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임전무퇴(臨戰無退)
정미는 악몽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을 본 뒤로 부술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고, 실연의 아픔도 정아를 돌보는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로 전심전력을 다 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미는 이미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정아의 손을 꽉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언니, 태위는 분명 문제가 없어요. 이 도장께서―”
“황당무계하구나!”
그때 차가운 고함이 들려왔고, 화 귀비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언제부터 문 앞에서 듣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자비, 본궁이 소진 도장을 불러 네 상태를 봐달라 부탁했더니, 소진 도장을 이리 푸대접하는 게냐? 고작 어린 계집이 소진 도장에게 무례하게 굴도록 두다니!”
화 귀비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정아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 입을 떼지 못했다. 소진 도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마마, 진정하십시오. 그저 어린 아가씨의 철없는 말일 뿐입니다. 빈도는 스승님으로부터 부술을 배운 지 십수 년이나 되었는데, 최근에서야 골상을 통해 배 속의 태아 상태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가씨께서 믿지 않으신다면, 어의를 모셔 태자비마마의 진료를 보고 상태가 어떤지 보도록 하지요.”
태자비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고, 화 귀비는 이 적장자를 아주 중시했기에 소진 도사의 말에 곧바로 어의를 동궁으로 불렀다.
“태자비는 어떤가?”
반 시진 후, 태자비가 가장 앞쪽에 있는 어의에게 물었다.
어의가 급히 대답했다.
“태자비마마께선 건강하십니다. 그러나 태위가 어떤지는 소신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화 귀비의 안색이 좋지 않자 어의들이 분분히 맞장구쳤다.
“신등(臣等)은 무능하여, 태아가 아직 배 속에 있을 때 태위를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화 귀비가 정미를 차갑게 한 번 훑어봤다.
‘소진 도장은 최근에서야 이 기법을 쓸 줄 알게 되었다고 했고, 태의들은 태위를 판단할 수 없다고 하니, 이 셋째 아가씨가 헛소리로 소진 도장을 헐뜯으려 한 게 분명하군. ’
어의들이 물러나자, 화 귀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태자비,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아이가 황궁 안에 머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네. 내일 출궁시키도록 하거라.”
화 귀비의 말에 정미는 엄동설한에 머리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정아의 손을 꽉 잡아 말없이 애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괜히 입을 열어 화 귀비를 자극시킬 순 없었기에 자신의 큰언니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아의 팔이 굳더니 화 귀비에게 간청했다.
“모비, 제 여동생은 그저 아가씨이기도 하지만 태산과에 정통합니다. 궁 밖의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지요. 정미가 궁에 들어온 뒤로 제 몸도 한결 편해진 게 느껴집니다. 더 이상 밤에 잠을 못 이루지도 않고요. 모비, 정미가 제 출산까지 함께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화 귀비가 차갑게 웃었다.
“아직 급계도 하지 않은 어린 계집이 어찌 태산과에 정통할 수 있다는 말이냐? 제 식구라고 맹신해선 안 되는 법이지. 네 배 속의 아이는 너만의 아이가 아니라, 황상과 본궁의 황손이자 대량의 황사(*皇嗣: 황위를 이을 황태자)라는 걸 알아야지! 만약 착오라도 일어나면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정아의 몸이 떨리더니 결국 고개를 숙였다.
정미는 마음이 급해져 조용히 불렀다.
“큰언니―”
정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정미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다가 정아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암, 그래야지. 황궁엔 황궁의 규칙이 있는 법. 태자비, 사람을 시켜 물건을 챙기거라. 내일 아침이 밝으면 본궁이 등안(鄧安)에게 저 애를 모셔다드리라 할 테니.”
등안은 화 귀비의 측근 대태감이었다. 정미를 출궁시키려는 화 귀비의 마음은 확고했다.
정아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화 귀비는 그제야 옅은 웃음기를 띠며 소진 도사에게 말했다.
“도장, 본궁이 최근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니 장춘궁으로 와 본궁의 진료를 봐주세요.”
눈 깜짝할 새 방 안의 사람들이 물밀 듯이 빠져나갔고 정미와 정아 두 사람만 남아 적막이 흘렀다.
“큰언니!”
먼저 침묵을 깨트린 건 정미였다.
“숙비마마께 가서 제 증인이 되어 달라 부탁해주실 수 없나요? 제가 마마의 숨은 병을 치료해드렸으니, 제 부술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소녀의 긴 눈은 밝게 빛나다가도 상대의 침묵에 점점 어두워져 갔다.
“안 되나요? 어쩔 수 없는 건가요?”
한참 뒤, 정아가 한숨 쉬며 말했다.
“정미, 이 후궁에서 태후 외엔 아무도 귀비마마께 맞설 수 없어. 그게 내가 소진 도사를 등한시할 수 없었던 이유야.”
정미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정아의 손을 붙잡았다.
“태후! 그래요, 큰언니. 어머니께서 예전에 태후께서 어머니를 아주 좋아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태후께서 언니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가서 태후께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이런 시기에 절대 출궁할 수 없어요.”
“정미―”
정아가 천천히 정미의 손을 토닥이다가 손을 빼며 말했다.
“태후는 이미 오랫동안 후궁 일에 관여하지 않았어.”
정미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큰언니, 한번 시도는 해 봐야지요.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순 없어요.”
정아가 정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미, 태후께 부탁한다고 해도 귀비마마의 신경을 건드리게 될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오늘 소진 도장이 태위가 바르지 않다는 걸 알아내고, 미리 많은 산파와 어의를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운인걸―”
정미가 갑자기 정아의 말을 끊었다.
“큰언니, 모르시겠어요? 소진 도장이 무슨 수작을 부려서 태위를 바꾼 거라고요! 제가 그간 언니를 돌보아서 원래는 반드시 순산할 예정이었단 말이에요!”
정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정아를 빤히 쳐다봤다.
“큰언니, 저를 믿지 않으시는 거지요?”
정아는 갑자기 정미와 마주보기가 불편해 시선을 피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큰언니가 널 안 믿는 게 아니라 그저, 그저 이미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는걸.”
정아는 ‘정미 네 말이 너무 기이해서 믿기가 어려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명 여동생의 마음에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억지로 말을 바꾸었다.
“그렇지요. 이미 쏟아진 물이니, 저는 내일이면 출궁해야겠군요…….”
정미는 말을 중얼거리던 중 갑자기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하늘의 뜻인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냐고…….’
“정미―”
어린 동생의 울음소리에 정아도 마음이 아파 와 위로했다.
“울지 마. 궁 안엔 훌륭한 의원과 산파가 있고, 귀비마마께서 또 소진 도사를 모셔와 자리를 지키게 해주실 거야. 태위가 바르지 않다고 해도 꼭 난산이라는 법은 없어…….”
정미가 벌떡 일어나 번쩍이는 눈으로 말했다.
“큰언니, 바로 그 소진 도사가 있으니까 제가 안심하고 떠날 수 없는 거예요. 계속 언니를 해치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잖아.”
정아는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소진 도사는 북명진인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매의 정이 아니었다면 정아는 애초부터 정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어의도 소진 도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을 때 정아도 틀림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정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언니가 소진 도사를 믿기로 결정하다니. 이해할 순 있지만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난 큰언니뿐만 아니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모두를 지켜야 한다고!’
깊은 절망에 빠지자, 정미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큰언니,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지요. 까닭 없는 일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진심을 몰랐을 뿐이고요. 저는 죽은 부인의 아이를 받은 적도 있고, 생명이 위독한 부인과 그의 태아도 살린 적이 있습니다. 제생당 사람들 모두가 이 일을 증언할 수 있지요. 제 부술이 오랜 명성을 이어온 소진 도사만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차이 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저야말로 언니의 혈육이라는 점이지요. 언니가 평안해야 저희 가족 모두가 평안할 수 있습니다. 큰언니, 제발 저를 믿어주세요. 저를 믿으셔야만 해요.”
“나, 난 널 믿어, 정미.”
정아는 정미의 슬픈 두 눈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흐느꼈다.
정미는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아이에 관한 일이니, 어머니로서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큰언니의 이성은 사실 소진 도사를 더욱 믿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자매의 정을 이용해 큰언니를 몰아세우고 있고. 이 점만으로도 나는 이미 소진 도사에게 진 거야. 명망이 부족하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다는 점에서 졌어. 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나는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거야!’
정미는 점점 침착해져 말투가 차가워졌다.
“큰언니, 저를 믿으신다면 제 말에 따라주세요. 저는 소진 도사의 비법을 알지 못하니 지금 함부로 태위를 바로잡아 드릴 순 없어요. 하지만 언니가 출산할 때, 제가 부법을 써서 순산을 도와드릴 순 있어요. 언니의 출산일이 대략 8월 초여드렛날이고 지금은 7월 말이니, 사실 이미 만삭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분만을 촉진하는 부수를 만들 테니, 그걸 드시면 오늘 바로 출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언니가 출산하실 때 저도 아직 황궁에 있을 테고요.”
정아는 정미의 뜻을 이해했다.
‘내 분만을 촉진해서 아이를 빨리 낳게 할 생각이구나!’
정아는 거의 투명한 부수를 건네받을 때까지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정미, 이걸 마시면 오늘 바로 출산할 수 있는 거야? 아이에겐 피해가 없는 거지?”
“없어요.”
정미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미는 지금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간 정아가 위축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큰언니, 배 속의 태아는 이미 만삭이에요. 최산(*催産: 약물 따위를 써서 임신부의 해산을 쉽고 빠르게 함)을 강행한다고 해도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절로 떨어지듯 전혀 영향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찌 제 친조카를 해칠 수 있겠어요?”
정아는 정미를 마주 보았고 잔을 잡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고 나서야 마침내 결심했다.
“좋아, 마실게.”
정아는 머리를 젖히고 부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았을 땐,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정미, 대략 언제쯤 효과가 나타나?”
“두세 시진 사이에 나타나요. 큰언니, 그 전에 좀 걷는 게 좋아요. 긴장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정아는 정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아는 궁녀들을 데리고 화원에서 산책을 했다.
정아는 속으로는 몹시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다. 정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점심이 되자 궁녀들이 점심 식사를 내왔다. 하지만 정아는 화려한 진수성찬을 봐도 전혀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정미는 정아가 긴장한 걸 눈치챘지만 방 안의 궁녀들 때문에 솔직히 말할 수 없어 정아의 손을 붙잡으며 위로했다.
“큰언니, 많이 드셔야 해요. 배불리 드셔야 힘이 생기고 그래야 작은 황손도 잘 크지요.”
정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먹을게.”
정아는 고개를 숙이고 최선을 다해 밥을 먹었다. 식사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정미는 은젓가락을 꽉 쥐며 눈을 내리깔아 낙담함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