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29화 (229/375)

229화. 얼굴을 보다

정아는 복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 극심한 고통이 전해져오더니 아래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콸콸 흐르는 게 느껴져 절로 비명을 질렀다.

“큰일이다, 양수가 터졌어!”

‘끝났어!’

정아는 눈을 감았다.

출산이 두렵고 불안했던 정아는 진작에 정미에게 출산 시의 상황을 여러 번 물어봤다.

정미는 만약 양수가 터지고 아이가 막혀 내려오지 못한다면 질식사로 죽을 거라 했다.

정아가 실의에 잠겨있을 때, 귓가에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명이 아닌 기뻐서 놀라는 소리였다.

“어, 바뀐다. 바뀌었어!”

정아는 ‘바뀌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어느 산파가 정아의 귓가에 크게 외쳤다.

“마마,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힘을 주셔야 해요. 지금 아까보다 상황이 좋아졌어요. 분명 두 분 다 무사하실 겁니다!”

정아가 눈을 번쩍 떴다.

‘정미가 준 부수의 효과인가?’

절망에 빠진 정아에게 기댈 버팀목이 생기자 그녀는 큰 용기를 내어 힘을 주었다.

“나왔다, 나왔어!”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정아는 어느 산파의 거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태자비마마, 감축드리옵니다. 황손이옵니다!”

‘정말 황손이었구나…….’

“아…… 아이를 내게 안겨주거라…….”

정아는 애써 눈을 떠 아이를 한 번 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약접은 문틀을 꽉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소진 도사는 굳은 표정으로 동궁에 도착하자마자 태자비가 무사히 황손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 * *

태평 25년 7월 28일, 태자비가 황장손을 출산하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직접 ‘훤(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아는 정미가 다음 날 이른 아침 황궁을 떠날 때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미는 용을 조각한 것과 봉황이 그려진 복도의 백옥 기둥, 처마 밑 바람에 흔들리는 금홍색 궁등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뒤돌아서자, 마음이 한결 가벼우면서도 조금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언니와 아이 모두 지켜냈어!’

정미가 계단 아래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을 때, 뒤에서 누군가 작게 외쳤다.

“셋째 아가씨, 잠시만요.”

정미가 뒤돌아서자, 연아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급히 달려왔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있었다.

“연아?”

정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연아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품에서 아주 작은 보따리를 꺼내 건넸다.

“셋째 아가씨, 오늘 아침에 궁을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소인이 드리는 선물이에요.”

“그럴 필요 없―”

어리둥절하던 정미가 거절하려 하자 연아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셋째 아가씨, 소인의 골칫거리를 치료해주셨는데 소인에겐 보답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이건 소인의 아주 작은 성의입니다. 꼭 받아주세요.”

정미는 연아의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고 보따리를 열어보며 웃었다.

“그럼 고맙게 받을게, 연아.”

보따리 안에는 비단으로 만든 산당화 조화가 들어있었다. 담홍색의 꽃잎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고, 중간의 연노란색 꽃술은 꽃가루가 묻어있는 것만 같아 진짜처럼 보였다.

정미는 정아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조화를 한 상자 받았었지만, 일개 소궁녀가 준비한 것 치곤 아주 성의 있는 선물이었다.

정미는 방긋 웃으며 조화를 아무렇게나 머리에 꽂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마음에 들어.”

연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이만 소인은 아가씨의 시간을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소궁녀는 기쁜 얼굴로 뒤돌아가서 복도 기둥 뒤에 있는 사람을 휙 밀쳤다.

“더 망설였다간 아가씨께서 정말 가버리실걸.”

기둥 뒤의 소궁녀 몇 명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다 같이 우르르 몰려와 정미를 둘러쌌다.

정미의 손엔 눈 깜짝할 새 많은 물건들이 쥐어졌다. 채 다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선아라고 불리는 소궁녀가 쭈뼛대며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바구니를 건넸다.

“셋째 아가씨, 소인에겐 드릴만 한 물건이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걸로 선물을 담아가세요.”

정미는 바구니를 들고 웃으며 바깥으로 걸어가다가 장춘궁 대태감 등안의 옆에 서 있는 정요를 보고는 정색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등 공공(公公).”

정미는 등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정요 쪽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등안이 길을 안내하며 설명했다.

“소 아가씨께서 백부에 잠시 머물고 싶다고 하셔서 마마께서 소인에게 두 아가씨를 함께 데리고 돌아가라 명하셨습니다.”

정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 정요가 황궁을 떠나 백부에서 지내려고 한다는 게 수상쩍게 느껴져 그제야 정요를 한 번 쳐다봤다.

정요는 습관적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속엔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었다.

태자는 정요를 취한 뒤 더욱 제멋대로 행동했다. 장춘궁에 오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늘 정요를 데리고 아무 외진 곳으로 가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 한 번은 귀비가 있는 곳에서 감히 정요의 치마 안으로 손을 뻗은 적도 있었다.

정요는 남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몇 번의 관계 후 본인도 재미를 느끼긴 했지만, 태자와 달리 정요는 이 상황을 들켰을 때 결과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정요에겐 백부로 잠시 피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요와 정미는 각기 다른 마음으로 침묵 속에 가마에 올라탔다.

정요와 동승하게 된 정미는 답답한 기분에 창발 귀퉁이를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저 눈에 띄는 청색 차림은 분명 둘째 오라버니잖아!’

정미는 급히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보았지만 정철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큼큼.”

가마 옆에서 걷고 있던 등안이 작은 기침 소리를 내었다.

정미는 어쩔 수 없이 창발을 내려놓았고 의혹을 가득 품은 채 백부로 돌아갔다.

* * *

백부에 들어서자마자 맹 노부인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태자비와 황손은 어떻더냐?”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하며 황손의 몸무게는 6근 8냥입니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늘이 도우셨구나.”

맹 노부인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정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하늘이 도운 적이 어디 있다고?’

“태자비께서 출산하셨으니 몸조리를 잘해야 할 시기일 터. 그런데 왜 벌써 출궁한 것이냐?”

정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요가 말을 이었다.

“귀비마마께서 태자비마마의 출산이 곧이니 미 동생이 동궁에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다고 하셔서, 원래 오늘 출궁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맹 노부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보아하니 분명 정미가 귀비마마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군.’

“그럼 소야 너는?”

정요가 웃었다.

“소야는 이모할머님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귀비마마께 백부에 며칠 머물게 해달라 부탁드렸지요.”

맹 노부인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잘 왔다, 잘 왔어. 다른 곳에 갈 필요 없이 이모할머니와 함께 염송당에서 머물자꾸나.”

“그럼 번거로우시겠지만 잠시 부탁드릴게요, 이모할머님.”

‘쇄옥거. 그곳은 반보도 내디디고 싶지 않아.’

정미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입꼬리가 올라갔고 이 기회를 틈타 물러나겠다고 했다.

맹 노부인은 눈짓으로 허락했다. 그 모습이 좀전의 다정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냉정했다.

정미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맹 노부인의 태도가 왜 변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화를 내기조차 귀찮아져 발걸음을 떼어 이연원으로 향했다.

한 씨 또한 정미를 보자마자 이것저것 물었기에 정미는 하나하나 대답한 뒤 되레 물었다.

“어머니, 제가 출궁할 때 우연히 오라버니를 본 것 같은데, 오라버니는 한림원에서 일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이른 아침부터 입궁한 거예요?”

한 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사내들의 바깥일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은 집안사람 모두가 알고 있지. 며칠 전 황상께서 육(六)황자에게 강서(*講書: 옛글의 뜻을 강론함)할 사람으로 네 둘째 오라버니를 친히 지명하셨다.”

어린 황자에게 강서하는 건 별일 아니었지만, 성상이 직접 칙명했다면 의미가 조금 달랐다.

정미는 황궁이 왠지 싫었기에 한 씨의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황자들에겐 이미 스승이 있지 않나요? 그리고 한림원의 시독(侍讀)이나 시강(侍講)도 있는데, 왜 하필 둘째 오라버니예요?”

한 씨는 정미를 살짝 때리며 꾸짖었다.

“어찌 그리 말을 함부로 하니?”

한 씨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설명했다.

“태자와 이미 왕에 봉해진 대황자를 제외하면, 황궁엔 오(五)황자와 육황자 둘 뿐이지 않으냐. 육황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놀기만 좋아해서 얼마나 많은 스승이 화가 나 떠났는지 모른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황상이 네 둘째 오라버니더러 사흘에 한 번씩 입궁해 강서를 하라고 하신 게다.”

“오라버니의 학문이 뛰어나서요?”

정미는 여전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량은 학문을 중시했기에 학식과 이력 모두를 갖춘 대유(*大儒: 학식이 높은 자)도 적지 않았다.

‘장원도 둘째 오라버니만 급제한 게 아닌데, 왜 하필 둘째 오라버니인 거지?’

한 씨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둘째 오라버니는 장원랑이니, 학문은 당연히 뛰어나지. 하지만 장원에 급제한 사람은 그리 적지 않아. 굳이 네 둘째 오라버니가 칙명 된 이유는…… 큼큼, 황상께서 친히 말하시길 네 오라버니의 용모가 출중하니 육황자가 말을 좀 더 잘 들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더구나.”

창경제가 실제로 했던 말은 당연히 이리 솔직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며칠간 백부 입구에 어슬렁거리는 처녀들과 젊은 부인이 많아졌다.

장자와 장녀가 이리 승승장구하니, 어미인 한 씨가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한 씨는 푸른색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고 온몸이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정미는 어안이 벙벙했다.

‘황상께서도 얼굴을 보시다니! 이거 더 걱정이 되는데 어떡하지?’

* * *

창경제는 적장손을 얻어 기분이 매우 좋았다. 심지어 조정에서 몇몇 노신들이 서강(西姜)과 무역을 개통할 것인지 논쟁하느라 창경제의 수염에 침방울이 튈 뻔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창경제는 조정에서 나온 후, 내궁(內宮)에 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 남서재로 향했다.

남서재는 황자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다.

황제는 그곳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조금 아파 왔다.

태자와 평왕을 제외하면 그에겐 불쌍한 두 황자 뿐이었다. 오황자는 열두 살이고, 육황자는 이제 막 일곱 살이 되어 둘은 함께 공부할 수 없었다. 황제는 둘을 나눠 각각 나이가 비슷한 황가의 친척들, 그리고 조정 중신의 자손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오황자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육황자는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그 때문에 화가 나 그만둔 태부(太傅)가 8명이나 되었다. 심지어 성미가 사나운 어떤 태부는 삿대질을 해대며 욕을 해대기까지 해서 황제는 정말 창피했다.

남은 선생들은 모두 성실한 자들이었지만, 창경제는 이런 선생들이 육황자의 성정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작은 망나니가 뭔갈 배울 수 있으리라곤 기대조차 할 수 없던 것이다.

이번 장원랑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스승의 얼굴이 잘생기기라도 하면 그 작은 망나니도 조금은 집중하지 않겠는가?

창경제는 호기심 반, 무료함 반의 마음으로 대태감 주홍희(朱洪喜)와 함께 남서재 근처를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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