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창밖
한 씨에게로 가는 길, 정동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고 화제는 어쩌다 진령운에게로 흘러갔다.
“고모님은 령운 언니를 데리고 서택 오라버니를 돌보러 진가로 돌아가셨어. 언제 다시 돌아오실지 모르겠네.”
“서택 오라버니? 무슨 일인데?”
정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진서택과 정미는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그는 정직하고 쾌활한 사촌 오라버니였기에 그래도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편이었다.
저번에 진서택이 병문안을 왔을 때 정미에게 준 풀 메뚜기는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정동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서택 오라버니가…… 누구랑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었대.”
“어쩌다가?”
정미는 깜짝 놀랐다.
“자세한 상황은 나도 몰라. 고모님이 서택 오라버니의 화를 풀어주겠다고 사람도 아주 많이 데리고 가셨어. 근데 어떻게 화를 풀어주든 오라버니의 눈은 돌아오지 않겠지.”
정미는 조용히 걸어가며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부술에 대성하면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그럴 능력도, 시간도 없어.’
“셋째 언니―”
정동의 부름에 정미가 멈춰 섰다. 정동이 정미의 옷깃을 잡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동이 어색한 듯 말했다.
“앞으로 우리 그만 싸울까?”
정미는 정동을 빤히 쳐다보다가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매번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던 거잖아.”
‘이 미운 것이 드디어 제 주제를 알고 날 이기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구나. 그럼 일단은 잠시 화해하도록 하지.’
정동 모녀에 대한 정미의 악감정은 한 씨와 동 이낭의 적대적인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쟁탈하던 그 사람, 둘째 나리가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고 느껴지자 그 모녀에 대한 적의도 자연히 시들해졌다.
‘나도 예전엔 아버지의 관심을 바라는 어린 소녀였지.’
정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정동이 이연원 입구에서 멈춰서 말했다.
“나는 아침에 이미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렸어. 그러니 나는 들어가지 않을게.”
정동이 뒤돌아 떠나자, 정미는 입을 꾹 다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과연 한 씨는 아픈 게 아니라 그저 조금 초췌해 보일 뿐이었다. 정미가 들어가자 한 씨가 곧바로 그녀를 맞이하며 물었다.
“미야, 네 큰언니는 좀 어땠니?”
“아주 괜찮아요.”
한 씨가 손을 내저어 설란과 다른 시종들을 내보낸 뒤, 그제야 말했다.
“그 여우 같은 계집이 궁에 들어갔으니, 네가 큰언니를 잘 돌봐야 한다. 절대 그것이 해치게 두어선 안 돼.”
“걱정 마세요, 어머니. 큰언니가 출산할 때까지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게요.”
한 씨는 그제야 안색이 조금 나아지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자비를 베풀어선 안 됐는데. 그때 이를 악물고 죽였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땐 여전히 둘째 나리와 완전히 멀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그저 후회만 남았구나.’
“걱정 마세요. 정요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으니, 다신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정미는 아무렇게나 한 씨를 위로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날 큰언니가 어머니께 서신을 보냈을 때, 왜 답신에 제대로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저와 큰언니가 갑자기 정요를 마주쳐서 하마터면 추태를 부릴 뻔했어요.”
한 씨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네 조모와 아버지가 혹시나 내가 일을 망칠까 봐 계속 나를 속이고 있었지 뭐니!”
정미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 씨가 둘째 나리를 얘기할 때, 이제 조금의 정도 묻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정미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머니, 저희도 큰고모님처럼 외가로 가서 살면 안 되나요?”
‘이 엉망진창인 집구석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다고요!’
한 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큰언니는 태자비고, 나와 네 아버지의 혼사는 성상(*聖上: 황제)께서 하사한 것인데, 어찌 네 큰고모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니?”
한 씨의 말은 정미의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방 안엔 침묵이 흘렀다.
한 씨는 모처럼 돌아온 차녀와 안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웃으며 말했다.
“네 둘째 오라버니가 한림원에서 상관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더구나. 네가 오늘 돌아온다는 걸 알고 휴가를 신청하고 일찍 돌아올 거라 했어.”
정미가 활짝 웃었다.
“저도 둘째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요.”
한 씨는 정미가 웃는 모습을 보고는 한마디 더 얹었다.
“네 둘째 오라버니의 혼례는 내년 봄으로 정해졌다. 자세한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철이의 나이도 적지 않고, 혼사는 늦지 않았으면 해서 아예 정월에 치르는 걸로 정했단다.”
순식간에 정미는 기분이 아주 나빠져 몰래 손수건을 잡아당겼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거든!’
한 씨가 이어서 말했다.
“네 둘째 오라버니의 일이 끝나면 네 차례가 되겠구나.”
정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머니, 조금 피곤하네요. 돌아가서 쉴래요.”
한 씨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 쉬거라. 염송당에서 널 부르러 오면 내가 쳐내도록 하마.”
* * *
정미는 이연원에서 도망치듯이 나와 비서거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환안을 데리고 백부 밖으로 나왔다.
한림원 근처에는 찻집이 하나 있었는데, 백부로 돌아올 때 꼭 거치는 길 위에 있었다. 정미는 그 찻집으로 가 정철을 기다리려 했다.
“지 오라버니?”
정미가 측문으로 나와 길모퉁이까지 걸어갔을 때, 한지가 머뭇거리며 그곳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지는 정미를 보자마자 기뻐하며 한걸음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미, 계속 궁에서 태자비마마를 모시고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돌아온 거야?”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하실 말이 있으면 하세요.”
정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지를 살펴봤다.
오랜만에 본 한지는 피골이 상접 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넓은 현색 도포를 입고 있으니 바람에 날아갈 기세였다.
‘조 시랑 집안과의 퇴혼에 충격이 너무 컸었나?’
정미는 곧바로 이 추측을 부인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원인이 떠올랐다.
‘정요가 죽은 줄 알고 상심해서 그렇구나?’
정미는 갑자기 한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헷갈렸다.
‘지 오라버니가 은애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이렇게 진심으로 누군갈 은애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니까. 최소한 태자나 평왕 같은 변태들보단 낫지.’
정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저희 어머니를 보러 오신 거예요?”
한지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정미, 내가 듣기로는 백부에 친척 여동생이 왔다던데?”
한지의 눈빛은 기대와 불안으로 가득했다. 마치 사막을 걷다가 갑자기 오아시스를 발견해 놀라우면서도 혹시나 이게 꿈일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한지는 정말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가 마침내 조가와의 혼사를 취소하는 데에 성공했을 때, 정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슬퍼했는지는 하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지는 살이 스무 근(*약 12kg)이나 빠졌다.
모든 걸 체념한 한지는 종일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청량산에서 돌아온 용흔이 말하기를, 자칭 회인백부 맹 노부인의 사촌 외손녀라는 여인이 청량산에서 위독한 화 귀비를 살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작은 패왕이 봤을 땐 분명 정요였다는 것이다!
한지는 환득환실(*患得患失: 이익이나 지위를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으면 잃어버릴까 걱정함)한 마음에 감히 믿을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사실 믿고 있었다.
‘정요가 마을로 쫓겨난 건, 분명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었을 거야. 고모님의 눈 밖에 났다든지, 정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든지…… 정요는 서녀니까. 집안에서 서녀를 내다 버린 뒤, 죽었다고 얘기하는 건 평범한 일이고.’
한지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며 정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런 사람이 왔지요. 아, 제가 보니까 정요와 아주 똑같이 생겼던데요.”
“정말이야?”
한지가 저도 모르게 정미의 옷깃을 붙잡자,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붙잡힌 옷깃을 쳐다봤다.
한지는 멋쩍은 듯 손을 놓고 감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네가 방금 그 친척 여동생이…… 그 아이가…….”
그러나 정미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저는 별말 안 했어요. 지 오라버니, 그 사람을 보고 싶으면 당당하게 들어가시면 돼요. 전 일이 있어 이만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정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떠났다.
“정미―”
한지가 한 걸음 다가가며 그녀를 불렀으나 정미는 그저 뒤돌아보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고마워.”
이에 정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길을 나섰다.
* * *
한림원 근처의 찻집은 그리 크지 않았고 청아하며 조용한 것이 장점이었다.
정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잔 주문하고는 한림원의 대문을 쳐다보며 조금씩 마셨다.
일주향(*약 30분)쯤 지났을 때, 대문에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정미는 벌떡 일어나 미소 지었다.
‘딱 맞춰 왔구나. 다행이야. 오라버니와 엇갈릴 뻔했네.’
“환안, 가서 계산해.”
정미는 명령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창밖을 스쳐보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웬 붉은 치마를 입은 키가 큰 여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정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맞이하고 있었다.
창밖엔 햇살이 화창해 여인의 붉은 치마를 더욱 휘황찬란하게 비춰주어 눈이 부셨다.
정미는 뒤돌아서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연한 자색의 치맛자락이 찻집 계단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온 환안은 정미가 보이지 않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마침 그대를 찾으러 가려 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이야. 정말 인연이구나.”
정철이 한걸음 물러나 몸을 숙여 절했다.
“소신,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이 붉은 옷의 여인은 창경제의 장녀이자, 안양(安陽)이라는 봉호를 가진 대공주였다.
안양 공주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이리 서먹하게 구는 것이냐. 날 안양 혹은 오복(五福)이라 부르면 된다.”
정철은 눈도 들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소신은 집에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공주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안양 공주가 정철의 옷깃을 붙잡았다.
청색 관포를 입은 정철의 얼굴은 더욱 환하고 단정해 보였다.
정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양 공주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차분한 눈빛에, 안양 공주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찔려 손을 놓았고 부끄럽고 분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이 새로운 장원랑이 마음에 든다는데 뭐가 어때서? 왜 그 충정후부의 큰아가씨는 이런 훌륭한 낭군에게 시집갈 수 있고, 대량의 대공주인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이지?’
그렇다. 공주는 이 맑고 따뜻한 사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공주의 마음에 들었던 다른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내들은 봄에 잠깐 외로움을 달래는 용도였고, 그런 지위마저도 없는 사내들은 곁에 두었다가 흥미를 잃는 순간 내다 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철과 자꾸 마주칠수록 공주의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이렇게 훌륭한 사내라면 내 부마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서기도 전에 정혼을 해버리다니!’
안양 공주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정철을 쳐다봤다.
그가 차갑게 굴수록, 공주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이 사내는 내가 꼭 가져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