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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33화 (233/375)

233화. 포전인옥(抛磚引玉)

정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쨌든 간에 방용은 곧 자신의 올케언니가 될 사람이었기에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순 없었다.

“가복 언니, 중추절에 태자비마마께서 내게 월화군(*月華裙: 열 폭의 천으로 만들어진 복식 중 하나)을 한 벌 하사해주셨는데,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았어. 화 수장의 치마보다 더 예쁘던데 그걸로 배상해주면 어때?”

화 수장의 옷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그 누구도 감히 황궁의 옷보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서가복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미를 한 번 쳐다봤다가 눈을 부라렸다.

“미 동생이었구나. 그렇지만 내 치마는 이 아가씨가 더럽힌 거지, 네가 그런 게 아니야. 아무 잘못 없는 네가 배상하는 도리가 어디 있어?”

정미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씁쓸함을 억누르며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연하게 웃었다.

“가복 언니, 방 아가씨가 내 예비 올케언니인데 몰랐던 거야?”

정미는 말하면서 방용을 보며 소개했다.

“방 아가씨, 이쪽은 서 시경 집안의 아가씨예요. 저희와 교분이 있는 집안입니다.”

이 말에 다른 아가씨들도 문득 떠올랐다.

‘저 서 아가씨도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와 혼담이 오갔었다고 들었는데. 혼담만 오갔을 뿐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게다가 저쪽에서 마음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지.‘

방용을 보고 씁쓸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철은 젊고 잘생긴 장원랑이었고, 말을 타고 거리를 거닐 때 많은 아가씨들이 건물에 숨어 몰래 그를 지켜보곤 했다. 그러니 지금 누가 방용의 운을 질투하지 않는가. 그저 자신의 부모님이 충정후부보다 빨리 행동하지 않은 게 원망스러울 것이다.

“서 아가씨였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방용은 다시 몸을 숙여 사과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던 소궁녀에게 말했다.

“빈 화분을 하나 가져오거라.”

“아, 알겠습니다.”

소궁녀는 급히 가산 아래로 달려가 빈 화분을 들고 돌아왔다.

방용은 화분을 건네받고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국화를 화분에 옮겨심었고, 손으로 흙을 잘 누르고는 왠지 아무렇게나 국화를 헤집어보는 듯하더니 그제야 소궁녀를 따라 손을 씻으러 갔다.

아가씨들은 화분대 위에 다시 놓인 자주색 국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국화는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싱싱해 보였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방용을 높이 평가했고 비웃음 혹은 깔보는 눈빛으로 서가복을 쳐다봤다.

서가복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정미를 잡아당겼다.

“미 동생,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나 나누자.”

정미는 오늘 서가복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혼담을 망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았고 서가복에게 이끌려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만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다가 서가복이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방 아가씨가 네 예비 올케야? 나보다 잘난 것 없어 보이던데!”

서가복은 조금 짜증이 난 듯 손을 뻗어 정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처음 너희 집에 갔을 땐 내가 네 오라버니를 억지로 빼앗을까 봐 잔뜩 경계하더니. 방 아가씨는 이렇게 감싸주는구나. 미 동생, 그렇게 한쪽 편만 드는 건 나도 용납할 수 없어.”

정미가 서가복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서 방 아가씨를 괴롭힌 거야?”

서가복이 눈을 부라렸다.

“일부러 괴롭힌 게 아냐. 괜히 좋게 보였다가 귀인의 마음에 들까 봐 그런 거였다고. 내 성정에 황궁에 들어오면 답답해 죽고 말걸. 화원의 모든 아가씨들이 내가 방 아가씨에게 부군을 빼앗겼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일거양득인 일 아냐?”

서가복의 일리 있는 말에 정미는 말문이 막혔다.

서가복은 정미가 모처럼 쏘아붙이지 않자 손을 뻗어 살짝 찔러보았다.

“정말이야. 너희 집안에서 고르고 고른 사람이 저런 며느리라고? 내 시종 중 아무나 하나를 골라도 저 아가씨보단 예쁠걸.”

정미는 살짝 기분이 나빠 서가복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는 여인의 외모를 중시하지 않아.”

서가복은 잠시 당황하더니 피식 웃었다.

“농담 마. 사람이라면 모두 아름다운 걸 좋아해. 네 둘째 오라버니가 비정상이 아닌 이상 미녀를 좋아할걸.”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그거랑 아내를 맞는 건 별개지. 두 아가씨가 있는데, 하나는 외모는 아름답지만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다른 하나는 외모는 평범하지만 품행이 고결하다면, 오라버니는 분명 두 번째 아가씨를 고를 거라고.”

“정말?”

서가복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연하지.”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양심이 찔렸다.

‘사실 오라버니는 둘 사람 다 좋아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를 좋아하니까! 어떡하지? 이 답이 떠오르니까 너무 행복해졌어.’

정미는 얼굴을 가렸다.

“정가 셋째 아가씨.”

정미가 고개를 돌리자, 손을 다 씻고 온 방용이 근처에 서 있었다.

방용의 입가엔 차분한 웃음기가 띠어있었고 한걸음 다가와 정미의 손을 붙잡았다.

“방금은 고마웠어요. 손을 씻는 데 급급해서 아가씨께 인사도 못 드렸네요. 이에 마음 상하지 않으셨음 좋겠어요.”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고 싶었다.

정미의 이성은 방용이 괜찮은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쨌든 연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기에 정미는 태도를 단정히 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손을 빼내며 웃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방금 그런 상황에선 당연히 수습을 다 한 뒤 이야기를 나누든지 해야지요. 제가 어찌 마음 상하겠어요.”

정미는 말하며 서가복을 잡아당겼다.

“사실 가복 언니도 그저 성정이 솔직한 것뿐이에요. 방 아가씨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방용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가복을 쳐다보다가 놀랍도록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사실 서 아가씨도 그저 입궁을 원치 않아서 그러셨던 거지요?”

“너―”

서가복은 입을 뻐끔거리며 난처해했다.

방용이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만약 서 아가씨를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예비 시누이와 인사를 나누는 것은 예절이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면 다급하고 신중하지 못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기에, 방용은 정미와 몇 마디만 나눈 뒤 차분히 떠났다.

서가복은 아무렇게나 국화잎을 하나 잡고 투덜거렸다.

“흥흥, 그렇게 형편없진 않네.”

정미는 방용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작게 말했다.

“응, 오라버니가 복이 있네.”

‘방 아가씨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니, 같이 살다 보면 오라버니도 점점 방 아가씨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분명 오라버니에게도 기쁜 일인데 너무 질투 나서 신발창으로 때리고 싶은 마음은 어떡하지?’

“귀비마마 납시오―”

그때, 갑자기 내시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렇게나 거닐며 국화를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아가씨들은 급히 흩어져 어른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정미도 서가복과 헤어져 한 씨의 곁으로 돌아갔다.

한 씨가 다가와 작게 물었다.

“어땠니?”

정미는 한 씨의 물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쥐어 짜내도 웃음이 지어지지 않아 진지하게 말했다.

“꽤 좋은 분이셨어요. 오라버니에게 내조를 잘할 것 같아요.”

한 씨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됐다. 부인을 얻을 땐 현명함을 봐야 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두 모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천천히 걸어오는 화 귀비와 그녀를 뒤따르고 있는 정요를 조용히 쳐다봤다.

정요가 회인백부 둘째 아가씨의 신분일 때, 수도 제일 재녀라는 명성이 유달리 자자했기에 거의 존재감이 없는 다른 서녀들과는 달리 정요를 아는 사람은 꽤 적지 않았다.

화 귀비 옆에서 걷는 정요는 유난히 눈에 띄었고, 그녀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곧바로 소곤대기 시작했다.

정요는 차분한 표정으로 당당히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태자비의 여동생이라 태자의 첩이 될 일은 절대 없었기에 아가씨들 중 가장 침착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한 씨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머니, 큰언니는 왜 안 왔을까요?”

한 씨도 조금 걱정되는 듯 말했다.

“아마 아직 몸조리가 다 끝나지 않아 오지 못한 것 같구나. 연회가 끝나면 같이 가보자꾸나.”

화 귀비가 자리에 앉아 입을 열자 소곤대던 소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늘 부인들을 궁으로 초대해 중양절을 함께 보낼 수 있어 본궁도 아주 기쁘구나. 첫 번째로 기쁜 일은 태자비가 무사히 적장손을 낳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음이고, 두 번째로 기쁜 일은 본궁이 청량산에 갔을 때 인품과 용모가 출중한 수양딸을 삼아 왔다는 것이네.”

화 귀비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정요를 한 번 쳐다보고 크게 외쳤다.

“바로 본궁 옆에 있는 이 맹 아가씨라네. 회인백부 맹 노부인의 조카손녀이고,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부인들에게 소개하겠네.”

정미는 수많은 시선이 자신과 어머니에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한 씨는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자리였기에 그저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정요를 만난 적 있는 사람이든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든, 분분히 화 귀비에게 축하 인사를 올렸고 정요를 찬미하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화 귀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잔을 들었다.

“꽃을 감상하는 작은 연회일 뿐이니 모두 조심스럽게 굴 필요 없다. 자, 본궁이 먼저 잔을 비우지.”

화 귀비가 술을 마시자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연회는 어화원에서 열렸기에, 각양각색의 국화꽃이 향기로운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었고,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며 취기가 올라오니 분위기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태자 전하 납시오―”

내시가 외치자, 분위기가 더 떠들썩해졌다.

태자는 막 스무 살 안팎의 나이에 준수한 외모를 가졌고 동작 하나하나에 남성미가 묻어나왔다. 게다가 일국의 황태자라는 신분이 후광을 비추니 몰래 그를 올려다보던 소녀들의 얼굴이 슬그머니 붉어졌다.

자리에 있는 아가씨들은 모두 높은 가문의 적녀였기에, 첩이 되는 건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일 터였다. 하지만 태자의 첩이 되는 건 달랐다.

지난 황조였다면 이 소녀들의 부형(父兄)이 혹시나 줄을 잘못 서는 것일까 두려워했겠지만, 지금 황제에겐 아들이 네 명밖에 없었고 절름발이인 대황자를 제외하면 아직 어린 두 황자 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태자의 자리를 건들 수 있겠는가?

잠저(*潛邸: 황제가 되기 전) 때 태자의 여인이 되면, 이변이 없는 한 태자가 즉위한 뒤 후궁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모비.”

태자가 화 귀비 옆으로 와 공수했다.

화 귀비는 태자의 등장에 따른 미묘한 변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태자, 늦었구나.”

태자는 국화주를 한잔 건네받고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모비의 말씀이 맞네. 본궁이 늦었으니 벌을 받겠네.”

말을 마친 태자는 고개를 젖혀 국화주를 끝까지 들이킨 뒤, 화 귀비의 옆에 앉아 웃으며 소곤소곤 말했다.

분위기가 다시 떠들썩해지자 많은 아가씨들은 절로 긴장이 했다.

태자가 왔으니 재예(才藝)를 뽐낼 때가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 귀비가 입을 열었다.

“술을 마시며 꽃을 감상하기만 하면 재미없지. 여기 있는 아이들 모두 용모와 자질이 출중한 걸 본궁도 알고 있네. 그러니 한 번 본궁에게 눈요기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이 말에 소녀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하며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화 귀비는 진작에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옆의 정요를 살짝 쳤다.

“소야, 네가 포전인옥(*抛磚引玉: 벽돌을 버리고 옥을 받음. 즉, 남의 고견을 듣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먼저 발표한다는 뜻)을 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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