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태자의 분노
곧 정오가 되어,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식사하러 백부로 돌아갔다.
염송당엔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둘째 나리까지 일부러 관아에서 급히 돌아와 두 식탁이 꽉 차 아주 떠들썩했다.
정요가 과실주 한잔을 들고 정철의 앞으로 걸어갔다.
“둘째 오라버니의 뛰어난 재주는 진작에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뵙는군요. 소야가 오라버니께 한 잔 드릴게요. 앞으로 백부에서 지낼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정철은 잔을 들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후에 다시 한림원에 돌아가야 해서 술은 마실 수 없군요. 게다가 맹 아가씨께서 궁 안에 계시든 여기 안채에 계시든, 저는 신경 써드리기 어렵습니다.”
“철아―”
맹 노부인은 늘 온화하고 예의 바르던 손자가 이렇게 정요에게 창피를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급히 그를 불렀다.
정철은 맹 노부인을 쳐다보며 공손하게 물었다.
“조모님,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맹 노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관아에 가야 하니,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먼 친척 여동생과 자주 접촉할 수 없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정철을 꾸짖을만한 게 없었다.
그때 한지가 일어나 잔을 들었다.
“소, 소 동생, 의술이 출중하여 귀비마마를 구하셨다던데, 감탄스럽습니다. 제가 한 잔 드리지요.”
한지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는 그에게 다가가 건네주는 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고마워요……, 지 오라버니.”
정요는 ‘지 오라버니’라는 말을 골라, 일부러 예전과 같은 말투로 말했다. 잔을 든 한지의 손이 떨리더니 하마터면 술이 넘쳐흐를 뻔했다. 한지는 급히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켜 가까스로 추태를 면할 수 있었다.
한 씨는 화가 나 눈을 부라렸다. 만약 백부 사람들 앞이 아니었다면, 신발 밑창으로 저 눈꼴 시린 조카를 두들겨 팼을 것이다.
정미는 오히려 이를 본체만체하며 태연히 식사했다.
‘어떻게 하든 간에 막을 수 없는 일이야. 지 오라버니가 굳이 저 똥을 밟겠다는데, 그렇게 하라지 뭐.’
* * *
궁으로 돌아가는 길, 정미와 정요는 또 같은 가마에 탔다.
정요는 가마를 타고 올 때의 일을 벌써 잊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노부인께서 정말 온화하시더구나. 미 동생, 그렇지?”
정미는 정요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정요는 정미가 대답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 이어서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정말 재능이 출중하고 품위 있으시더구나. 그런 사람이 미 동생에게 그리 다정하게 대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래, 둘째 오라버니의 혼례일이 내년 봄으로 정해졌다지?”
정미는 무표정으로 신발을 벗어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정요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마침내 가마 안이 조용해졌다.
궁에 도착한 뒤 정미는 동궁으로, 정요는 장춘궁으로 갔다.
장춘궁 안은 아주 시원했다. 화 귀비는 새하얀 융단을 맨발로 걷다가 정요가 들어오자 아무 데나 앉아 주홍색 손톱을 매만지며 말했다.
“소야, 왔구나. 백부에서 널 푸대접하진 않았겠지?”
정요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선이 화 귀비의 발끝으로부터 올라가 그녀의 고운 얼굴에 꽂히더니 부드럽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의모님. 백부의 어른들께서 소야에게 아주 잘 대해주셨어요.”
‘회인백부의 사람들 모두가 아주 싫지만, 화 귀비의 눈엔 기댈 곳 없는 고아보단 훈귀 가문에서 받아들이는 사촌 아가씨가 더 귀해 보이겠지.’
고생을 겪고 온 정요는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화 귀비의 목숨을 구한 뒤 신세 역전에 성공했지만, 사실 화 귀비가 나를 수양딸로 삼을만한 일은 아니었어. 이들에겐 남들의 희생이 당연하게 느껴질 테니까. 귀비는 그저 나의 혼사를 이용하려는 것뿐이야. 태자가 조정에 나가 정무를 보기 시작했으니.’
정요의 시선이 화 귀비의 새하얀 발에 맴돌았다.
티끌 하나 없는 융단은 화 귀비의 가녀린 발을 더욱 새하얗게 보이게 했다.
‘그래, 황궁의 일인자만이 이런 사치를 당연하게 누릴 수 있겠지.’
정요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처녀의 몸을 잃었으니, 이런 삶은 이제 꿈도 꾸지 못할 거야.’
어려서부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계획해온 일을 이리 망쳐버렸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요는 오늘 회인백부에서 만난 한지를 떠올리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태자를 제외하면 위국공 세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최소한 내게 아주 마음을 써주니 말이야.’
화 귀비는 정요를 한 번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백부에서 정말로 괜찮았던 모양이구나.”
정요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백부의 어르신들도 소야에게 잘 대해주시고, 또래들도 다정하게 대해주었어요. 위국공 세자까지도 오늘 손님으로 와서 모두 소야에게 각별히 신경 써주셨답니다.”
“위국공 세자?”
화 귀비의 눈가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본궁이 잊을 뻔했구나. 위국공 세자는 한 부인의 조카였지.”
화 귀비는 조금 졸린 듯 우아하게 하품을 했다.
“조금 졸리구나. 소야 너도 가서 쉬거라. 만약 졸리지 않으면, 지금 장춘궁의 경치가 한창 좋을 때니 구경해도 좋고.”
“예, 물러나 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의모님.”
장춘전을 나오자, 정요는 햇살이 눈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둥근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화 귀비의 말대로 장춘궁의 경치는 무척 아름다웠다. 특히 동쪽 담 모퉁이에는 협죽도가 심겨 있었는데, 마침 한창 꽃이 필 무렵이라 분홍색 꽃과 새하얀 꽃들이 곳곳에 피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정요는 위국공부의 매화숲이 떠올랐다.
정요는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는 매화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독을 품고 있는 협죽도가 더욱 좋았다.
정요는 동궁 방향을 멀리 내다보고는 속으로 탄식했다.
‘애석하게도, 나중엔 협죽도가 아니라 그 매화숲을 지겹도록 보겠구나.’
정요는 협죽도가 심긴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소궁녀가 그녀를 막았다.
“소 아가씨, 그곳은 마마께서 가지 못하게 하시는 곳입니다. 저 꽃이 해외에서 들여온 것인데 마마의 궁에만 있다고 들었어요. 마마께서 무척 아끼시는 꽃이라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세요.”
정요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다른 곳으로 가서 좀 걸어야겠어.”
‘이 궁녀는 식견이 얕구나. 화 귀비도 협죽도에 독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가까이 가지 않아야겠어.’
정요는 방향을 돌려 아무 데나 걸어 다니다가 조금 힘들어지자 어느 가산(假山) 앞 연못가에 앉아 비단잉어를 구경하며 소궁녀에게 말했다.
“목이 조금 마르구나. 가서 차를 한 주전자 들고 오렴. 따뜻한 걸로.”
소궁녀는 급히 ‘예’하고 대답하고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형형색색의 비단잉어는 아무 걱정도 없는 듯 연못 안에서 놀고 있었다. 정요가 손가락을 뻗어 물을 튀기자, 잉어는 곧바로 도망가버렸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늘 시서와 포금을 시켜 빙수를 만들어 먹었었지. 하지만 지금은 차가운 물만 닿아도 한기가 뼈에 사무쳐서 몸 안의 한기까지 끌어올리는 것 같아.’
정요는 천천히 배를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몸 안의 한독(寒毒)은 이미 너무 심해졌어. 몸조리를 잘해서 운 좋게 회임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시집간 뒤 적어도 4-5년은 기다려야 할 거야.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부군이 전적으로 나를 지지해주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한지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까?’
정요가 고개를 숙여 연못에 얼굴을 비춰보더니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고, 정요가 소리를 지르려 하자 누군가 그녀를 세게 끌어당겨 입을 막았다. 이어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지르지 마라. 본궁이다!”
‘태자?’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듯했다. 정요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가산 뒤의 틈새에 있었다.
몹시 교묘한 위치라, 위쪽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바깥에선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정요가 마음을 가다듬고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자 전하?”
그러자 태자가 손을 뻗어 정요의 아래턱을 붙잡았다.
“천한 것, 감히 본궁을 피해?”
태자는 그 은침이 떠오를 때마다 화가 나 이를 갈 지경이었다.
그는 일국의 황태자였기에, 그의 천금 같은 몸은 어려서부터 조금의 고통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모비의 수양딸이 되었다고 내게 선을 긋고 피하려 한단 말이지?’
태자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정요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가산의 벽으로 그녀를 힘껏 밀고는 고개를 숙여 다가갔다.
정요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긴 장춘궁이야. 화 귀비가 수양딸인 내가 태자와 밀접한 관계라는 걸 알게 되면 큰일 날 텐데! 아니, 그건 당장 중요한 게 아냐. 태자는 이미 이성을 잃었어. 만약, 만약……’
정요가 격렬히 발버둥 쳤다.
“전,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전하의 의매입니다…….”
“의매?”
태자가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네 몸 중 어디 하나 본궁이 만지지 않은 곳이 있느냐? 그런데도 지금 본궁의 의매라고 말하는 것이야? 본궁에게 이런 여동생이 있을 리 없다!”
태자의 눈은 이미 충혈되어있었다. 그는 정요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냉매 향에 이미 흥분한 상태였다. 게다가 부드러운 촉감은 태자를 미치게 만들 지경이었다. 수년간 참아왔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태자는 어려서부터 승마와 궁술을 배웠기에 정요 같은 여인이 자신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음도 잘 알았다.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정요가 가산 벽 위에 완전히 기대어졌을 때, 산석을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풀렸다. 더 이상 반항할 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난 후, 태자가 손을 들더니 정요의 뺨을 내리쳤다.
“천한 것, 처녀의 몸이 아니라니!”
사람은 때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정미와 사이좋게 지낸 덕분에 서녀의 신분으로도 자주 궁에 드나들 수 있었고, 태자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지금은 귀비의 수양딸이 되어 동궁에 들어갈 마음을 접었지만, 정요는 그래도 태자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지위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사내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일수록 더욱 원하기 마련이니, 정요가 위국공 세자 부인이 되면 태자는 그런 정요에게 미련이 남을 것이고, 다른 여인과 다른 지위를 갖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요가 어찌 생각했든 간에, 태자는 대낮에 다짜고짜 찾아와 그녀의 몸을 거칠게 덮치고 있었다.
정요는 극심한 고통에 두 눈을 꾹 감았다.
‘태자에게 몸을 줄 생각은 진작에 했었지. 하지만 처녀의 몸을 잃은 뒤는 아니었다고! 수년 동안 미묘한 관계였던 여인이 이미 다른 사내에게 순결을 빼앗겼으니, 이 사내가 화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게다가 이 사내는 일국의 황태자니까!’
정요가 두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렸으나, 태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화가 나 다시 한번 뺨을 내리치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천한 것, 본궁은 네가 그 허영심 가득하고 내게 빌붙으려는 여인과는 달리 티 없이 순결한 여인인 줄 알았거늘, 지난 수년간 네가 날 놀려먹었구나! 이미 시든 꽃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니!”
태자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일국의 황태자인 내가, 다른 자가 건드렸던 여인을 원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