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상처
늘 예리하게 정미의 기분을 알아채던 정철도 이번엔 정미의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은 걸 눈치채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혼인대사는 당연히 부모님의 뜻에 따라야지. 걱정 마, 미미. 그때가 되면 오라버니가 책임지고 품행이 좋지 않은 사람이 네 평생을 망치지 않도록 할게.”
‘역시 그렇구나. 그럴 수밖에 없구나.’
정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방긋 웃으며 눈을 들었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오라버니가 내게 제일 잘 해줘. 내가 오라버니에게 이 얘길 한 것도 오라버니보고 도와달라고 하려던 거였어. 만약 내년에 아버지 어머니께서 내 혼사를 준비하려고 하시면, 오라버니가 나를 시집보내지 말라고 설득해줘.”
“미미, 허튼소리 마.”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를 살짝 때렸다.
“허튼소리가 아니야.”
정미가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이미 다 생각해놓았어. 급계하면 현청관에 들어가서 수석 부의가 될 거야.”
세상 사람들은 신을 공경하고 도리를 중히 여겼다. 정미가 아무리 제생당에서 진료하고 궁에 들어가 귀인들의 병을 치료해주어도 그저 뛰어난 의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평민 백성들은 그나마 존중해줄지는 몰라도, 귀인들은 어의 정도는 되어야 존중의 ‘존’ 자 정도를 뱉을 것이다. 정미의 어린 나이와 여인이라는 신분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러나 현청관의 제자가 되면, 일단 세상 사람들 눈에 도사로 보일 테고 부술이 대성하기만 하면 속세를 벗어난 지위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소진 도장처럼.
정미는 다신 큰언니의 출산 때와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저 밖에서 기다리기만 할 수밖에 없는, 한 발짝조차 안에 들어갈 자격도 없는 상황을.
‘최소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해.’
정미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인지, 정철이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진심이야?”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가 되었을 때 오라버니가 나를 도울 수 없다고 해도 나를 막진 말아줘, 응?”
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마당의 대나무숲을 한참 쳐다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게 미미가 이루고 싶은 거라면 오라버니도 지지할게.”
“고마워, 오라버니.”
정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볼게.”
“그래, 조심히 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그 모습이 사라지자, 정철은 그제야 뒤돌아섰다. 그러다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더니 피를 토해냈다.
안쪽으로 들어오던 팔근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공자님, 왜, 왜 그러십니까? 거의 다 나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철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다.”
팔근은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의원을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늘 괜찮다고 하시지만, 근 한 달 동안 몇 번이나 피를 토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이게 어찌 괜찮은 거란 말입니까? 안 되겠습니다. 소인이 셋째 아가씨께 알리러 가야겠어요. 셋째 아가씨의 말이라면 들으실 테니까요!”
“팔근!”
정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 아이를 찾아가 허튼소릴 할 거면 다신 돌아오지 말거라.”
“하지만, 하지만―”
팔근은 발을 동동 굴렀다.
‘공자께선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리실까. 아프면 의원을 찾아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피를 토하는 게 어찌 괜찮은 일일 수 있단 말인가!’
팔근은 자신의 먼 친척이 떠올라 하얗게 질린 입술로 말했다.
“공자님은 모르시겠지만, 제 친척 중 한 분도 이렇게 피를 토하셨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폐병에 걸려 아무리 의원을 찾아보고 약을 먹어봐도 낫지 않다가, 나중에 각혈을 하기 시작하자 날이 갈수록 이렇게 많은 피를 토하셨다고요.”
팔근은 손짓으로 어림짐작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지요. 공자님, 정말 저를 내쫓으시더라도 이 일은 공자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셋째 아가씨께 꼭 알려드려야겠어요.”
“멈춰라.”
정철이 부채 손잡이로 팔근을 살짝 때렸다.
“누가 네 주인인지 잊어선 안 되지. 내가 정말 큰 병에 걸렸다면, 어찌 내 몸으로 농담을 할 수 있겠느냐? 이건 정미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순간 감정이 격해져 내력(內力)이 어긋난 탓이다. 맺힌 피를 토해내는 건 좋은 일이지. 며칠 몸조리를 잘하면 완전히 나을 게다. 네가 함부로 떠들면 정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고 집안 어른들께서도 걱정하실 텐데, 나를 성가시게 하려는 것이냐?”
“정말입니까?”
“그래, 어서 나가거라. 쉬는 데 방해하지 말고.”
팔근은 그제야 안심하며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나갔다.
* * *
이후 백부는 평화로웠다. 정미는 다시 오전에는 제생당에 가고, 오후에는 덕소 장공주부에 가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정요는 종일 염송당에 머무르며 맹 노부인을 즐겁게 해줄 뿐 별다른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8월 15일 전, 궁에서 사람이 찾아와 정요에게 입궁하여 중추절(*中秋节: 중국의 추석)을 지내라는 귀비의 명을 전했다.
정미는 정아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태자비는 아직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기에, 궁에 들어갈 핑곗거리가 없어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9월 초아흐렛날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대량인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는 관습이 있었다. 화 귀비는 어화원에서 상국연(賞菊宴)을 열어 각 집안의 부인과 열네 살이 넘은 적출 아가씨들을 초대했다. 정미에게는 이날이 되어서야 입궁할 기회가 생겼다.
마차 안. 한 씨의 표정은 어두웠고 조금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네 백모님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궁을 하지 않아 그 짜증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할 수 있다면 나도 꾀병을 부리고 안 가고 싶은데.”
“입궁하면 큰언니를 볼 수 있는데 왜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정미는 최근 부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던 탓에 어젯밤에서야 입궁하여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어 한 씨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한 씨가 손가락을 뻗어 정미의 이마를 살짝 눌렀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종일 집에 붙어있질 않으니 이런 것도 모르는구나. 귀비마마께서 상국연을 열어 각 집안의 부인과 열네 살이 넘은 적녀들을 초대한 이유가 뭐겠니?”
한 씨는 정미가 반응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태자의 첩을 고르려는 것 아니겠느냐! 태자의 동궁에는 네 큰언니와 양제 하나만 있고, 그것보다 지위가 낮은 소훈(昭訓), 봉의(奉依), 양원(良媛), 승휘(丞徽) 자리는 모두 비어있지 않니. 이제 네 큰언니가 황가의 장손을 낳았으니, 귀비마마께선 동궁을 채울 생각이시겠지. 양원은 여섯 명, 승휘는 열 명이고, 정3품의 양제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궁에 들어오게 되면 네 큰언니가 얼마나 속상하겠어.”
정미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저는 왜 입궁하는 거예요?”
한 씨는 잠시 멍해졌다가, 정미가 엉뚱한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닫고 손을 들어 그녀를 살짝 때리며 꾸짖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태자의 첩을 고른다고 해도 상국연은 상국연이니 너도 태자비의 여동생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지. 게다가 방 아가씨도 이번에 입궁하여 연회에 참석한다더구나. 너희 아가씨들끼리는 잘 통할 테니, 마침 그 아가씨의 성정이 어떤지 한번 알아보거라.”
* * *
9월은 일 년 중 가장 쾌적한 시기였다.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하며 바람은 잔잔하고 구름은 옅으니, 그런 어지러운 일들이 없었다면 어화원에서 술을 마시며 국화를 감상하는 것도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을 터였다.
정미는 그 경치 속에서 사촌 언니인 한추화를 발견했다.
한추화는 위국공 부인 도 씨와 함께 왔다. 그녀는 우아하면서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조용히 도 씨 옆에 앉은 채였다.
정미는 인파를 지나 도 씨에게 인사를 올린 후 한추화의 손을 잡았다.
“언니, 같이 꽃 구경하러 가자.”
한추화는 도 씨의 허락을 받고 정미와 함께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속에서 조용히 정미에게 물었다.
“내가 들은 백부의 먼 친척 동생 얘기가…… 사실이야?”
“응, 언니도 들었어?”
한추화는 그저 웃었다.
‘당연히 들었지. 그동안 한지가 몇 번이나 소란을 피웠는지. 그 회인백부의 먼 친척 동생과 혼인하겠다고 난리를 부리는 바람에 조모님은 화가 나서 앓아누우셨고, 조부님도 화가 나 매를 들어 한지를 침상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만드셨으니. 최근 위국공부는 정말 떠들썩했어.‘
“외조부님과 외조모님은 잘 지내지? 오랫동안 뵙지 못했는데.”
“잘 지내셔. 걱정 마.”
한추화는 정미가 자세히 물어볼까 봐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정미, 저 아가씨는 누구야?”
정미가 쳐다보니 자색 옷을 입은 소녀가 몸을 약간 기울이고 화분대에 심어진 자줏빛 국화 향을 맡는 모습이 보였다.
정미는 옆얼굴만 보였지만 그 얼굴은 둘째 오라버니의 정혼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머릿속에 계속 그려보던 모습이었기에, 첫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이 한 씨가 잘 어울려보라고 당부했던 방 아가씨였다.
한추화가 정미를 잡아당기며 빙긋 웃었다.
“예비 올케언니를 만났는데 가서 인사하지 않고 뭐해?”
정미는 발바닥에 뿌리라도 돋은 듯 걸음을 뗄 수 없어 난처해하며 말했다.
“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추화가 참지 못하고 놀렸다.
“대부분은 올케 쪽이 시누이를 어려워하는데, 넌 왜 반대로 됐어? 걱정 마. 방 아가씨도 너에게 분명 상냥하게 대해줄 거야.”
하지만 정미는 여전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정미가 오라버니의 혼인을 기다리는 시누이였다면 당연히 어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미는 오라버니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예비 올케언니에게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단 만나지 않으면 힘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가자, 언니가 같이 가 줄게.”
한추화가 정미를 잡아당겼다.
이미 정혼까지 했는데 이런 장소에서 마주치고 못 본 척하는 건 실례였다.
정미가 한추화에게 이끌려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익숙한 사람이 방 아가씨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보였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자줏빛 국화가 심긴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다.
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서가복은 방용(方容)과 반 장 정도 거리 앞에서 치맛자락을 털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찌 이리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사람들이 감상할 국화를 망가뜨린 건 둘째치고 제게 흙을 튀기다니요!”
방용은 화분이 깨져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어느 집안의 아가씨이신지요? 제가 사람을 시켜 새 치마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서가복이 차갑게 웃었다.
“말이야 쉽지. 이 치마는 화(華) 수장(*綉庄: 자수를 하는 사업체)의 가장 뛰어난 수랑(*綉娘: 자수 공예를 하는 사람)이 만든 겁니다. 배상할 수 있나요?”
화 수장의 가장 뛰어난 수랑이 제작한 치마라면, 확실히 보통 가격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 앞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건 조금 보기 흉한 일이긴 했다.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아는 서가복은 성정이 조금 튀어서 사람을 놀래킬 때가 종종 있긴 했지만, 이렇게 모진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설마 방 아가씨가 오라버니와 정혼 했기 때문인가?’
정미는 방금까지 계속 방용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가복이 걸어갔고 두 사람의 몸이 닿기도 전에 화분이 떨어졌으니, 서가복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미는 서가복이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쯤 별거 아니라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