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선생
한편, 정철은 최근 조금 짜증이 난 상태였다.
궁에 자주 들어올 수 있으니 미미와 약간은 가까워질 수 있긴 했지만, 육황자 같은 말썽꾸러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벼루 안에 바퀴벌레를 넣거나 의자 위에 풀을 발라놓는 건 둘째치고, 오늘은 탁자 위에 바늘을 세워놓기까지 했다. 만약 주의하지 못하고 책상에 손이라도 올렸다면 피가 철철 흘러 며칠 동안은 남서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들고 낭독하기 시작했다.
“혼돈초개(*混沌初開: 천지가 처음으로 개벽하고), 건곤시전(*乾坤始奠: 천지음양이 정해지니)…….”
책을 읽을 때 일부러 위엄을 부리는 나이 많은 선생들과는 달리 정철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운율이 있어 아주 귀에 잘 들어왔다. 그러나 황자의 눈은 뱅글뱅글 돌더니 바늘이 세워진 곳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정철의 말은 한 글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철은 일부러 이 장난꾸러기들을 놀리기 위해 서책을 들고 이따금 바늘이 세워진 곳을 스쳐 지나갔다.
정철의 행동에 몇몇 장난꾸러기들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모습을 보고 또 맥이 빠졌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한바탕 싸우는 것보다 더 지친 기분이 들었다.
육황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옆 책상의 반독(*伴讀: 옛날, 귀족이나 부호 자제의 독서 친구)에게 책문했다.
“도대체 잘 놓은 게 맞느냐.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반독은 가슴을 내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잘 놓았습니다. 열 개나 놓았는걸요. 전하께서도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육황자는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잘 세워놓지 못해 쓰러진 거 아닌가?”
이때, 정철이 눈을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육황자를 한 번 훑어봤다.
육황자는 멈칫했다.
‘설마, 들킨 건가?’
육황자는 잠시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입을 실쭉거렸다.
‘들켰으면 뭐 어때. 다른 선생들처럼 울며 부황을 찾아가 사직을 청할 수만 있겠지. 황자인 나를 어찌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이 선생은 수염이 북실하던 전 선생들보다 꽤 마음에 드는데, 거치적거리지만 않으면 그냥 남겨둬도 되겠어.’
육황자는 자신에게 화가 나 그만뒀던 선생들을 떠올렸다.
‘공부하기 싫은 내게 책을 외라 강요하고, 억양이 다르면 하루 종일 귀찮게 굴고. 정말 짜증 나!’
그때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육황자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벌 일고여덟 마리가 무리를 지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황자가 손을 뻗어 반독을 꼬집었다.
“벌이 왜 저렇게 커?”
‘교단 위에 꽃가루 뿌렸으니 이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 벌들은 내가 봤던 벌들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반독도 말벌과 꿀벌의 차이를 알지 못했기에 눈을 끔뻑거리다가 추측해보았다.
“아마 어화원의 꽃이 더 아름다워서 벌이 더 큰 것 아닐까요?”
황자는 반독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벌들의 윙윙대는 소리는 아주 컸기에 왠지 조금 겁이 났다.
말벌은 무리를 지어 들어왔다. 이는 다른 어린 소년들의 눈에도 띄었다.
그중 나이가 조금 많은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저, 저건 말벌이잖아. 쏘이면 죽는다고! 우리 집에 어떤 마부가 우리를 데리고 답청을 갔다가 저런 말벌에게 쏘여 죽었단 말이야!”
이 말에 모든 아이들이 겁을 먹기 시작해 서재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황자가 공부하는 곳은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수업을 하는 선생을 제외하곤 내시든 궁녀든 아무도 서재에 들어올 수 없었다. 때문에 지금 서재 안의 성인은 정철뿐이었다.
맞은편 창문 밖에 서 있던 창경제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정철을 쳐다봤다.
“움직이지 말거라!”
정철은 아무렇게나 책을 내려놓고 맹렬한 기세로 날아다니는 말벌을 본체만체하며 그 말벌을 알아본 아이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워선 안 된다. 규율을 어기는 아이는 나가서 벌을 세우겠다.”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조급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곧바로 줄행랑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서재 입구는 선생과 가까이 있었고, 말벌은 선생의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육황자가 소리쳤다.
“스승님 말을 들어. 모두 움직이지 말거라! 말벌들이 스승님께로 날아가고 있는 거 안 보여?”
이 말에 어린 소년들은 기적처럼 조용해졌고, 모두 꿈쩍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한마음 한뜻으로 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벌들아, 제발 스승님만 쏘고 가버려. 나는 절대 쏘면 안 돼!’
정철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런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니, 참으로 영광스럽구나!’
창밖 창경제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작은 망나니 같으니라고. 꽤…… 총명하군. 하지만 장원랑의 잘생긴 얼굴이 벌에 쏘여 엉망이 되는 건 아쉽지 않겠는가?’
창경제는 조용히 손을 내저어 주홍희에게 사람을 불러오라 시키면서도 시선은 정철에게 꽂혀있었다. 그리고 정철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재 안의 소년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저 말벌이 대열을 이루어 선생에게 날아가는 걸 보며 멍했다. 어떤 겁이 많은 아이는 이미 입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말벌이 정철의 코앞까지 날아왔을 때, 그는 그제야 책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느새 무리를 이끌던 말벌이 벽에 박혀있었다.
정철이 손가락을 몇 번 더 움직이자 말벌은 모두 사라졌고, 소년들은 말벌이 사라지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벽에 박혀있는 말벌들을 보고 놀라 숨을 들이켰다.
창경제도 마찬가지로 멍해졌다.
벽의 말벌들은 ‘文(문)’자로 박혀있었다.
“됐다. 계속 읽도록 하자꾸나.”
정철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자 그 맑은소리는 서재 안 정적을 깨트렸다.
“스, 스승님, 법술(法術)을 부릴 줄 아십니까?”
“아니.”
정철이 환히 웃었다.
“대신 바늘로 뭔갈 찌를 때 조준력이 좋은 편이지. 아, 방금 어디까지 읽었더라? 육황자, 읽어보거라.”
육황자는 벽에 박힌 말벌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의 선생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숨을 들이켜고 책을 들어 더듬거리며 읽기 시작했다.
“삼황위황(*三皇爲皇: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이 삼황(三皇)이고), 오황위제(*五帝爲帝: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이 오제(五帝)이다.)…….”
‘흑흑흑, 역시 아름다운 것일수록 위험하다는 모비의 말씀이 맞았어! 이 스승님은 너무 무서워. 예전 스승님들을 다시 불러오기엔 너무 늦었나?’
* * *
주홍희가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자, 창경제는 손을 내젓고 뒤돌아 떠났다.
물론 어화원에 어찌 말벌이 나타났고 어떻게 황자가 공부하는 서재까지 날아 들어왔는지는 당연히 철저히 조사할 생각이었다.
창경제가 가진 장원랑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장원랑이 무술도 할 줄 아는 건가? 역시 내 안목이 좋군. 그때 탐화랑으로 지명했으면 억울할 뻔했어.’
주홍희는 눈치가 빠른 자였기에 창경제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황상, 이번엔 안심하실 수 있겠습니다. 정 수찬은 문무겸전한 자이니 육황자께서도 앞으로 분명 열심히 공부하실 겁니다.”
“음.”
창경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정 수찬이 정 소첨사(少詹士)의 양아들 아니던가?”
주홍희는 창경제의 눈에 든 사람들의 배경과 내력을 꿰뚫고 있었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정 소첨사가 부임 도중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먼 친척집에서 양자로 들인 아들이 바로 정 수찬입니다.”
“오, 역시 청출어람이로구나. 정 소첨사가 복이 많군.”
창경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담담하게 말했다.
주홍희는 의아했다.
‘황상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방금은 분명 괜찮으셨는데, 왜 갑자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시지?’
눈치 빠른 주홍희도 지금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창경제의 기분은 보이는 것처럼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의 큰아들도 어릴 적 학문과 무예 모두 스승들의 칭찬을 받아왔고 분명 문무겸전한 청년으로 클 거라 기대했지만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요절했고, 다섯째 아들은 열두 살이 되었지만 아직 눈에 띄는 재능은 없었으며, 여섯째 아들은 더 이상 스승을 놀려 그만두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태자는―
창경제는 태자에게 늘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이 어미를 닮은 건 결점이 아니었지만, 태자의 외모는 지나치게 고왔다. 나중에 위엄이 부족하여 궁의 늙은이들을 제압하지 못할까 봐 늘 걱정이 되었다.
‘완벽한 아들이 없는 건 정말 한탄스럽구나. 그런 아들들은 왜 늘 다른 집안에만 있을까? 됐다, 그만 생각해야지.’
창경제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집안의 아들이 아무리 훌륭하든 간에 어쨌든 내 아들을 위해 일할 테니.’
이렇게 생각하니, 창경제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한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홍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황상께서 정 수찬을 만난 후, 왜 저녁에 합방할 패(*황제가 합방할 비빈을 고르는 방식)를 뒤집을 때보다 기분이 왔다 갔다 하시는 걸까?’
씁―
주홍희는 찬 숨을 들이켰다.
‘정 수찬은 덕행이 높은 자제이며 용모도 출중하지. 설마 황상께서?’
주홍희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창경제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창경제도 그를 힐끗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
주홍희는 깜짝 놀라 급히 대답했다.
“폐하, 목마르지 않으십니까?”
“괜찮다.”
창경제는 오늘 주홍희가 왠지 조금 우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볍게 기침하고는 물었다.
“정 수찬은 혼인했는가?”
주홍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충정후부의 적장녀와 정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충정후부의 적장녀?”
창경제는 잠시 중얼대더니 그제야 떠오른 듯 말했다.
“기억나는구나. 작년 성수절(*聖壽節: 태후의 생일)에 충정후 부인이 어떤 아가씨를 데리고 와 태후의 탄신일을 축하했었지. 그 아이가 적장녀인가?”
주홍희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폐하, 기억력이 정말 좋으시군요. 소인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겠습니다.”
창경제는 목을 가다듬고 심오한 표정이 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방 안 가득한 미인들 중에 갑자기 그저 그런 평범한 얼굴이 나오니 인상이 깊었던 것이지.’
“그 충정후부의 적장녀는―”
창경제는 별로 용모가 출중하지 않다고 말하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여인은 덕행을 더 중시해야 하는데 황제가 아가씨의 외모를 함부로 평가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해 말을 삼켰다.
‘정말 아쉽구나.’
창경제는 짧게 한숨을 쉬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 * *
정철은 반나절 동안만 강독했다. 점심은 남서재에서 제공해서 그는 식사를 마친 뒤, 그제야 물건을 정리하고 내시를 따라 출궁했다.
궁 입구, 안양 공주가 놀라고 기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이런 우연이 있다니?”
“소신,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정철의 무덤덤한 모습에 안양 공주는 왠지 양심이 찔려 설명했다.
“오랫동안 입궁하지 않아 오늘 부황께 문안 인사를 올리러 왔네. 그런데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정철에게 길을 안내하던 내시는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남서재는 건청전(乾淸殿)의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 시간에 황상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입궁한 데다가, 여기서 마주치기까지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그럼 소신은 공주 전하의 시간을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정철은 안양 공주에게 깍듯이 웃어 보이고는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틈을 타 떠났다.
정철의 긴 다리는 걸음이 아주 빨라서 내시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가까스로 그를 따라잡아야 했다.
안양 공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찌 이럴 수 있어!”
안양 공주는 발을 동동 굴리다가 어쩔 수 없이 소매를 뿌리치고 양심전(養心殿)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