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최산(催産)
식사 후 정아의 휴식 시간이 되었고, 정미가 자리를 떠나기 전 작게 말했다.
“큰언니, 출산하실 때 일이 잘못되면 제가 드린 도자기 병 안의 부수를 드셔야 해요.”
정미는 정아가 출산할 때 산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리 부수를 준비해 정아에게 챙겨주었다. 궁에서 쫓겨나 속수무책인 것보단 최선의 대처였고, 정아가 말을 따라주기만 한다면 출산 때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 터였다.
정아의 대답을 들은 뒤, 정미는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졌고 바람은 잔잔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궁전은 고요했지만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정미는 고개를 들어 비첨(*飛檐: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인은 이 황궁에 들어온 순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정미는 눈을 돌려 꾹 닫힌 방문을 쳐다봤다.
‘큰언니도 참 운이 나쁘지. 몇 년 일찍 태어난 탓에 평생을 이 무서운 새장에 갇혀있어야 한다니. 여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언니를 지켜주는 것밖에 없겠어.’
* * *
문밖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정아는 한숨을 쉬고는 궁녀에게 휘장을 내려달라 한 뒤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도저히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아기가 정말 곧 태어나는 걸까?’
정아는 기쁨과 걱정이 교차했으나 몸을 뒤척이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태의들이 여기로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산파들도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닌데, 출산 때 쓸 물건들은 빈틈없이 준비되어 있겠지?’
최산에 대한 일을 드러내선 안 되었기에, 정아는 이 고민들을 마음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높게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심한 고통을 느낀 정아가 신음소리를 냈다.
“태자비마마, 왜 그러세요?”
밖에서 지키고 있던 약접이 휘장을 걷어냈다.
정아가 창백한 얼굴로 배를 감싸며 말했다.
“복통이 느껴지는구나. 어, 어서 산파를 불러오거라!”
약접은 대궁녀였기에, 정아의 말을 듣고 당황하긴 했지만 재빨리 행동했다.
“소인이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궁 안은 순식간에 분주해졌고 태자비가 출산하려 한다는 소식은 곳곳에 퍼져나갔다.
* * *
장춘궁 안, 화 귀비는 그 소식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8월 초에 출산한다지 않았느냐. 어찌 벌써 진통이 온다는 게야?”
시종들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등안, 가서 태자비의 진통 소식을 태자에게 알리고 본궁 대신 동궁으로 가 상황을 살펴보게. 문제가 있으면 얼른 돌아오고.”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대답한 사람은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내시였고 수염 없는 하얀 얼굴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그는 화 귀비의 심복이자, 장춘궁의 총관 태감 등안이었다.
태자가 등안과 함께 동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반 시진이 지난 뒤였다.
산실의 방문이 수시로 열리고 닫히며 궁녀들이 드나들었는데 모두가 긴장한 표정이었다.
태자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산실 밖 복도에서 서 있는 정미를 발견하여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정미, 어찌 여기 있느냐?”
정미는 태자를 보자 조금 머리가 아파 왔으나 예를 갖추며 말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신녀는 태자비마마가 걱정되어 여기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자가 웃었다.
“그대는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으니 원래는 산실에 가까이 가선 안 되네. 자, 본궁과 바둑이나 한판 두지. 무슨 일이 있으면 궁인이 와서 보고할 테니.”
정미의 표정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바둑? 아내가 안에서 출산을 하고 있는데, 이 사내는 바둑을 둘 기분이 드나? 그래, 이 사내는 태자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이 사내의 아이를 낳으려고 줄 서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
“신녀는 바둑을 잘 두지 못합니다. 게다가 마마가 마음에 걸려 바둑에 집중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태자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본궁도 강요하지 않겠네. 듣자 하니 내일이면 출궁해야 한다던데, 앞으로 자주 궁에 와서 놀도록.”
정미는 아무렇게나 대답하고는 산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자는 일주향(*약 30분) 정도를 서 있다가 조금 견디기 힘들어 서재로 돌아갔다.
또 한 시진이 지나자, 산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다. 아이 발이 먼저 보여!”
산실 안의 산파는 모두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었다. 받아본 수많은 아이들은 머리가 먼저 나오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엉덩이가 먼저 나왔으며, 또 무릎이 먼저 나오기도 했다. 자주 보이는 일고여덟 가지 상황 중, 가장 위험한 건 발이 먼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자세의 태아는 산모와 함께 사망할 가능성이 컸다.
산실 안의 모든 산파가 당황하여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분은 태자비이시다. 사고가 나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순장 당할지도 몰라!’
“이, 이걸 어쩌면 좋지요?”
나이가 젊은 편인 산파 하나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가장 침착해 보이는 산파가 그 사람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태자비를 위로했다.
“태자비마마, 당황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버텨주셔야 순산할 수 있습니다.”
정아는 이미 창백한 얼굴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침대보를 꽉 쥐고 물었다.
“난산…… 인가?”
“조금 힘들긴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이런 상황을 수습해본 적 있으니, 마마께서 믿어주시기만 하면 황손과 마마 두 분 다 무사하실 겁니다.”
그 산파는 정아를 위로하며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보고를 올리라는 손짓을 했다.
정아는 미리 난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놓았기에 이 산파의 말이 그저 의미 없는 위로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눈을 감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역시 소진 도사의 말이 맞았어. 태위가 바르지 않았구나!’
“소진 도장…….”
정아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을 듣고 입구에 서 있던 약접이 소리쳤다.
“어, 어서 귀비마마께 보고를 올리고 소진 도장을 모셔와야 해!”
그때, 산실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큰일이야. 태자비마마께서 기절하셨어!”
* * *
“뭐라, 태자비가 난산이라고?”
화 귀비가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소진 도장을 궁으로 모시고 오거라!”
화 귀비는 말을 마친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보고하러 왔던 등안에게 말했다.
“소진 도장을 곧바로 동궁으로 모시고 가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제때 전해오게.”
“예.”
동궁은 이미 분위기가 아주 무거워져 태자마저 서재에서 나와 있었다.
정미가 약접의 옷깃을 덥석 붙잡았다.
“약접,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소진 도장을 모셔오는 건데?”
약접은 창백한 얼굴로 빠르게 대답했다.
“태자비마마께서 난산으로 기절하셨습니다. 기절하시기 직전에 소진 도장을 부르셨어요.”
정미는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큰언니, 생사의 갈림길에서 결국 본능적으로 소진 도장을 선택했구나! 아니,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죽어도 포기할 수 없어!’
정미가 달려들며 크게 외쳤다.
“들어가게 해줘. 내가 태자비마마를 깨울 수 있어. 마마께서 기절하시면 배 속의 아이도 죽게 될 거야!”
그러나 입구의 궁녀들이 정미를 꽉 붙잡았다.
“셋째 아가씨, 들어가실 수 없어요. 산파와 의녀 외엔 아무도 산실 안에 한발짝도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물을 길어 나르는 궁녀들도 산실의 바깥방에서만 기다릴 수 있었으며 모든 건 산파의 지휘를 따랐다.
“의녀?”
정미는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약접을 꽉 붙잡았다.
“약접, 네가 의녀에게 말해줘. 지금 상황에서 마마가 계속 기절해 계시면 안 돼. 침으로 찌르더라도 마마가 깨어나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네, 네. 바로 가서 전하겠습니다.”
약접은 정미의 말을 믿었다. 몇 년 동안 사촌동생 연아를 괴롭히던 월경통을 말끔히 치료해준 모습을 직접 봤으니 말이다.
“또!”
정미는 여전히 약접을 붙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가 깨어나시면 전해줘. 소진 도장은 이미 현청관으로 돌아갔고 곧바로 여기로 달려오더라도 마마와 아이가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내가 밖에 있으니, 나를 믿는다면 분명 무사할 거라고!”
약접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뒤돌아 달려갔다.
방문이 다시 닫히자, 정미는 눈을 감고 벽에 기대 침묵했다.
그때 태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와 태자비는 정말 자매의 정이 깊군.”
정미는 피곤한 표정으로 태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전하, 염려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안에 있는 사람은 이자의 아내인데, 아무리 아내에게 애정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의 존중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자의 첫 번째 적자의 안위에 관한 것인데.’
태자는 정미가 이리 용감히 물어올 줄 예상치 못했기에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당연히 염려되지. 그러나 본궁은 일국의 황태자인데 어찌 우왕좌왕할 수 있겠는가?”
정미는 태자의 차분한 얼굴을 보자 더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엔 둘째 오라버니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던 장면과 친우의 꾸짖는 소리만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게 아니라 결국 별로 신경 쓰이지 않기 때문이겠지. 큰언니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운이 좋구나. 오라버니와 함께 할 순 없지만, 우린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태자는 다정한 표정조차 지어주지 않지.’
정미는 방문을 빤히 쳐다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큰언니, 저를 한 번만 믿어주세요. 조산부(助産符)를 먹으면 앞으로 귀여운 아들이 언니와 함께하며 서로를 위하면서 지낼 거예요.’
“깨어나셨습니다. 깨어나셨어요. 태자비마마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정아가 깨어났음에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산파와 의녀들의 행동은 질서정연했지만 안색은 모두 좋지 않았다.
약접이 이를 악물고 입구에서 외쳤다.
“마마, 셋째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소진 도장께서 짧은 시간 안에 도착하실 수 없어 마마께서 기다리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가씨께서 밖에서 마마를 지키고 계시니 마마께서 믿어주신다면 분명 무사할 거라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약접은 온몸에 힘이 풀려 문틀을 잡아 겨우 일어섰다.
방금 약접의 말은 궁녀의 본분을 벗어난 것이었다. 태자비와 황손이 무사하다면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약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약접은 고개를 돌렸다. 정미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확고한 표정의 소녀가 바깥에 서 있는 모습이 훤했다.
약접은 비바람이 불던 그날 밤, 셋째 아가씨와 손을 꽉 붙잡았던 일을 잊지 못했다.
그녀는 셋째 아가씨가 평범한 소녀는 아닐 테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정미……”
정미의 이름이 들리자, 정아는 조금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정미가 있지! 정미의 부술이 소진 도장보다 뛰어나리라 믿지는 않지만, 우리 자매의 정을 믿지 않을 순 없어!’
정아는 고통을 꾹 참으며 허리춤의 염낭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렵사리 부수가 담긴 도자기 병을 쥐었지만 입가로 가져갈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약접, 약접―”
“마마, 소인 여기 있습니다!”
약접이 달려 들어왔다. 태자비가 직접 불렀기에 산파와 의녀도 막지 않았다.
“마마, 분부하실 게 있으십니까?”
“내게…….”
정아는 말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아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이…… 이 물을 내게 먹여줘.”
약접이 도자기 병을 건네받고 급히 열어 정아의 입가에 갖다 댔다. 그러자 어떤 의녀가 막아섰다.
“검사 전엔 아무거나 함부로 드셔선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 태자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먹여라!”
정아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숨을 헐떡였고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약접은 도자기 병을 꽉 쥐고 설명했다.
“이건 설탕물입니다. 마마의 체력 보충에 도움이 될 뿐, 다른 문제는 전혀 없을 겁니다!”
방 안의 사람들은 약접이 태자비에게 병 안의 물을 먹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모두의 동작이 살짝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