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사혼(賜婚)
“가지 끝에 맑은 향을 품고 죽을지언정, 절대 매서운 북풍에 꺾이지 않으리…….”
한지가 침상 위에서 중얼거리며 읊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이런 시를 지을 수 있는 아가씨인데도 아직도 그녀의 성품을 알아보지 못하신 겁니까? 제발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한지가 벌떡 일어나자, 도 씨는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
“얌전히 누워있거라. 상처가 벌어지면 또 아플 게야!”
한지는 이미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침상 머리맡에 기대있었던지라 도 씨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어머니, 아들이 어려서부터 공부하고 무술을 배우며 한 번이라도 딴짓을 한 적 있습니까? 17년 동안 한 번도 규범을 벗어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저지른 유일한 불효는 그저 저도 모르게 좋은 아가씨를 연모하게 된 것뿐이지요. 어머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엔 그 아이가 서녀 출신이라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지요. 하지만 지금은 귀비마마의 수양딸입니다. 그러니 저와 혼인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말을 하던 도중 한지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게다가 아들은 혼인하기도 전에 통방이 아이를 가졌지요. 조 시랑 집안과 퇴혼한 후, 저희 집안을 찾아오는 중매쟁이가 있었습니까?”
이 말은 도 씨의 아픈 곳을 찔렀다.
“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네가……. 에휴,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한지는 어머니의 말에 희망이 보이자 급히 도 씨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머니, 그냥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제겐 이 소원 하나뿐입니다.”
가뜩이나 심히 야위어진 한지는 얼마 전 얻어맞기까지 해 창백하고 병약한 안색이었고 유난히 불쌍해 보였다.
도 씨가 그 모습을 보고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도 씨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지야, 넌 위국공부의 세자고 혼사는 장난이 아니다. 어미가 허락한다 해도 네 조부님, 조모님과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게다. 네 고모도 저번에 돌아왔을 때 조모님께 정가 둘째 아가씨의 품행이 단정하지 않다고 말씀드렸고―”
“어머니!”
한지는 정요를 그리 말하는 것에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정요는 일개 서녀인데, 고모님이 어찌 그 아이를 인정하시겠습니까? 정요에게 잘못이 있다면 적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것뿐이겠지요. 어머니, 품행이 단정치 못한 사람이 그런 시를 지어낼 수 있겠습니까?”
도 씨는 말문이 막혔다.
한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색하며 말했다.
“어머니,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에서 계속 소극적으로 나오는 게 다 작은고모님 때문이라는 걸―”
“그게 무슨 말이냐!”
도 씨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녀석아, 허튼소리 말거라.”
“어릴 때 들었습니다.”
한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조부님과 아버지께서 군대를 거느리실 때 황상의 심기를 건드렸고 작은고모님은 절세미인이라 귀비마마의 심기를 건드리셨다고요. 어머니, 만약 아들이 귀비마마의 수양딸과 혼인하면, 집안에도 호사 아닙니까? 아들을 도와주세요, 어머니. 조모님과 다른 어른들께 부탁드려주세요.”
도 씨가 망설이자, 한지가 큰맘 먹고 말했다.
“어머니, 지금 아들의 평판으로는 높은 집안의 귀녀와 혼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머니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저는 그냥 반반이 낳은 아이를 지키며 여생을 보내지요. 만약 조부님과 다른 어르신들이 반대하시면 세자의 자리를 둘째에게 넘겨주면 됩니다.”
“입 닫거라!”
도 씨는 화가 나 몸을 벌벌 떨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네 아버지와 내게 미안하지도 않단 말이냐?”
“어머니, 저도 좋은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요를 아내로 맞을 수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어질 텐데, 정말 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으십니까?”
“일단 잘 생각해 보마…….”
도 씨는 비틀거리며 뒤돌아나갔다.
한지는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누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지만 입꼬리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사흘 후, 창경제가 화 귀비의 수양딸과 위국공 세자의 혼인을 맺어주었다는 소식이 수도에 퍼졌다.
아름다운 꽃엔 주인이 있는 법. 중양절에 맹소 아가씨의 재주를 보았던 귀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회인백부의 한 씨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
한 씨는 찻잔을 들어 바닥에 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사혼(*赐婚: 황제가 명하는 혼인)이라니, 사혼이라니! 안 되겠다. 미야, 나와 함께 위국공부로 가자꾸나. 그 사람들이 멍청해진 게 아닌지 네 외숙부에게 물어야겠다!”
정미가 손을 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갈래요. 어머니, 사혼인 걸 알고 계시면서 외가에 묻는다고 달라질까요? 게다가 지 오라버니는 늘 정요에게 푹 빠져있었잖아요. 두 사람이 혼인하면 사고를 덜 칠지도 모르죠.”
“네가 뭘 안다고!”
한 씨가 이를 갈았다.
한 씨는 그 천한 것이 이미 처녀의 몸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의 조카인 데다가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됐다, 네가 가지 않는다면 나 혼자 가마!”
한 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훌쩍 떠났다.
한 씨가 분노하며 백부를 떠나자, 정미는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시 두 수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자 마음이 더욱 어지러웠다.
“가을 국화가 집을 둘러싸니 마치 도연명의 집 같구나, 울타리를 돌아 국화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네. 꽃 중에 국화만 편애하는 것은 아니지만(*不是花中偏愛菊), 국화가 지고 나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볼 수 없다네(*此花開盡更無花)…….”
‘이 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뿐만 아니라 큰외숙모의 마음도 움직였어. 성품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정요만큼 고아하고 순결한 여인이 또 어딨겠어? 그래, 난 늘 우물 안 개구리였지. 이 세상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아. 아혜, 아혜 과거를 들어보니 그 부술도 스승 없이 배운 거잖아!’
「정미, 드디어 나를 다시 떠올려줬구나.」
팔찌에서 아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혜가 정미의 몸 안에 있을 땐 먼저 소통할 수 있었지만 다시 팔찌 안에 가둬지고 흑구의 피와 닭 머리에 맞은 뒤론 2할 정도의 혼력 밖에 남지 않아 정미가 자신을 떠올릴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혜?”
정미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를 느꼈는지 아혜가 급히 말했다.
「정미, 그렇게 경계할 필요가 어디 있어? 난 지금 그저 팔찌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잔혼(殘魂)일 뿐이야. 어쨌든 우리도 서로 아는 사이인데 가끔씩 나와 이야기 좀 나눠주면 안 돼?」
“너랑 할 얘기 없어.”
아혜는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자 말투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왜 굳이 나를 떠올린 거야? 이렇게 감정이 격한 상태로?」
“난―”
정미는 왠지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이 세상에 나와 정요가 어쩌다 멀어지게 되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아혜일 거야.’
정미는 귀신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혜, 이 세상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서 스승 없이도 뭔갈 할 수 사람도 있어?”
아혜는 뜻밖의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천부적인 재능? 그건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스승 없이는 불가능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하지만 네 부술도 스승 없이 스스로 통달한 거잖아?”
아혜는 잠시 멈칫했다. 지난 과거를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은지 차갑게 말을 이었다.
「허튼 생각 마. 그건 다른 기회가 있었을 뿐이야.」
“그런 거였구나.”
정미는 마음이 놓이기도 더욱 답답하기도 해 중얼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는걸.”
「누구?」
아혜가 반문했다가 사납게 따져 물었다.
「네 둘째 오라버니 말이지?」
‘천벌 받을 놈, 전양(全陽) 흑구의 피를 뿌리는 법도 알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야!’
정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아, 내 둘째 오라버니는 정말 우수한 인재긴 해. 하지만…… 뭐라 해야 할까, 정요와는 좀 달라. 오라버니는 무슨 일이든 잘하지만 그걸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예를 들어 오라버니의 창법은 매일 연습해서 그렇게 뛰어난 거거든. 하지만 정요는, 정요의 그 능력들은 태어날 때부터 할 줄 알았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나.”
정미가 정요의 시를 읽어주었다.
아혜는 잠시 침묵하더니 중얼거리며 말했다.
「동향인(同鄕人)이었다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정미, 그런 거로 주눅 들지 않아도 돼. 정요가 적은 시들은 다 표절이니까.」
“표절?”
정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예전에도 좋은 시를 아주 많이 지었는걸. 모두 걸작이었고 퍼져나가니 대유(大儒)들도 칭찬할 정도였어. 표절이라면 아무도 모를 리 없잖아?”
‘그 시들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유방백세(*流芳百世: 아름다운 향기가 백 년에 걸쳐 흐른다는 뜻으로, 훌륭한 사람의 명성이 후대에도 길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함)할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어?’
아혜는 흥미가 떨어진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널 속여서 뭐 하겠어? 지었던 모든 시가 걸작이니, 절대 한 사람이 지은 게 아니라는 거지. 생각해봐. 역대 황조에 그런 시인이 있었어? 시인에겐 전성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어.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공을 다져가는 과정이 있지. 어떻게 정요처럼 지어내는 시마다 심금을 울릴 수 있겠어?」
정미가 멍하니 있는 사이, 아혜는 아무 시를 한 수 읊어주었다.
정미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연거푸 말했다.
“맞아, 맞아. 바로 그런 좋은 시 말이야. 방금 네가 읊은 《백매(白梅)》도 정요가 작년 겨울에 지은 시야!”
「어때, 널 속인 게 아니지?」
아혜가 비웃으며 말하자, 정미는 화가 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찌 이런 후안무치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매일 밤 힘들게 공부하고 자괴감에 부끄러워하던 지난 나날이 우스워지잖아!’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혜, 그 시들 너도 할 줄 아는 거란 말이지?”
「다 기억나진 않아. 하지만 춘화추월(春花秋月)은 사람들 모두가 시에 넣기 좋아하는 소재니까 몇 수 읊을 순 있지. 다 들려줄까?」
아혜는 악의에 가득 찬 상태였다.
‘같은 고향 출신인데 나는 이런 상황에 처하고, 그 정요라는 계집은 이리 운이 좋다고? 남이 잘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지.’
“좋아!”
정미는 화선지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읊어줘, 내가 쓸 테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가씨,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그러나 정미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나가!”
환안은 방에서 나와 초조해하며 화미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왜 서재에 틀어박혀 계속 글만 쓰시지? 너무 무서워.”
화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러고 계신 지 벌써 두 시진이 다 되어간다고. 안 되겠어. 오늘 휴일인 것 같으니까 둘째 공자님이 계신지 보고 올게.”
화미는 계속 정철을 찾아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해가 서쪽으로 질 때쯤에야 정철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팔근에게 넘겨주고 걸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둘째 공자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어서 저희 아가씨 좀 말려주세요.”
화미의 말을 듣자 정철은 가슴이 망치에 맞은 듯 두근거렸다.
“셋째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아가씨께서 이른 아침부터 서재에서 뭔갈 쓰고 계시는데, 점심도 드시지 않고 아직까지도 쓰고 계세요. 마치…… 마치 귀신에 씐 것처럼요!”
정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귀신에 씌었다’는 말은 그저 화미가 상황이 심각함을 강조하려고 쓴 표현이었지만, 정철의 귀엔 다르게 들렸다.
그는 흑구의 피로 귀신을 몰아내고 여동생을 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휭 불어와 화미의 치맛자락이 날아올랐고, 화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미는 떨어질 것만 같은 턱을 멍하니 받쳤다.
‘둘째 공자님, 그 여유롭고 침착한 모습은 대체 어디 갔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