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24화 (224/375)

224화. 갈등

“저기 찻집이 있으니,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거절할 것이냐?”

정철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소신은 집에 급한 일이 있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안양 공주는 정철이 이리 깔끔히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바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정철은 이미 수십 장이나 멀어져 있었다.

안양 공주가 급히 쫓아가 외쳤다.

“멈춰라!”

정철이 멈춰 섰다.

안양 공주는 정철 앞으로 돌아가서 아래턱을 살짝 치켜들고 말했다.

“정 수찬(*修撰: 관직명), 내 체면을 구길 셈인가?”

정철은 마침내 눈을 들고 진지하게 공주를 쳐다보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주 전하, 어찌 이러십니까?”

안양 공주는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보통 소년랑이 아니라지. 부황의 마음에 든 장원랑이니, 진작에 내 뜻을 알아챘으리라 생각하는데.”

정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이 오고 가는 대낮에 공주가 이리 제멋대로 행동할 줄이야.’

안양 공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철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철의 범접할 수 없는 냉담한 모습에 더욱 기뻐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든단 말이야. 이렇게 냉담한 사람이 언젠간 내 붉은 치마 아래 엎드릴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 가슴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워져. 더군다나―’

안양 공주는 눈앞의 사내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말라 보이는 몸매지만, 이 눈에 거슬리는 청색 관포를 벗기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나는 잘 알고 있지. 대량의 학자들은 늘 문약하고 힘이 없고, 무인들은 늘 거칠고 무모해. 그러니 눈앞에 있는 이런 사내는 정말 만 명 중에 하나꼴이라고 할 수 있어.’

안양 공주는 오랫동안 과부살이를 했고 수많은 면수를 길러왔기에, 아가씨들 같은 수줍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때문에 정철을 보는 눈빛은 아주 대담하며 화끈했고 그 누구도 공주의 뜻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난 네가 내 부마가 되었으면 한다!”

정철의 눈썹이 움찔대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공주 전하, 소신은 이미 정혼녀가 있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아직 혼례를 치른 건 아니지 않느냐!”

안양 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혼례를 치렀다고 해도 이혼을 하면 되지.”

정철의 표정이 완전히 싸늘해지더니 눈이 별이 사라진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분명 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공주 전하, 농담하시는군요. 부부의 맹약을 맺었는데,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충정후부와 정혼했고, 충정후부의 방(方) 아가씨는 소신이 인정한 아내입니다. 이 뜻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양 공주는 몹시 분개하여 이를 갈며 물었다.

“그래? 참으로 대단한 부부고, 참으로 대단한 의지로구나! 내가 직접 그 방 아가씨에게 가서 물으면, 그쪽은 뭐라 대답할까?”

정철은 안양 공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갑자기 옅게 웃었다.

“공주 전하, 어찌 방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려 하십니까? 한 사내가 어떤 여인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다른 여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모르십니까? 사내 곁의 여인을 찾아가서 성가시게 해봤자 자신의 처지만 더 분명히 드러날 뿐이지요.”

안양 공주는 멍하니 정철의 말을 들었다.

‘25년을 살아오는 동안 부황은 물론이고, 내가 곁에 두었던 사내들 중 아무도 내게 이렇게 정색한 적 없었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앞의 사내가 내게 진지하게 말하니 분노는커녕 감탄스럽기만 하구나.

이 사내를 더욱 가지고 싶어졌어!’

안양 공주가 한 걸음 다가가 가슴을 쫙 펴고 말했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 여인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내로군. 그대의 말이 권고든 나를 자극하려던 것이든 상관없어. 그 말에 내 마음이 동했으니 약조하지. 먼저 방 아가씨를 찾아가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고.”

정철은 몸을 옆으로 피해 두 사람의 거리를 벌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소신, 공주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안양 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감정 어린 눈빛으로 정철을 쳐다봤다.

“하지만 난 마음에 든 것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지. 정철, 정청겸, 자네를 꼭 가지고 말겠어!”

안양 공주는 말을 마치고 정철을 한 번 흘겨보더니 성큼성큼 떠나갔다.

정철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미미,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야? 나와.”

그러자 담 모퉁이에서 수수한 옷을 입은 늘씬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오라버니―”

두 사람의 대화를 이렇게 오랫동안 엿들으니, 정미는 자신의 기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어 답답하던 참이었다.

‘여인이 이렇게 대담하고 제멋대로 굴 수도 있구나. 그 사람이 공주라서 그렇게 거리낌 없이 오라버니를 빼앗아 부마로 삼으려 할 수 있는 건가? 아니, 사실 오라버니와 누구와 혼인하든, 심지어 정말 공주의 부마가 되든 나한텐 별다를 게 없지 않나?’

정철은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보며 어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한참 뒤에야 겨우 물었다.

“미미, 어디까지 들었어?”

정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솔직히 대답했다.

“아마 거의 다 들었을걸.”

그러자 정철의 귓가에 홍조가 올라오더니 결국 두 뺨을 물들였다.

햇살 아래 정철은 바람과 서리를 겪은 뒤의 청죽(靑竹)처럼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정미는 갑자기 화가 났다.

‘부부의 맹약은 무슨, 뜻이 변하지 않기는 무슨! 오라버니는 정말 미워!’

정미는 정철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고는 치맛자락을 들고 발걸음을 뗐다.

정철은 여동생이 노려보자 어리둥절했다.

‘엿들은 건 자기면서 왜 저쪽이 화를 내는 거지?’

“미미― 왜 갑자기 화를 내?”

정철이 쫓아오며 물어오자, 정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오라버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곧 맥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질투해봤자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모르는걸. 그날 밤 절벽 아래에서 오라버니가 했던 말도 내 환청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왜 이렇게나 방 아가씨를 소중히 여기고 기어코 혼인하려 하겠어.’

정미는 마음이 쓰라려 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철의 눈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정철이 손을 들어 정미의 어깨에 얹고 부드럽게 물었다.

“궁에서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정미가 정철의 손을 치웠다.

“난 그냥 대공주가 오라버니한테 치근덕대는 걸 보니까 기분이 좋지 않아서.”

겨우 사라졌던 홍조가 다시 정철의 얼굴을 물들였다. 정철은 겨우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이 바보야. 이런 작은 일로 기분 상할 게 뭐 있어. 걱정 마, 오라버니가 잘 처리할게.”

“작은 일?”

정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 들었는걸. 공주가 오라버니를 부마로 삼으려고 한다고! 오라버니, 대공주는 좋은 사람이 아냐. 면수를 아주 많이 기른댔어.”

“……미미, 면수가 뭔지 알아?”

정철은 놀란 표정이었다.

‘큰일이다. 흥분해서 말이 잘못 나왔어.’

“미미, 또 이상한 화본을 본 거야?”

오라버니의 말투에서 위험을 감지한 정미는 급히 한 번 기침하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어냈다.

“역사책에서 본 거야. 전조 때 청란(靑鸞) 공주가 부마가 살아있을 때부터 면수를 길렀는데, 부마가 결국 참지 못하고 검으로 공주를 베어 죽였댔어. 그래서 황상이 크게 분노하여 그 부마를 죽이려 하자, 관리들이 황상을 말렸고, 결국 두 언관(言官)이 금란전에 부딪혀 죽고 난 뒤에야 황상이 마음을 돌렸대. 이 일은 나중에 공현왕(恭賢王)이 반란을 일으키는 화근이 되었는데, 역사서에는 ‘청란의 화(禍)’라고 불려.”

정미가 탄식했다.

“오라버니, 강산은 변하기 쉬워도 타고난 본성은 바꾸기 어렵다잖아. 대공주가 방 아가씨보다 예쁘고 가슴도 크긴 하지만, 그것만 보고 마음을 빼앗겨선 안 돼. 공주가 정말 오라버니를 부마로 삼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나쁜 버릇이 또 되살아날 거야.”

“그건 오라버니도 당연히 알고 있지.”

정철은 대답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안양 공주가 예쁘고 가슴이 크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미미, 말을 예쁘게 해야 해. 이상한 말은 삼가고! 큼큼, 특히 여인에 대해 얘기할 땐 더욱 주의해야지.”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이상한 말 안 했는데?”

정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오라버니가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다 봤어. 대공주가 방금 오라버니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 가슴을 어찌나 내밀던지. 오라버니한테 보란 듯이 말이야. 흥,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나이가 많은 걸 믿고 그러는 거겠지.”

정미는 말을 마친 후 눈을 내리깔아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고는 생각했다.

‘나도 십 년쯤 뒤엔 대공주보다 커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낮잡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었다. 소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몸을 곧게 펴고 득의만만하게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은 얼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워져 도망치듯 거리를 걸어 나갔다. 하지만 정미가 뒤를 따라오지 않자,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결국 다시 돌아가 정미의 손목을 붙잡으며 경고했다.

“이제 입 다물고 오라버니랑 어서 돌아가자.”

“오라버니―”

정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정요가 돌아왔단 말이야.”

정철의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근처의 찻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가서 차나 마시자.”

정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 남매가 함께 찻집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 용수(*榕樹: 뱅골보리수) 아래 안양 공주가 몸을 반쯤 드러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둘째 공자가 여동생에겐 상냥한가 보구나.”

멀리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정철이 얼마나 여동생을 신경 쓰는지는 똑똑히 보였다. 방금 자신을 단호히 거절하던 냉랭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관없는 여인에겐 소원하게 굴고, 집안사람에겐 따뜻하게 굴다니. 역시 내가 마음에 든 사내야. 잘 골랐어.’

정미는 그 면수를 기르는 공주가 아직도 오라버니를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차를 반쯤 마신 뒤 신제에 대해 물었다.

“오라버니, 나중에 또 정가촌에 갔어? 신제가 뭐라고 했어?”

정미도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국랑의 죽음에는 정미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만약 아혜가 생각 없이 말을 뱉지 않았다면, 국랑이 조산으로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혜는 내가 없었다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거고.’

정미는 몸을 되찾은 뒤, 거의 바로 궁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때문에 정철에게 신제 자매에게 도울 게 있는지 가서 알아봐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신제는 나와 백부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 했어. 다섯째 형수님 곁에 있으며 어머니의 무덤을 관리하겠다고 하길래, 그렇게 하도록 두었어. 걱정 마. 마을과 진(鎭)의 의원들에게 은전을 남겨두고, 아홉째 당숙모께 앞으로 신제 자매에게 잘 대해주라고 확실히 말해두었으니 그 아이들의 처지가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그럼 다행이다.”

정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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