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태자의 마음
정미의 기대 속에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지나가 벌써 7월이 되었다.
황제는 비빈들과 대신들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고 궁 안팎은 다시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후궁의 실질적인 집권자인 귀비는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귀비가 크게 아팠고, 이미 다 낫긴 했지만 아직 원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황제가 특별히 더 머무르다 돌아오라 전했다는 것이다.
귀비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태자는 황제와 함께 돌아왔기 때문에 동궁도 마찬가지로 떠들썩해졌다.
정미는 황궁에 보는 눈이 많아지자 더욱 불편해졌다.
정미는 정아 옆에 서서 가만히 태자의 말을 들었다.
“본궁은 원래 남아서 모비를 모시려고 했는데, 부황과 모비께서 태자비의 출산이 다가오니 돌아와 당신과 함께 있어 주라 하시더군. 태자비, 부황과 모비께서 이 황손을 아주 기대하고 계시네. 몸을 잘 보살펴야 하오.”
정아가 급히 대답했다.
“예, 신첩이 어찌 부황과 모비의 깊은 배려를 헛되이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 모비께선 좀 어떠신지요?”
“당연히 거의 다 나았지. 하지만 큰 병이 낫자마자 길을 떠날 순 없으니 부황께서 모비께 며칠 더 쉬다 돌아오라 한 것이오.”
“신첩, 송구스럽습니다. 모비께서 편찮으신데 곁에서 모셔드리지 못하다니요.”
태자가 마지못해 웃었다.
“당신이 간다고 하더라도, 부황께서 당신을 모비와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셨을 거요.”
정아는 화 귀비가 무슨 병을 앓았는지 이미 들었기에, 태자가 그 얘기를 하는 걸 꺼리지 않자 물었다.
“신첩이 듣기로는…… 모비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 어떤 신의께서 나타나 치료해주셨다던데요?”
“맞소.”
태자가 갑자기 정미를 힐끔 쳐다봤다.
“알고 보니 그 신의가 그대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더군. 장인어른의 말씀으로는 그대들의 먼 친척 자매라고 하던데. 정가의 소저들은 모두 의술에 자질이 있나?”
정아는 마음속 의혹을 누르고 웃으며 말했다.
“신첩은 친척 자매들 중 의술에 정통한 자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듣는군요.”
태자가 그녀를 한 번 흘겨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먼 친척이라 하니, 태자비가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때 태자가 정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본궁이 듣기로는 몇몇 궁녀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던데?”
정미는 태자가 자신과 정아 앞에서만 번지르르하게 굴고, 사실은 정요와 사통하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면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티 냈다간 정아가 난처해할 게 뻔했기에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저 사소한 노고였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언급할만한 가치도 없지요.”
태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태자는 평왕보다 키가 작았지만 용모는 화 귀비를 닮아 아주 출중했다.
창경제는 종종 그 점으로 서운해하곤 했지만, 태자는 알지 못했다.
태자의 웃음은 마치 만개한 봄꽃처럼 사람을 홀렸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미가 정말로 많이 컸군. 본궁과 이리 말을 주고받다니. 태자비, 기억하고 있소? 몇 년 전엔 정미가 내 옷자락을 붙잡고 ‘형부’라고 불렀었는데.”
자신의 흑역사가 떠오르자 정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아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태자께서 예전엔 정미를 이리 눈여겨보지 않으셨는데.’
정아는 정미를 한 번 흘겨봤다. 열네 살의 소녀는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나뭇가지에 천천히 피어오르는 꽃망울 같았다.
‘그래, 내가 잊었구나. 지금 정미는 예전과 다른 모습이니 태자의 마음이 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정아는 겉으론 티 내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화가 치밀었다.
‘이건 당연히 내 여동생에 대한 화가 아니라, 눈앞의 이 사내에 대한 분노다! 일국의 황태자라는 이유로 내 평생을 바친 것도 모자라, 내 여동생까지 해칠 셈인가? 역시 정미를 오래 궁에 머물게 해선 안 되겠어. 지금은 정미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정아는 결국 겉으로 약간의 이상함을 드러냈고 이에 태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내가 어느 궁녀를 침상으로 데려가든 태자비는 늘 관대하고 너그러웠는데, 지금 제 여동생과 고작 몇 마디 나눴다고 기분이 상한 건가? 제 여동생에게 나를 뺏길까 두렵기라도 한 건지. 어쩐지 정요가 내게 몇 년 동안 마음을 기울이면서도 절대 선을 넘지 않더라니.’
태자 정도의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반골 기질이 있기 마련이었다.
태자는 그저 정미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특히 궁으로 돌아온 뒤 내시로부터 이 어린 소녀가 어떻게 궁녀들과 숙비의 병을 치료해주었는지와, 평왕이 매일 궁으로 찾아왔다는 일을 들으니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몇 마디 묻지도 않았는데 태자비가 이리 경계하니, 태자의 호기심은 흥미로 뒤바뀌었다.
‘태자비처럼 목석같은 사람은 규율은 잘 지키지만, 재미는 조금도 없지. 하지만 정가의 셋째는 어엿한 아가씨가 된 후론 정가 자매 중 용모가 가장 출중한 것은 물론이고, 성정도 꽤 재미있어. 내가 신선함을 좀 즐겨본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평왕? 하하, 예전에도 나와 겨룰 자격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 자격이 없지!’
태자는 아예 거리낌 없이 정미를 훑어봤다.
‘내시의 말을 들어보니, 이 계집이 춤을 출 줄도 안다던데 춤사위도 아름답다고 하더군. 기회가 되면 한 번 감상해봐야겠어.’
성인 사내에게 마음이 생기면 대부분은 성욕과 이어지곤 했다.
태자는 깊은 눈빛으로 티 나지 않게 소녀의 얇은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얇고 긴 다리를 훑어봤다.
‘이런 몸매라면, 춤사위만 아름다운 게 아니겠군.’
정미는 태자의 독사 같은 눈빛에 온몸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몰래 이를 갈았다.
‘만약 태자의 신분과 큰언니가 없었다면, 벌써 신발을 벗어 이자의 얼굴에 던져버렸을 텐데.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람!’
“정미에게 그런 의술이 있다고 하니, 본궁도 한번 봐주게. 며칠 바삐 돌아오느라 몸이 편치 않군.”
태자가 천천히 손목을 내밀었다. 맥을 짚어보란 뜻이었다.
정미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태자의 마음을 알 리 없었지만, 그가 뻗은 손목은 분명 아주 아름다웠음에도 정미에겐 그저 역겹게만 느껴졌다.
‘정요의 손을 만졌던 손이잖아. 절대 닿고 싶지 않아!’
“전하, 신녀는 태산과에만 정통합니다.”
정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나는 궁 안이든 밖이든 부인에게만 진료를 보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태자의 입꼬리가 씰룩이더니 멋쩍은 듯 손을 거두었다.
“그렇군. 태자비, 본궁은 방금 돌아와 처리할 일이 많소. 저녁에 여기로 와 식사를 하도록 하지.”
“살펴 가십시오, 전하.”
태자가 떠난 뒤, 정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미―”
정아가 입을 열었다. 어린 동생에게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언니가 너를 꺼릴 거라는 오해도 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으나, 입을 열었다가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정아는 입을 다물었다.
‘아들이 크면 아버지를 이겨 먹지. 정미는 이 진리를 어떻게 스스로 터득한 걸까? 그러니까 내 아기, 이 아기를 꼭 무사히 낳아서 잘 키워야겠어.’
정아는 배를 어루만졌다.
정아는 정미를 온종일 자신의 곁에 지내게 하여 태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이후 정아는 태자가 말한 ‘먼 친척 자매’ 이야기를 사람을 보내 한 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한 씨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고, 둘째 나리에게 물어보자니 그저 맹 노부인의 처가 쪽 친척 자매의 손녀이고, 지금도 청량산에서 귀비마마를 모시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정아와 정미의 의혹은 귀비가 돌아온 날 풀리게 되었다.
* * *
화 귀비가 돌아오자 정아는 무거운 배를 안고 인사를 올리러 갔다. 동궁에 혼자 남은 정미의 마음은 왠지 편치 않았다.
저녁이 되자, 화 귀비는 장춘전(長春殿)에서 주연을 베풀었고 정미는 그제야 그녀를 보러 갈 기회가 생겼다.
장춘전으로 가는 길, 정아가 정미에게 당부했다.
“귀비마마께서 그 먼 친척 여동생도 궁으로 데리고 오셨다는구나. 내가 낮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땐 보이지 않았는데, 저녁 식사 때엔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정미, 나는 왠지 이 일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 이따 그 친척 아이를 보더라도 어떻든 간에 침착해야 한다.”
정미는 손을 뻗어 정아의 손을 붙잡았다.
벌써 회임 8개월 차가 된 정아의 손은 조금 부어있었다. 정미는 이따 큰언니에게 부종을 없애는 부수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무모하게 굴지 않을게요.”
* * *
화 귀비의 거처인 장춘궁은 숙비의 소순궁보다 훨씬 기품있었다. 이것은 비단 장춘궁의 크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유리기와와 희귀한 꽃과 나무, 진금(*珍禽: 보기 드문 새)들, 넓고 깨끗한 금전(金磚)길은 주인의 존귀함을 드러냈다.
정미는 사람을 비출 정도로 반짝거리는 금전길을 걸으며 혹시나 정아가 미끄러질까 봐 그녀를 꽉 붙잡았다.
정아는 절로 웃음이 나와 말했다.
“그리 조심할 필요 없어. 이 길은 나도 자주 걷는걸.”
‘회임 전엔 며느리로서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으니.’
그동안 정아는 이 시어머니의 태도를 도무지 종잡지 못했다.
처음엔 화 귀비의 조카가 궁에 들어올 길이 끊어져 정아가 순조롭게 태자비가 될 수 있었으니, 화 귀비가 절대 입을 열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최근 몇 년은 또 화 귀비가 정아에게 호의를 드러냈던 것이다..
정아의 걱정과 정미의 호기심 속에 두 사람은 장춘궁에 도착했다.
“태자비마마 납시오―”
내시의 외침 속, 정아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정미를 데리고 들어간 뒤 엎드려 절했다.
“며느리가 모비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어서 태자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거라.”
화 귀비의 나른한 목소리는 태자와 비슷했다.
“몸이 무거우니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화 귀비는 새로 물들인 연한 남색의 손톱을 어루만지다가 무릎을 꿇고 있는 정미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오랜만에 보았더니 키가 더 큰 것 같구나. 일어나 본궁에게 얼굴을 보여주거라.”
정미가 일어났다.
화 귀비의 시선이 잠시 정미의 얼굴에 머물더니 웃으며 말했다.
“역시 갈수록 아름다워지는구나. 태자비, 자네는 너무 어렵게 굴지 말고 여동생을 데리고 자리에 앉거라. 오늘 밤엔 우리 몇 명뿐이고 본궁도 그대 자매들을 서로 만나게 하려고 한 것뿐이니. 그래, 이따 태자도 올 것이네.”
태자비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궁녀를 한 번 훑어봤다.
“소(霄) 아가씨를 모셔오거라.”
“예.”
잠시 후, 주렴이 흔들리고 냉매(冷梅)의 그윽한 향기가 풍겨왔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인지라 이런 시원한 향은 조금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확실히 기분을 상쾌하게 끌어올려 주었다.
정미는 숨을 죽이고 입구를 쳐다봤다.
궁의를 입은 소녀가 천천히 걸어들어오자, 정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진작에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았더라면 손에 든 찻물을 엎었을 것이다.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소녀는 정요가 분명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예전과 확실히 조금 달랐다. 예전의 정요는 물 위에 갓 핀 연꽃 같았다면, 눈앞의 소녀는 한풍 속에 핀 매화처럼 고결하고 도도해 보였다.
정요는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았었지만, 눈앞의 소녀는 입은 옷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말라 있었고 뼛속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변했든 간에 정미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이 정요였다!
‘설마 미꾸라지가 등껍질을 뒤집어쓴다고 거북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정미는 저도 모르게 정아를 쳐다봤다.
정아는 정미를 진정시키듯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정아의 손끝도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정아의 차가운 손이 느껴지자, 정미는 오히려 침착해져 정아의 손을 맞잡았다.
‘큰언니가 놀랐어. 그러니 나도 더욱 당황해선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