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31화 (231/375)

231화. 묻다

“폐하, 안양 공주께서 오셨습니다.”

침상 위에 비스듬히 기대있던 창경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들라 하라.”

잠시 후 안양 공주가 걸어들어왔다. 그녀가 푸른색 옷을 입은 모습에 창경제의 눈살이 펴졌다.

창경제는 이 딸을 보면 꽤 유감스러웠다.

그는 자손이 귀했기에 자식들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녀는 처음 얻은 자식이기에 더욱 예뻐했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는 장녀를 제멋대로인 성정으로 만들었고, 분명 과부인데도 늘 붉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공주의 신분 때문에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아비로서 몹시 창피했다.

‘장녀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 보구나. 잠깐, 내게 부탁할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창경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안양, 지금 시간에 어찌 입궁하였느냐?”

“최근 부황을 뵙지 못해 몹시 그리웠답니다.”

안양 공주가 걸어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연스럽게 창경제의 다리를 안마했다.

딸의 말에 창경제의 마음이 활짝 열렸고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꺼냈다.

“늘 제멋대로만 굴면 안 된다. 취미가 있더라도 적당한 정도에서 그쳐야 해. 뒷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만약 딸이 사내 때문에 인명사고를 치게 되면 어사들은 금란전에서 내게 화내며 눈을 부라리겠지.’

옆에 서 있던 주홍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몰래 눈을 부라렸다.

‘역시 폐하의 친딸이군요. 면수를 기르는 그런 창피한 일도 취미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니요.‘

“부황, 아신(兒臣)을 나무라지 마세요. 아신의 저택은 아무것도 없이 아주 깨끗하답니다. 그렇게 큰 공주부에 저 혼자 살고 있다고요. 심지어 정원의 꽃마저 어화원만큼 아름답지 못해서 부황이 그리워졌지요.”

“음?”

창경제는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공주가 면수를 기르는 일로 몇 번이나 호되게 야단을 쳤던가. 때리기도 해보고 욕도 해봤지만, 딸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결국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딸이 내게 개과천선을 했다고 알리는 건가?’

창경제가 경계하며 안양 공주를 쳐다봤다.

‘무슨 큰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 안양 공주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부황, 아신이 궁 입구에서 정 수찬을 마주쳤는데요.”

창경제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정 수찬?”

‘제길, 정말 큰일이 기다리고 있었군! 딸이 눈이 높아졌구나. 면수를 기르다 보니 평범한 사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아 장원랑이 마음에 든 것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주홍희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대공주와 황상께서 동시에 장원랑을 마음에 두신 건가? 이런 소란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은데!’

“부황, 정 수찬이 입궁하여 육황자에게 강서를 하고 있다던데요? 그는 그저 수찬 아닙니까. 시독이나 시강도 아닌데, 그리 젊은 자가 육황자를 다룰 수가 있습니까…….”

안양 공주가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자 창경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중점만 말하거라!”

안양 공주는 가슴이 철렁해 외쳤다.

“아신, 정 수찬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창경제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그는 한참 뒤에야 겨우 한 글자를 내뱉을 수 있었다.

“응?”

“부황―”

안양 공주가 창경제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부황께서 정 수찬을 아신의 부마로 삼게 해주신다면, 앞으로 절대 면수를 기르지 않겠습니다. 신심을 닦고 교양을 쌓아서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

창경제는 가까스로 딸을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부마?”

‘면수가 아니라니 왠지 안심이 되지만,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안양 공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당연히 부마지요. 정 수찬 같은 인물을 면수로 삼을 수야 있겠습니까? 아신이 그러고 싶다고 해도 부황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창경제는 주홍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 수찬 같은 우수한 인물은 사위로 삼아도 좋지.’

하지만 아쉽게도―

“짐이 듣기로는, 정 수찬은 이미 정혼했다더구나.”

“아신도 알고 있습니다. 충정후부의 큰아가씨이지요.”

안양 공주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하지만 부황, 부황의 딸인 제가 다른 집 규수들보다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어찌 다른 집 규수는 장원랑에게 시집갈 수 있고, 부황의 딸인 저는 커다란 공주부를 지키며 홀로 여생을 보내야 한단 말입니까?”

‘일리 있군!’

창경제는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고 곁눈질로 주홍희를 한 번 흘겨보고는 가볍게 기침했다.

“그래도 부부의 인연을 끊을 순 없지.”

‘부부의 인연을 끊는다고?’

안양 공주의 눈이 커졌다.

‘황가는 부부의 인연을 끊느니 마느니 하는 말 할 자격이 없지 않나? 황조부께서는 조카며느리를 황궁에 억지로 넣으셨는데!’

“부황, 요즘 세상은 예전과 달리 퇴혼이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답니다.”

안양 공주는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기침했다.

“아신이야말로 가련하지요. 그때 분명 부마를 은애하지 않았으면서도 시집을 갔으니까요. 거기까진 괜찮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자식들을 키우고 서로 공경하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년도 되지 않아 부마가 떠나버렸고, 아신 홀로 외롭게 거대한 공주부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주홍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공주 전하, 공주부가 큰 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진작에 말씀하셨어야지요! 공주부를 지을 때, 규격을 한참 초과해도 아무 말도 않으셨지 않습니까.’

주홍희는 안양 공주가 불쌍한 척을 하는 게 아니꼬웠지만, 창경제의 마음은 아파왔다.

안양 공주를 신분이 낮은 자에게 시집을 보낸 것에 대해선 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안양 공주의 생모인 덕비(德妃)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창경제는 안양 공주를 덕비의 처가 조카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었다.

안양 공주와 그 사촌동생은 서로를 연모했지만, 북제(北齊)가 침략했을 때 창경제는 신심(臣心)을 사기 위해 장녀를 위원(威遠) 장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덕비의 조카는 학업을 그만두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었고, 3 년 후 안양도 부마를 잃게 되었으니…….

“안양, 돌아가거라. 이 일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자 안양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얌전하게 대답했다.

“아신은 부황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안양 공주가 웃으며 뒤돌아섰다. 푸른색의 넓은 치마는 공중에서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부황, 아신이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전 안이 조용해졌다.

“황상―”

주홍희가 외쳤다.

그러자 창경제가 손을 내저었다.

“너도 우선 물러나거라. 잠시 조용히 있고 싶구나.”

* * *

정미는 정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정일헌으로 향했다.

‘예전에 오라버니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오라버니의 마음을 안 뒤로도 그걸 진심으로 여기면 나만 힘든 거 아니겠어? 지금 오라버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놔야 해. 내년 봄에 올케언니가 오면, 지금처럼 정일헌을 찾아오지 못할 거니까.’

정미는 아무렇게나 꺾은 버드나무 가지를 쥐고 사뿐사뿐 걸어 들어갔다.

“둘째 오라버니―”

정철은 이미 창문으로 아름다운 소녀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았지만, 반사적으로 온몸이 긴장되어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미미가 정일헌에 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황당한 밤이 떠올라. 차라리 어디든 다른 곳이라면 미미와 함께 있어도 그나마 편안할 수 있을 텐데.’

정미는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철의 뒤에서 버드나무 가지로 그의 목을 간질였다.

부드러운 버드나무 가지는 얽히고설킨 감정처럼 정철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정철은 급히 뒤돌아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미, 돌아왔구나. 들었어. 태자비마마와 황손 모두 평안하시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고생 안 했어.”

정미가 봄날처럼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큰언니가 무사히 아이를 낳아서 정말 너무 기뻐.”

악몽 속의 장면 하나하나가 정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정미는 지난 일 년 동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도 홀가분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작은 숨은 돌릴 수 있었다. 가장 가깝고 의지하는 사람 앞에 있으니 정미는 이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정미가 정철의 손을 붙잡았다.

“오라버니는 모르지. 난 지금 너무 기뻐.”

정미는 진심이 담긴 말투로 긴 눈을 반짝이며 정철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기쁨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 속에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철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아냐, 알 수 있어.”

“오라버니는 기쁘지 않은 거야?”

정미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몰래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또 심술을 부리네.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정아가 무사히 출산하자, 정미는 많이 안심되었는지 마음가짐마저 조금 달라진 상태였다.

“당연히 기쁘지.”

정철은 왠지 정미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날 밤, 미미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는 확실히 미미에게 남녀의 정을 느꼈어.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미미에게 태연자약하게 굴 수 없어졌고.’

정미가 손을 뻗어 정철의 뺨을 꼬집었다.

“그럼 왜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어? 고지식한 노인네처럼. 예전엔 내게 이렇게 대하지 않았잖아.”

정미의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말 때문인지, 정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허둥대며 꾸짖었다.

“왜 함부로 사람을 건드려?”

정미는 억울한 듯 입술을 오므렸다.

“오라버니, 변한 것 같아.”

정철은 마음이 아파와 정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정미는 눈을 들어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긴 속눈썹을 살짝 떨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곧 아내를 맞이해야 하니까, 그래서 내게 소원하게 대하는 거지?”

“나는―”

정철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순간이 있구나. 됐어, 그냥 미미가 이렇게 생각하게 두자. 그럼 앞으로 이상한 꾀를 못 부리겠지. 그렇게 되면 그런 후회막급한 일도 다신 없을 테고.’

정미는 그를 한 번 흘겨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실 그럴 필요 없어, 오라버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걸. 오라버니가 혼인한 뒤엔 내 혼사를 알아보실 거라고. 오라버니,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야 좋을 것 같아?”

정미는 정철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지자 갑자기 놀릴 기분이 사라져 마음 아파했다.

그저 정철이 질투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막상 그런 모습을 보면 기쁨은 찰나일 뿐 마음속엔 상처만 남게 되고 말았다.

‘우린 왜 함께할 수 없는 걸까? 왜 하필이면 둘째 오라버니인 거냐고…….’

따지고 싶어도 따질 사람이 없었고 마음속 가득한 기쁨과 애정은 평생 가슴 속에 썩혀 두어야만 했다.

정미는 급히 눈을 내리깔아 눈물을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