌우다니.
소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정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방금 했던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렇게 심한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그는 손을 뻗어 정미의 어깨 위에 올렸다.
“미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라버니한테 알려줄 수 없어?”
‘계속 이러면 더 이상 좋은 남매로 지낼 자신이 없다고! 아니, 지금도 이미 그럴 자격이 없지. 어느 오라버니가 여동생에게 무의식적으로 애정이 묻어나는 행동을 하겠어?’
정미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아무렇게나 화제를 돌렸다.
“오라버니, 중양절에 올케언니를 만났어.”
“올케언니?”
정철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무슨 올케언니를 말하는 거야?”
정미는 멍해졌다.
“오라버니의 정혼녀 말이야.”
‘아, 그래. 내 정혼녀. 내 정혼녀가 미미의 올케언니지 참.’
정철은 떫은 열매라도 삼킨 듯한 기분이 들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정철의 주의력을 돌리는 데 성공하자, 정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 미소 지었다.
“방 아가씨가 참 좋은 사람이더라고.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방 아가씨와 혼인해야 하니까 앞으로 잘 지낼 거지?”
정철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미는 입술을 깨물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아가씨는 포기하자. 그렇지 않으면 오라버니와 방 아가씨가 행복하게 지낼 수 없잖아.”
정철은 정미를 보며 머뭇거리더니 한참 뒤에야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열었다.
“응, 포기해야지. 미미의 말이 맞아.”
목에 또 익숙한 피비린내가 느껴지자 정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