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가마 안
정아는 정미가 정요를 떠올린 줄 알고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아. 정요가 무슨 신분으로 바뀌었든 간에 노골적으로 나쁜 짓을 하진 못할 거야. 정미가 조심해서 빈틈을 보이지만 않으면 돼.”
“큰언니, 언니가 귀비마마께―”
“이 일은 더 물을 필요도 없어. 마마께서도 분명 정요의 진짜 신분을 알고 계실 거야.”
정아는 정미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귀비마마 정도의 지위에 오르면, 출신도 불분명한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아.”
“그럼 왜…….”
정아가 웃었다.
“얼마 전 정요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수도 사람 모두가 회인백부의 둘째 아가씨는 죽었다고 알고 있을 거야. 정요가 어떻게 마을에서 탈출했든, 어떻게 귀비마마를 구했든 간에, 모두의 앞에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럴듯한 신분이 필요했겠지. 귀비마마께서 아버지께 말만 한마디 하면, ‘수도의 친척에게 의탁하러 온 먼 친척 아가씨’라는 신분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고.”
정아의 말을 들으니 정미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정요가 아무리 수도 제일 재녀라는 명성을 떨쳤더라도 그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들과 몇몇 부인들 뿐이었다. 정요가 청량산에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터였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누가 감히 귀비마마와 맞서겠는가.
“정미,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정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귀비마마께서는 정요가 아주 마음에 드셨군요.”
마음에 든 게 아니라면, 왜 굳이 정요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었겠는가.
“맞아, 그러니까 공개적인 장소에서 정요와 부딪히면 안 돼.”
정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아는 안심한듯하다가 갑자기 다른 곳에 마음이 쏠렸다.
‘사실 그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긴 해. 태자가 정무를 처리하기 시작하고 꽃다운 나이인 정요를 의녀로 삼았으니, 태자의 오른팔 역할을 할 사람을 찾아주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정미처럼 어린 아가씨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정아는 조용히 배를 어루만졌다.
‘부디 배 속의 아이가 아무 문제 없이 총명하고 영리한 아이이길…….’
* * *
다음 날, 날씨는 맑았다. 정미와 정요는 가마를 타고 회인백부로 향했다.
정미는 백부로 돌아갈 수 있어 기분이 꽤 좋았다. 오히려 어제 기를 펴고 돌아갔던 정요가 정신이 딴 데 팔려있는 모습이었다. 안색을 보니 어젯밤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게 분명했다.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히 잘 못 잤겠지. 태자가 어제 은침의 복수를 하려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미는 아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태자든 평왕이든, 높은 신분은 그들의 성정을 이상하게 만들었어. 여인을 진심으로 은애하고 존중할 리 없지. 태자와 정요의 만남이 진정한 사랑이었을 리 없다고!’
“정미.”
정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가마 밖은 7월 특유의 시끌벅적함으로 떠들썩했지만, 가마 안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정미가 차갑게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정미와 가까워진 뒤, 목소리를 아주 낮게 깔고 말했다.
“정미, 내가 다시 돌아왔는데 무섭지 않아?”
그 비천한 사동에게 순결을 빼앗겼을 때부터 정요는 정미 앞에선 더 이상 자매의 정 따위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지금 나는 화 귀비의 의녀니까. 정미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봐야겠어.’
하지만 정미는 실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정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를 흘겨봤다.
“네가 누군지 말하는 걸 누가 들을까 두렵지도 않은 거야?”
“하하.”
정요가 웃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왠지 한기가 느껴졌다.
“이 가마 안에서 또 누가 보고 들을 수 있는데? 정미 널 말하는 거야? 네가 이걸 남들에게 얘기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걸. 누가 감히 믿으려 하겠어?”
‘그 냉혈한 아버지마저 내가 화 귀비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되자, 내가 노부인의 사촌 외손녀라고 말하니 인정했는걸. 만약 아버지의 사촌동생이라고 했어도 기꺼이 인정했을 거야.’
정요는 지금 아주 통쾌했고 가마가 더 빨리 달려 얼른 회인백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말은, 이 안은 아무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거지?”
정요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정미가 빙긋 웃었다.
“그럼 안심할 수 있겠네.”
그러곤 정미는 손에 쥐고 있던 신발을 치마 아래에서 꺼내 힘껏 정요를 향해 내리쳤다.
정요는 ‘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네, 네가 어떻게 감히―”
정미는 자신을 가리키는 정요의 손가락을 밀어제치고는 다시 신발을 신고 천천히 말했다.
“내가 못할 게 뭐 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도 모르겠네. 여기서 뛰쳐나가서 내가 널 때렸다고 말할 순 없을 거 아냐?”
정요의 몸이 움찔거리자, 정미는 검지로 정요를 콕콕 찌르더니 도발하듯 경고했다.
“네가 능력껏 덤비길 바라. 싸움이라도 하면,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정요 같은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가마에서 내릴 리 없지.’
정요는 말문이 막혔다.
‘싸움도 이기지 못할 테고 싸운 일이 알려지면 창피하기까지 할 테니,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참아야겠어. 하지만 정미, 계속 이렇게 난폭하게 굴기만 했다간 언젠간 큰코다치게 될 거야!’
“이 바보 같은 것!”
정요의 외침에 정미는 눈을 들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나불거리면 또 신발로 때릴 거야.”
‘바보면 바보라지. 바보는 얻어맞지라도 않으니까.’
정미가 씨익 웃었고, 정요는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회인백부에 도착했다.
* * *
가마는 회인백부의 중문 밖에서 멈춰섰다.
입구에서는 맹 노부인의 여종 아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미와 정요가 가마에서 내리자, 아복이 맞이하며 절을 올리고는 방긋 웃었다.
“셋째 아가씨와 사촌 아가씨께 인사 올립니다. 노부인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소인을 따라오시지요.”
정미는 아복의 시선이 정요의 얼굴에 잠시 머무르는 걸 느꼈지만, 아복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미는 가슴이 싸늘해졌다.
‘집안사람들도 진작에 정요의 신분을 알고 있었구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정미는 어릴 때부터 깊이 미워해왔던 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염송당의 풍경은 여전했다. 둘러보면 어디든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정미와 정요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정요에게 꽂혔다.
정요는 태연하게 한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맹 노부인이 일어나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야 맞느냐? 아가, 와서 이모할머니에게 얼굴을 보여주렴.”
정요는 맹 노부인 곁으로 빠르게 걸어가 절을 올렸다.
“소야가 이모할머님을 뵙습니다.”
맹 노부인은 급히 정요를 일으켜 세우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웃었다.
“역시 내 언니의 친손녀구나. 앞으로 백부를 네 집처럼 여기고 편하게 지내거라.”
정미는 모두에게 정중히 정요를 소개하는 맹 노부인을 보며 탄복했다.
“미야, 동아, 앞으로 소야와 사이좋게 지내며 잘 신경 써주거라.”
정동과 정미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를 본 맹 노부인이 일부러 둘을 부르며 강조했다.
“예.”
정동은 떨떠름하게 대답했고, 정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아직 어린 정옥이 갑자기 물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둘째 언니잖아요?”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맹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맏며느리 유 씨를 꾸짖었다.
“너는 옥이를 어찌 가르친 게냐. 열한 살이나 되었는데 어찌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유 씨는 총명하진 않았지만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런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경우를 말함) 같은 짓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따로 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으나, 시어머니가 꾸짖자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며느리의 잘못입니다.”
유 씨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저 정옥을 뒤로 잡아당겨 딸을 감쌌다.
그때 셋째 부인 풍 씨가 웃으며 말했다.
“노여워 마세요. 옥이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인걸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풍 씨는 솔직하고 박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줄곧 맹 노부인의 일 처리를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그저 서자의 며느리였기에 대부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곤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도저히 조용히 넘어갈 수 없었다.
맹 노부인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두 며느리를 한 번씩 훑어보더니 왠지 씁쓸함을 느꼈다.
‘맏며느리를 들일 땐 백부의 사정이 좋지 않았으니 아쉽지만 첫째에게 이런 우둔한 아내를 붙여줄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셋째 며느리는 서자의 아내이니,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눈길을 주지 않을 거다. 그리고 둘째 며느리는― 그 애는 두말할 것도 없지. 내게 골칫거리나 가져오지 않으면 다행이야.’
맹 노부인은 정미와 정요를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 백부의 흥성은 손주들에게나 기대할 수 있겠구나. 철이는 한림원에 들어갔으니 앞길이 창창할 테지. 세자를 도와 백부를 잘 지킬 수 있겠어. 정아는 태자비의 지위가 견고하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정미와 정요가 도와줄 수 있으니 훨씬 안심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정미와 정요를 쳐다보는 맹 노부인의 눈빛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아직 식사하지 못했지? 흰 목이버섯 탕을 끓여놓으라 했으니 우선 배부터 채우거라.”
“아닙니다, 이미 의모님 쪽에서 먹고 왔습니다.”
정요가 은근히 자신의 신분을 알렸다.
맹 노부인의 표정이 더욱 따뜻해지며 정요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이모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주려무나.”
그때 정미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물었다.
“조모님, 저희 어머니는요?”
정미가 한 씨를 언급하자, 맹 노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네 어머니는 요 이틀간 몸이 편치 않아서 방에서 쉬고 있단다.”
정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는 어머니를 뵈러 갈게요.”
맹 노부인이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점심엔 식사하러 돌아오거라.”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나가자, 이어 정동이 급히 일어났다.
“조모님, 저도 셋째 언니와 함께 갈게요.”
맹 노부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동은 염송당 대문을 나온 뒤에야 숨을 돌리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도저히 못 참겠어.”
정미가 그런 정동을 흘끗 쳐다봤다.
‘언제부터 내가 이 계집과 이렇게 친해졌지?’
정동은 정미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혼자서 재잘거렸다.
“도무지 모르겠어. 그냥 귀비마마의 마음에 든 거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추켜세운다고? 정요가 어떤 사람인지는 보지도 않고!”
정동은 이전에 정요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날이 갈수록 그녀가 미워졌다.
정요가 늘 완전무결하던 자신의 아버지를 망가뜨려서인지, 아니면 그저 정동이 많이 커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가 사내와 그리 망측한 짓을 저질렀는데, 그런 사람에게 가문의 명예를 기대하는 거야? 조모님과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반기기나 하고 말이야.’
왠지 모르겠지만, 정동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더 이상 정미와 맞서고 싶지 않아졌다.
“셋째 언니, 정요는 마을에서 병으로 죽었다며. 근데 왜 갑자기 사촌 아가씨가 된 거야? 귀비마마까지 구했다고 하고?”
“나도 몰라.”
정미는 맹 노부인과 둘째 나리, 심지어 한 씨에게까지 어려서부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정동만큼 충격이 크진 않았다. 게다가 정동이 자신과 화해를 하고 싶어 한다고는 더욱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미의 마음속 정동은 여전히 울보에다 자신을 모함하기만 하는 밉살스러운 존재였다.
물론 정동에 대한 깊은 원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그 악몽 속에 정동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