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26화 (226/375)

226화. 무정한 황실

뺨을 맞아 고개가 돌아갔던 정요가 눈을 뜨자, 태자의 눈에 분노와 살기가 스치는 게 보였다.

정요는 깜짝 놀랐다. 더 이상 득실을 비교할 겨를도 없었고 목숨을 지키는 것만이 가장 중요해졌다.

“태자 전하, 제발 이러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저는 죽게 될 겁니다―”

정요가 태자를 밀어내려 발버둥 쳤다.

정요가 발버둥 치자, 태자의 분노는 미묘한 느낌으로 뒤바뀌었다. 다른 여인의 몸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 태자는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고 정요의 몸을 세게 누르며 낮게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거라!”

정요는 놀란 표정으로 발버둥을 멈췄다. 태자는 한 손으로 정요의 입을 가리고 한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 아가씨, 소 아가씨―”

그때 멀리서 소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요는 온몸이 굳은 채 태자를 바라봤다.

소궁녀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리자, 태자는 갑자기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놓으며 사악하게 말했다.

“저 아이에게 들키고 싶다면 소리를 내어 보거라.”

정요는 차마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기에 입술을 꽉 깨문 채 태자가 제멋대로 굴도록 두었다.

“이상하다, 소 아가씨께서 분명 여기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잠깐 드실 걸 가지러 갔다 온 사이에 왜 사라지셨지?”

소궁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태자와 정요가 숨어있는 곳은 바깥에선 안쪽의 상황을 볼 수 없었지만, 안에선 틈새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태자의 각도에선 마침 소궁녀가 망연히 사방을 둘러보다가 연못가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태자는 왠지 모를 흥미가 돋아 더욱 거칠게 움직이는 것은 물론 낮은 숨소리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가산 벽이 정요의 등에 쉴 새 없이 부딪혔다. 태자의 거친 움직임에 정요는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태자는 처음 맛보는 극락에 정요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

“뭐가 그리 두려우냐. 그저 소궁녀일 뿐인데. 들킨다고 해도 물에 빠트려 없애버리면 되는 것 아니냐.”

정요의 두 눈이 커졌고 애원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 소궁녀는 화 귀비가 정요의 시중을 들라 명령하여 따라온 궁녀였다. 정요를 따라 산책하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성가실 게 분명했다.

태자는 정요가 몹시 혐오스러웠지만, 그녀의 몸은 확실히 황홀했다. 태자의 움직임이 점점 부드러워지며 물었다.

“말해 보거라. 누가 네 순결을 가져갔느냐?”

정요는 이를 악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정요는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태자는 더 이상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테고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고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정요가 대답하지 않자, 태자의 눈에는 다시 분노가 차올랐고 입으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네가 대답하지 않아도 본궁은 추측할 수 있지. 위국공 세자가 맞느냐?”

정요의 눈빛이 굳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은 태자에겐 묵인으로 느껴졌다.

태자는 화가 나 갑자기 거칠게 부딪혔다.

“괘씸하군!”

정요는 절로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바깥의 연못가에 앉아 있던 소궁녀가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

“소 아가씨, 아가씨인가요? 어디 계세요. 소인이 드실 걸 좀 가져왔어요.”

소궁녀는 찬합을 들고 가산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이쪽에서 들린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안 보이지?”

발걸음 소리가 아주 가까워지자 정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태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정요는 태자의 헐떡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커다랗다고 느꼈다.

마침내 낮은 신음이 들려온 뒤, 태자는 일어나 태연하게 복장을 정돈했다.

정요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몸을 닦고 옷차림을 정리했다. 그러자 태자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정요를 한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그녀를 확 밀쳤다.

정요는 곧바로 가산에서 밀려 나와 바닥에 넘어졌다.

“소 아가씨―”

소궁녀가 기쁜 표정으로 달려오다가 갑자기 놀란 듯 말햇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머리와 비녀가 헝클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청석 바닥에 앉아 있던 정요는 마음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황실은 무정하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앞으로 태자에게 나는 다가가기 어려운 의매가 아니라 미천한 노리개일 뿐일 거야. 어느 정도 애정이 있는 여인이라면 몰라도, 어느 사내가 일개 노리개의 생사를 신경 쓰겠는가?’

하지만 정요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몸을 맛본 사내라면, 태자도 나를 쉽게 죽이진 않을 테지. 하지만 나의 존엄성과 체면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소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랐잖아요. 소인이 바로 사람을 불러올―”

“가지 마.”

정요가 소궁녀를 덥석 붙잡았다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무릎을 끌어안고 덜덜 떨었다.

“연못가에서 뱀을 발견해서 가산까지 도망쳐오다가 놀라 기절했어.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돼. 꿀물 한잔이면 좀 진정될 것 같아.”

“여, 여기 왜 뱀이 있어요?”

소궁녀는 깜짝 놀라더니 재빨리 꿀물 한잔을 따라 정요에게 건넸다.

정요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건네받으려다가 제대로 잡지 못해 몸에 쏟고 말았다.

궁녀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닦으려 하자, 정요가 그녀를 막았다.

“그럴 필요 없어. 옷이 다 젖었으니 방으로 돌아가서 갈아입을게. 오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웃음거리가 될 테니.”

‘귀비마마가 잘 모시라고 직접 명령하셨는데, 아가씨가 이 꼴이 되다니.’

소궁녀는 두려운 마음에 급히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게요.”

두 사람이 멀어진 뒤, 태자는 그제야 가산의 틈새에서 돌아 나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본궁이 저 의매를 너무 순진하게 생각해왔구나. 속셈이 있는 여인일 줄이야. 하하, 이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야 앞으로 오래갈 수 있을 테니.”

* * *

정미는 정요가 득의만만하여 수시로 동궁에 찾아와 존재감을 과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아무 일도 없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7월 말이 되었다.

7월 말이 되자 아침과 저녁엔 날씨가 그리 덥지 않았고, 정아는 이른 아침에 자주 정원에 나와 정미와 함께 산책을 했다.

그러다 어느 맑은 날, 정미는 소진 도사와 재회했다.

소진 도사는 넓은 도포를 입고 옥관(玉冠)으로 머리를 묶고 있어 선풍도골(*仙風道骨: 선인의 풍모와 도사의 골격으로, 남달리 뛰어난 풍채를 말함) 같은 느낌이 났다. 태자비에게 인사를 올린 소진 도사는 정미를 바라보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태자비마마의 여동생이 부술에 정통하다는 건 익히 들었습니다. 오늘 마침내 만났군요.”

정미는 그 온화한 눈빛 속에서 은은한 날카로움을 느꼈다. 소진 도사의 눈빛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감히 고개를 들고 있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정아를 둘러싼 수많은 궁녀들은 이미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정아마저도 여동생의 말을 믿고, 마지막 이틀은 소진 도사가 만들어준 부수를 몰래 먹지 않았던 것에 왠지 양심이 찔려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오직 정미만이 침착하게 정아의 뒤에 서서 조용히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정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제 여동생은 그저 부술에 흥미가 있을 뿐이지요.”

소진 도사는 정미를 빤히 한 번 쳐다보고 나서야 정아의 말에 대답했다.

“마마께서 최근 혈색이 좋아 보이시는 게 영매(令妹)께서 잘 보살펴주신 덕분이겠지요. 귀비마마께서 빈도를 불러 태자비마마의 복을 기원해달라고 하셨는데,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무슨 소리십니까!”

정요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도에 어느 누가 소진 도장(*道长: 도사를 부르는 존칭)의 능력을 모른단 말입니까. 게다가 모비께서 신경 써주셨으니 본궁이 감사해야 할 일인걸요. 자, 본궁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정아는 옷깃이 당겨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 정미에게 말했다.

“정미, 정원에서 잠시 걷고 있으렴.”

황궁 안의 태후와 화 귀비까지 소진 도사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정아는 몰래 부수 복용을 중단했지만 그에 대해 말할 자신은 없었다. 여동생의 부술이 소진 도사만큼 훌륭하지 않아 그날 밀실에서 나눈 말들이 정확하지 않을까 두려웠고, 또 소진 도사가 자신이 부수를 먹지 않았음을 눈치채고 태후와 귀비에게 불리한 말을 전해 처지가 더 곤란해질까 봐 두려웠다.

정아는 태자비였지만 의지할만한 처가도 없었고, 태자의 총애도 받지 못했다.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실수를 하지 않는 방법밖엔 없었다.

정미는 정아와 소진 도사의 만남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에 그녀의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제가 곁에 있을게요.”

그러자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람들은 동전(東殿) 안으로 들어갔다.

궁녀들을 내보낸 뒤 방 안엔 정미와 정아, 그리고 소진 도사만 남았다. 정아는 침상 위에 가로로 누웠고 소진 도사가 그녀를 진찰했다.

정미는 소진 도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아의 복부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고 의심이 되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장, 왜 태자비마마의 복부를 누르시는 건가요?”

소진 도사는 아무렇지 않게 정미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설마 셋째 아가씨께선 증상에 대한 약을 처방하실 때, 환자의 상태를 진찰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상태를 진찰하긴 하지만 아혜에게서 배운 망진술의 경우 직접 손으로 만져보는 일은 드물었다.

정미는 아혜에게서 배운 망진술이 그녀만의 독보적인 기술인지 아니면 다른 진단 방법을 숨기려고 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소진 도사의 물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 도사가 태아의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부수가 있다고 큰언니를 속인 건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어.’

정미는 최소한 눈앞의 도사가 정아에게 좋은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소진 도사의 양손이 정아의 복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정아의 얼굴엔 평소처럼 아무 이상이 보이지 않자, 정미는 점점 불안해져 정아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다시 물었다.

“도장, 마마의 상태가 어떤가요?”

소진 도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태위(*胎位: 자궁 내 태아의 위치)가 바르지 않은데, 출산일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바로잡기는 힘들 것 같군요. 난산을 겪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정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가 멈추고 곧바로 정아를 쳐다보았다.

정아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잠깐!’

정미의 눈빛이 굳었다.

‘큰언니의 콧망울 색깔이 변했어. 방금 산책할 때와 달라.’

망진은 환자가 어느 질병을 앓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부의가 환자 얼굴 곳곳의 미세한 변화를 자세히 살펴봐야 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정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침마다 정아의 망진을 가장 먼저 진행하곤 했다.

정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도장,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진 도사가 고개를 저었다.

“태위는 하늘의 뜻이라,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빈도가 미리 조금 들여다보고 태자비마마가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요행입니다.”

“그게 아니에요!”

정미가 비틀거리는 정아를 부축하며 차갑게 책문했다.

“도장, 방금 저희 큰언니께 무슨 짓을 한 거죠? 왜 멀쩡했던 태위가 바뀌었냔 말이에요!”

소진 도사가 벌떡 일어나 정미를 내려다봤다.

“빈도는 골상(骨相)을 보는 것에 뛰어나 방금 독자적인 기법으로 태위가 바르지 않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아가씨, 그게 무슨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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