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34화 (234/375)

234화. 보이다

‘포전인옥?’

정미는 정요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그 표정을 보자 벽돌로 그 위선적인 얼굴을 힘껏 내리치고만 싶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요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연회장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연회장 끝쪽에 있는 궁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궁녀들이 줄지어 입장하더니 일 장(*약 3m) 높이의 흰 비단 병풍을 두 개 세우고 다시 퇴장했다. 몇 명은 남아서 붓과 먹을 들고 있었고, 또 다른 두 명은 팔각고(*八角鼓: 타악기의 일종)를 들고 연회장 끝쪽에 섰다.

정요는 오늘 호수 빛깔에 금 국화가 수 놓인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뽀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으며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중앙에 서서 우아하게 몸을 숙여 인사를 올린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서 감사하게도 자리를 내어주셨으니, 소야가 여기서 부끄러운 재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정요는 등장했을 때부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건만 이렇게 가장 먼저 재예를 뽐내니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두가 정요가 과연 어떤 재주를 보여줄지 궁금해했고 정미도 단정히 앉아 과연 정요가 어떤 장난을 칠지 지켜보았다.

정요는 살짝 미소짓더니 양손에 붓을 하나씩 들었다. 맑은 북소리가 들려오자 팔을 활짝 펼치더니 빠르게 춤추기 시작했다.

정요는 원래도 날씬한 몸매였지만 이렇게 팔을 활짝 펼치고 발을 들어 허리를 흔드니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연회장의 사람들 가운데 집안에 무랑(舞娘)이 있는 집안도 적지 않았기에 가무를 감상하는 수준도 그리 낮지 않았다. 정요의 춤이 즐겁고 아름답긴 했지만 그리 놀라운 수준도 아니었기에 긴장하고 있던 소녀들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포전인옥. 소녀들은 그 ‘전(磚)’이 지나치게 뛰어나 ‘옥(玉)’이 보잘것없어 보일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정요가 몸을 숙여 붓에 먹을 흠뻑 적시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뭘 하려는 거지?’

정요는 곧바로 그 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춤을 추며 병풍으로 다가갔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글자 하나를 썼다. 뒤이어 다시 몸을 돌려 자연스럽게 다른 병풍으로 가더니 왼손을 들어 또 글자 하나를 썼다.

‘춤을 추면서 양손으로 글을 쓴다고?’

이 신기한 공연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고 나중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화 귀비는 웃으며 태자에게 뭔갈 속삭였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따뜻해진 눈빛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이 여인은 늘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 과연 뭐라 적었을까?’

북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병풍에 마지막 글자까지 썼을 때, 정요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우아하게 퇴장했다.

“가서 병풍을 가까이 옮겨오거라. 소야가 뭐라 썼는지 보자꾸나.”

화 귀비가 입을 열어 정적을 깨트렸다.

궁녀 몇 명이 병풍을 들어 모두의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누군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가을 국화가 집을 둘러싸니 마치 도연명(*무릉도원을 노래했던 시인)의 집 같구나.(*秋叢繞舍似陶家) 울타리를 돌아 국화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네.(*遍繞籬邊日漸斜)”

시를 외던 사람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 급히 다른 쪽 병풍을 쳐다보더니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너는 다른 꽃들과 달리 가을에만 피는구나.(*花開不幷百花叢) 울타리 옆에 듬성듬성 홀로 펴있어도 네 지조와 절개는 결코 궁하지 않네.(*獨立疏籬趣未窮) 가지 끝에 맑은 향을 품고 죽을지언정,(*寧可枝頭抱香死) 절대 매서운 북풍에 꺾이지 않으리.(*何曾吹落北風中)”

흰 비단 병풍 두 개에 놀랍도록 절륜한 영국시(詠菊詩) 두 수가 아름다운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멍하니 두 시를 되뇌며 어느 시가 더 절묘한지 계속 번갈아 봤다.

“가을 국화가 집을 둘러싸니 마치 도연명의 집 같구나. 울타리를 돌아 국화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네…….”

위국공 부인 도 씨가 중얼거리며 덤덤한 표정의 소녀를 보다가 갑자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도 씨의 처가는 가양성에서 손꼽히는 학자 가문으로, 도가는 가을마다 만개하는 국화의 경치로 유명했다. 도 씨의 유년 시절과 아가씨 시절은 국화의 향기와 화려함 속에서 보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도 씨는 서녀인 정요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교만한 그녀조차 정요의 재주는 귀비의 수양딸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요의 시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고, 한참 동안 그 어느 소녀도 나서서 재주를 뽐내지 못했다. 그러자 화 귀비가 정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소야와 정가 셋째 아가씨는 친척 자매가 아닌가. 소야는 이미 공연을 했으니, 이번엔 자네가 한 번 보여주게.”

화 귀비의 제안은 나무랄 데가 없어 정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까지도 증오에 빠져있었다.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왼쪽 병풍의 시는 전에 정미가 정철에게 선물한 신발창에 숨겨져 있었던 쪽지의 필체와 똑같았다.

‘역시 정요였구나! 정말 화나고 증오스러워. ‘가지 끝에 맑은 향을 품고 죽을지언정, 절대 매서운 북풍에 꺾이지 않으리’라고? 지금 자기가 고결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정말 웃기군!’

“미야.”

한 씨가 정미를 살짝 밀었다.

정미는 더 이상 충동적인 소녀가 아니었기에 감정이 격렬히 끓어오르더라도 마음속에 꾹 눌렀다. 그녀는 이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중앙에서 멈춰선 정미는 뒤돌아서서 태연하게 화 귀비와 마주 보고 외쳤다.

“마마, 신녀는 자질이 형편없어 금기서화는 감히 보여드리기 부끄럽습니다. 투호를 해도 될까요?”

이런 장소에서 활을 쏘는 건 적절치 않았지만, 투호는 그나마 풍아한 쪽에 속했다. 그러나 투호 공연을 택하는 아가씨는 매우 드물었다.

이제 막 충격에서 벗어난 소녀들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화 귀비는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렸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요에게로 옮겨갔다.

정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정요는 정미가 투호를 선택한 것에 놀라지 않았다. 함께 자라왔으니 여동생의 주제가 어느 정도인지 모를 리 없었다.

‘투호? 정말 웃기는구나.’

정미는 시선을 거두었다. 궁녀들이 공연 준비를 마치자, 그녀는 촉이 없는 화살을 한 주먹 건네받고는 거의 조준하지도 않고 곧바로 내던졌다.

사람들은 놀라 멍해졌다.

‘한 개가 아니라 한 주먹을 저렇게?’

‘한꺼번에 한주먹을 던져버리다니, 저렇게 투호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봐! 저쪽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저 화살들을 다 맞으면 고슴도치가 될걸!’

화살촉이 단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미가 몸을 숙여 절했다.

“마마, 신녀의 공연은 끝났습니다.”

‘이게 끝이라고?’

사람들은 눈을 깜빡이며 길쭉한 모양의 금 단지를 쳐다봤다. 아홉 개의 화살이 안정적으로 그 안에 꽂혀있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말문이 막혔고 정요의 시로 받은 충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소녀들은 더 이상 숨지 않고 하나씩 나와 편하게 재주를 뽐내기 시작했다.

정미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아 눈을 들어 화 귀비 옆에 앉아 있는 정요와 마주 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정미는 씨익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정요는 멈칫했고 순간적으로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날 위협하는 거지? 분명 위협하는 거야!’

정미는 시선을 거두고 국화떡을 한 조각 들고 먹었다.

‘시 좀 지을 줄 아는 게 뭐 어떻다고? 날 건드리면 화살을 한 움큼 쥐어 던져버릴 거고, 그럼 끝일 텐데.’

정요는 정미의 위협에 심한 모욕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몇몇 아가씨들이 연이어 재예를 뽐내며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자, 그녀는 화 귀비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미의 옆으로 와 앉았다.

“미 동생, 방금 그 투호는 정말 놀라웠어.”

정요가 웃으며 정미를 쳐다봤다.

대화 예절에 따른다면 정미도 정요의 시와 춤을 칭찬해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정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요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맙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정요는 말문이 막혔다.

‘전혀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어떡하지?’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투호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정요는 말하려다 말고 근처에 있는 아가씨들을 힐끗 훑어봤다.

정미는 조금 곤혹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무서워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정미의 물음은 직설적이면서도 의미심장했기에 옆에서 듣던 소녀들은 생각했다.

‘누가 무섭다는 거야. 그저 투호인데. 전쟁터도 아니고. 우린 그래도 기마와 궁술을 배운 귀녀라고. 무서울 리 있겠어?’

소녀들이 불쾌한 듯 정요를 훑어봤다.

웃음을 띠고 있던 정요의 입꼬리가 굳었다.

‘늘 멍청하던 정미가 언제부터 말에 함정을 팔 수 있게 되었지?’

“당연히 그런 뜻이 아니지. 그저 귀비마마와 태자 전하도 계시고 많은 부인들도 보고 계시니, 금기서화를 내보이는 게 더 즐겁잖아. 미 동생, 내 말이 맞지 않아?”

정미는 정요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전 공연에 오를 때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요. 귀비마마께서 오늘 연회에 저를 초대하실 줄도 몰랐으니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그저 흥을 좀 돋게 했을 뿐이지요. 맹 아가씨처럼 훌륭한 솜씨로 모두를 놀래킬 수 있을 리가요.”

이 말에 소녀들의 안색이 살짝 굳었고 정요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해졌다.

‘그래, 맹 아가씨의 시가 절묘했든 아니든 이런 장소에서 귀비마마의 수양딸이 이 정도로 자신을 뽐낼 이유가 뭐 있어? 태자의 첩이 되려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뭐 하러 그런 건데? 설마 그저 우리를 짓밟고 싶어서였나? 그게 더 괘씸하거든!’

정요는 소녀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급히 인사하고는 화 귀비 옆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한 소녀가 조용히 ‘퉤’ 하고 침을 뱉더니 정미에게 호감을 보이며 물었다.

“정가 셋째 아가씨, 저분이 정말 당신의 먼 친척인 건가요? 어찌 별로 가까워 보이지 않네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라 저도 잘 모릅니다.”

다른 소녀가 다가와 정미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아이참, 역시 저는 셋째 아가씨처럼 솔직한 사람이 좋다니까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의 길을 막지만 않으면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는데 말이야.’

이번 상국연에서 정미는 많은 귀녀들의 호감을 샀고, 정요는 은근한 질투를 받았다. 하지만 정요의 아름다운 시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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