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21화 (221/375)

221화. 보이지 않는 손해

화 귀비는 정요에게 몹시 다정했다. 그녀는 정요가 다가오기도 전에 웃으며 말했다.

“소야, 청량산에서 맹 노부인과 친척 자매들을 보고 싶다고 자주 말하지 않았더냐? 그 친척 자매 둘이 여기 있구나. 내일이 되면 저기 정가의 셋째 소저에게 너를 회인백부로 데리고 가 맹 노부인을 만나 뵐 수 있도록 해주마.”

“마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정요가 다가와 정아와 정미에게 예를 갖췄다.

“맹소(孟霄)가 태자비마마와 미 친척동생을 뵙습니다.”

정아는 몇 년간 태자비의 자리에 있었기에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직접 정요를 일으켜 세우며 자세히 그녀를 살펴보더니 웃었다.

“맹소 동생은 조모의 외사촌 손녀인가?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구나. 하지만 맹소 동생도 이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을 아주 많이 닮았어.”

정요가 어색하게 웃었다.

“청량산에 있을 때 들어봤습니다. 숙부님께서도 저를 잘못 알아보셨거든요. 그제야 제가 태자비마마의 둘째 여동생과 조금 닮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아쉽게도 그 친척 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어요.”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금 닮았다고? 정요는 역시 무슨 말이든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구나.’

정미는 속이 뒤집혀 정요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또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결국 억지로 참아냈다.

정요는 정미를 쳐다보더니 옅게 웃으며 말했다.

“미 동생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구나. 미 동생의 이름은 이미 오래도록 들어왔어.”

“그래요? 저는 한 번도 맹소 언니라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정미가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화 귀비가 입을 열었다.

“그대 자매들을 보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앉을 생각도 못 할 것 같구나. 태자비, 앉게. 배 속의 아이를 힘들게 하지 말고.”

정아는 화 귀비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정미는 정요의 등장으로 이미 충분히 충격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어진 화 귀비의 말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태자비도 들었겠지. 본궁이 청량산에서 학질(*虐疾: 전염병의 일종으로 발열과 발작이 증상으로 나타남)에 걸려 하마터면…… 다행히 자네의 이 친척 여동생이 신약(神藥)으로 본궁의 목숨을 구해줬다네. 그리고 몸이 난 뒤 전심전력으로 본궁을 모셔주어 본궁이 이리 빨리 회복할 수 있었지.”

화 귀비가 정요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 본궁은 이미 맹소를 수양딸로 들였어. 앞으로 궁 안에서 태자비의 동무가 되어줄 것이야.”

“예?”

계속 침착하던 정아의 표정이 마침내 굳어 정요를 쳐다보다가 손이 찻잔과 부딪쳤다. 찻잔이 마구 휘청거렸다.

정미가 손을 뻗어 그 찻잔을 손에 들고는 한 모금 마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은 크게 돌고 돌아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악몽과 마찬가지로, 정요가 큰언니가 출산할 때 궁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악몽과 다른 점은 나도 궁 안에 있다는 것이지. 내가 정요를 이길 수 있을까?’

정미가 정요를 쳐다보자, 정요도 마침 정미를 쳐다보았다.

“태자 전하 납시오―”

내시의 외침에 정미와 정요의 미묘한 눈싸움이 끊어졌다.

금빛 용이 수놓아진 현포(玄袍)를 입은 태자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모비, 의매(義妹).”

태자는 곧바로 정아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비.”

태자는 화 귀비 앞이었기에 전처럼 거리낌 없이 정미를 살펴보지 않고 그저 웃으며 인사했다.

“정미.”

“앉거라.”

화 귀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왔고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식탁 위는 순식간에 잔과 그릇으로 가득 찼다.

‘식사 중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에 따라,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미는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무서운 건가? 그래, 당연히 무섭겠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서로 냉담했던 어머니의 신임을 얻고, 어머니가 정요를 멀리하게 했는데.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다급해진 정요는 급기야 잇달아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어. 하지만 정요가 교외 마을로 쫓겨나 백부의 버린 자식이 되었음에도,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귀비마마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 돌아왔다니. 어찌 이런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여도 결코 굽히지 않음)한 사람이 있단 말이야?’

“미 동생, 너무 조금 먹네. 어쩐지 너무 마르다 했어.”

밀즙(*蜜汁: 꿀)을 바른 닭 날개가 정미의 그릇에 놓였다.

정미가 눈을 들자, 정요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미는 곧바로 닭 날개를 꺼내 접시에 놓았다.

“저는 밀즙 닭 날개를 먹지 않습니다. 맹 아가씨께선 앞으로 호의를 베풀기 전에 상대를 먼저 알아보셔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난처한 상황이 되니까요.”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밥을 한입 퍼먹었다.

‘정요가 무섭기보다는 악몽 속에서 본 운명이 무서운 거지. 하지만 아무리 무섭더라도 다가올 운명은 피할 수 없으니, 그냥 맞서보자고.’

화 귀비는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정미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고작 어린 아가씨 하나와 겨룰 순 없었기에 정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소야도 많이 먹거라. 아가씨들은 조금 통통해야 보기 좋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마.”

“의모님이라 부르거라.”

화 귀비는 ‘의모’를 강조했다. 모두의 앞에서 정요의 신분을 강조하려는 듯했다.

정요가 화 귀비를 한 번 쳐다보더니 수줍은 듯 웃었다.

“마마, 소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마께 약을 드리고 병을 봐 드린 건 제게 영광이었는걸요.”

화 귀비는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냐? 네가 본궁의 목숨을 구했는데 못할 게 뭐 있느냐? 본궁에겐 태자 외엔 양녀로 삼아 기르는 아홉째 공주밖에 없거늘. 공주는 아직 나이가 어려 예전부터 정다운 딸이 있었으면 했다. 네가 더 거절하면 본궁이 화가 날 것 같구나.”

정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뻔뻔스럽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모님.”

화 귀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자를 쳐다봤다.

“태자에게도 오라버니라 부르면 된다.”

정요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드럽게 불러보았다.

“의오라버니.”

태자는 정요에게 이렇게 불린 게 처음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정요의 긴 속눈썹이 흔들리는 걸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모비께선 모르시겠지. 이 의매는 완전히 내 사람이 되진 않았지만, 건드릴 수 있는 곳은 진작에 다 건드려봤다는 걸. 의남매라는 명분은 정말 성가시군.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도 어렵게 되었어.’

태자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져 참지 못하고 몰래 발을 뻗어 식탁 아래로 정요의 발을 건드리려 했다.

정미는 곧바로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고기를 접시에 떨어트릴 뻔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곁눈질로 식탁 아래의 광경을 살펴보며 화가 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태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잠깐, 나한테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미가 조용히 발을 거두자, 태자는 다시 발을 더듬다가 정요의 복사뼈를 건드렸다.

정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지만 태자의 행동에 오히려 침착해졌다. 그녀는 티 나지 않게 정요를 흘겨보았고, 정요가 살짝 당황하는 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식탁 아래서 태자와 닿은 발은 숨기지 않았다.

정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정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몰래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수치라곤 조금도 모르고 남을 우습게 보는구나!’

정미가 몸에 지니고 온 물건은 많지 않았다. 염낭엔 은침 하나가 있었는데, 은침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궁에 들어온 뒤론 피로 부적을 그리지 않았기에 은침은 아직 새것이었다.

부적은 왼손으로도 오른손과 똑같이 쓸 수 있었다. 아혜는 인혼술을 더 순조롭게 펼치기 위해 일부러 온몸을 유연하고 민첩하게 만드는 부수를 만들어 마셨었기에, 정미는 지금 발걸음마저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민첩했다.

정미는 곧바로 결단을 내리고 몰래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염낭에서 재빨리 은침을 꺼내 발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천천히 태자의 종아리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용히 숨을 들이키고 힘껏 아래로 눌렀다.

태자는 ‘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느냐?”

화 귀비가 깜짝 놀랐다.

정미는 고개를 들어 멍한 표정으로 태자를 쳐다보며 오른손으론 죽순채를 집어 입가에 댔다.

정아도 어리둥절하며 쳐다봤고, 정요만이 양심에 찔려 놀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태자는 빠르게 정요를 한 번 훑어보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는 화 귀비에게 해명했다.

“방금 갑자기 복통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화 귀비는 태자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정아 자매의 앞이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정미는 죽순채를 입에 넣고는 꼭꼭 씹어 넘기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눌렀다.

‘방금 태자의 비명이 복통 때문이라고? 누가 그걸 믿겠어? 응, 이 죽순채 시큼 매콤하고 아삭아삭한 게 아주 맛있네!’

정미는 무표정으로 다시 죽순채를 집어 들었다.

한편 태자는 조용히 식사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요를 한 번 노려봤다.

‘이 천한 것. 이제 와서 고결한 척해서 뭐 하려고?’

정요는 태자의 눈빛에 어리둥절하며 깜짝 놀랐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태자는 당장이라도 정요를 벽모퉁이로 끌고 가 괴롭히고 싶을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기에 정요가 보내는 정다운 눈빛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흉악하게 그녀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겨우 식사를 마쳤다.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태자는 종아리에 통증을 느꼈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손을 씻고 일어나 말했다.

“처리할 일이 아직 남아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황상은 나이가 들어가자 2년 전부터 태자에게 정무를 맡기기 시작했다. 화 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거라.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끝내지 못한 일들은 내일 하도록 해라. 몸을 해쳐선 안 돼.”

“알겠습니다.”

태자는 장춘궁에서 나오자마자 사람이 없는 곳에 멈춰 급히 바지를 걷어 올려봤다.

호강하며 지내는 태자의 종아리는 희고 부드러웠기에 그 붉은빛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태자는 등불에 비친 그 붉은 점의 중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은침 하나가 흔들거리며 태자의 종아리에 박혀 수줍은 소녀처럼 반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태자는 곧바로 청량산에서 정요가 은침으로 화 귀비의 몸을 편안하게 해준 장면을 떠올렸다.

‘정요에겐 크고 작은 은침이 수십 개나 든 함이 있었지! 이 천한 것, 반드시 되갚아주마!’

태자는 이를 갈며 은침을 뽑고 나무에 주먹을 내리쳤다.

* * *

정아는 가뿐한 발걸음의 정미를 몇 번 쳐다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니?”

정아는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는 식사 후에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도무지 떠올리지 못해 물은 것이었다.

정미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내일이면 둘째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으니까, 조금 들떠서요.”

‘큰언니한테 저녁 식사 때 있었던 일을 알려주지 못해서 아쉽네. 그 은침은 아주 평범한 것이라, 태자가 혹시나 조사한다 해도 별로 두렵지 않아. 만약 조사하게 되면 정요도 벗어나지 못할 거고. 악몽 속, 그 상자 안의 칼과 교도, 그리고 은침들이 어찌나 아파 보이던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너 말이야, 나도 네가 둘째 오라버니와 사이가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머니께서 그 말을 들으면 속상하실 거야.”

정아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미가 많이 변하고 철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좋고 싫음을 숨기질 못하는구나.’

그때 정아가 갑자기 흥미가 생겨 정미에게 물었다.

“그럼 정미는 둘째 오라버니가 좋아, 큰언니가 좋아?”

정미는 잠시 당황하더니 대답했다.

“둘 다 좋아요. 그, 그건 비교할 수 없어요―”

“둘 다 네 형제인데 왜 비교할 수 없어?”

정아가 여동생의 반응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이, 정미의 귀 끝이 점점 빨개졌다.

“그냥 비교할 수 없어요. 큰언니, 내일 제가 출궁하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걸 물으시는 거죠?”

‘당연히 비교할 수 없지. 큰언니는 내 자매이자 가족이고, 내가 평생 평안하길 바라는 사람인걸. 하지만 오라버니는 내 오라버니이면서 내가 은애하는 사람이기도 해. 이번 생엔 함께할 수 없겠지만, 다음 생엔 절대 놓치지 않을 사람이야.’

정미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기쁨인지 원망인지 모를 감정이 들었고 어여쁜 얼굴에 약간의 슬픔이 드러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