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늦게 돌아오다
며칠 동안 평왕과 마주친 결과, 정미는 평왕이 고의로 자신을 괴롭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히 숙비의 대하증은 7일 동안만 부수를 마시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마지막 한 잔을 숙비에게 주었을 때 정미는 숨통이 트였다.
‘다신 소순궁에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러나 기뻐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을 때, 소순궁에서 다시 정미를 찾아왔다.
숙비의 심복 유모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태자비에게 절을 올리더니, 곧바로 정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여(厲) 유모, 너무 과하네.”
정아가 급히 사람을 보내 그녀를 일으켰다.
여 유모는 머리를 바닥에 한 번 더 부딪히고 나서야 말했다.
“태자비마마, 노노(老奴)를 말리지 마십시오. 숙비마마께서 노노에게 마마 대신 셋째 아가씨께 감사를 표하라 분부하셨습니다.”
“병이 다 나은 것이냐?”
“예, 다 나았습니다. 셋째 아가씨는 정말 신통하십니다. 병이 7일이면 다 나을 거라 하시더니, 정말 7일째에 다 나았으니 말입니다.”
여 유모는 몹시 기뻐하며 빛나는 눈으로 정미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마마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 병으로 속앓이 해오셨는지 알고 있어. 전에 마마께서는 소진 도사도 찾았지만 낫지 않았는걸.’
“그건 마마께서 소식(素食)하시고 염불을 외시니, 그 성심에 부처님께서도 감동한 것이네.”
정아는 정미가 주목을 받길 원하지 않았다.
여 유모는 궁녀 몇 명의 손에 있는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마마께서 셋째 아가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여 유모는 선물 목록을 정아에게 건네주었다.
정아는 살짝 훑어보더니, 맨 윗줄에 적힌 야명주 열 알을 보자마자 감히 아래쪽은 보지도 못하고 급히 말했다.
“너무 귀중한 것들이구나. 내 여동생은 아직 어린 아가씨라 감당할 수 없어―”
정아는 숙비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정미에게 가볍게 물어봤을 때, 정미가 대답하지 않자 더 이상 묻지 않고는 그저 정미가 치료해준 궁녀들과 비슷한 정도의 병으로 여겼다. 이렇게 귀한 답례를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태자비마마, 거절하지 마십시오. 이건 저희 마마께서 셋째 아가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정아는 잠시 당황하다가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다가와 선물 목록을 건네받아 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여 유모, 나 대신 숙비마마께 감사 인사를 전해줘.”
여 유모가 활짝 웃었다.
“천만입니다, 아가씨. 마마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 하셨으니, 그때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정미의 침착했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녁 식사까지는 괜찮아. 괜히 마마께 폐를 끼치고―”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마마께서 노노에게 꼭 셋째 아가씨를 모셔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 유모가 떠난 뒤, 정미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정아는 며칠간 정미가 평왕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궁녀들을 내보낸 뒤 말했다.
“걱정 마, 정미. 오후에 큰언니가 소순궁으로 사람을 보내서 내 몸이 편치 않으니, 네가 여기 남아야 한다고 전하라 할게.”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숙비마마께서도 그저 핑계라는 걸 아실 거고, 기분이 좋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숙비마마의 병을 치료해드렸으니 앞으로 언니에게도 잘 대해주시겠지요. 지금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 없어요.”
정아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쉬었다.
“언니가 너를 말려들게 했구나. 정미 네가 나를 감싸줄 줄이야.”
정미는 말없이 다가가 정아를 껴안았다.
‘당연히 큰언니를 지켜야지. 큰언니가 무사해야 악몽 속의 일들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저녁이 되었을 때, 정아는 정미에게 꼼꼼히 당부하고는 정미와 함께 류영과 녹랍을 소순궁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황궁은 어린 여자아이가 오래 머물기엔 너무 위험해. 정미가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평왕과 얽히게 되었으니.’
정아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정미를 머물게 할 생각이었고, 출산 뒤에도 아이가 멀쩡하지 않으면 자주 궁에 부를 계획이었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소순궁 안, 숙비는 아랫자리에 앉아 있는 평왕을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아, 설마…… 정가의 셋째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는 게냐?”
평왕은 절름발이가 된 후부터 성정이 삐뚤어져 태자보다 몇 살이나 많은데도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숙비가 혼사 얘기를 꺼낼 때마다 다투게 되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묻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어미로서 어찌 조급하지 않겠는가?
평왕은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숙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차갑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숙비는 늘 겉과 속이 다른 아들을 믿지 않았다.
‘정가의 셋째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면, 왜 굳이 소순궁에 온 건데?’
그녀의 아들은 후궁에 거의 찾아오지 않았고, 모처럼 소순궁에 와도 차도 마시지 않고 곧바로 떠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숙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겠다 한 것이다.
‘그 애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숙비는 정미가 마음에 들었다.
‘그 아가씨는 용모도 출중하고 도량도 크지. 특히 부술을 잘 알고 있으니, 진이가 그 아이와 혼인하게 되면 좋은 점이 많아.’
숙비가 조심스럽게 평왕을 한 번 훑어보자, 평왕은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모비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정가의 셋째 소저에게 마음이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모비도 그냥 물어본 거란다.”
숙비는 아주 오랫동안 아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기에 혹시나 평왕이 떠날까 봐 급히 그의 말을 따랐다.
평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생모를 원망했다. 하지만 모비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원망보다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평왕은 눈을 내리깔고 새하얀 찻잔을 쳐다봤다. 왜 자신이 여기 남아있으려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떠날 마음이 없을 뿐이었다. 궁녀가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왔다고 보고하자, 그제야 찌푸린 눈살이 풀렸다.
‘이렇게 늦게 오다니,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
정미는 들어오자마자 평왕이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게 복이든 화든 피할 수 없겠어. 다행히 숙비마마께서 옆에 계시니 평왕도 언행을 삼가겠지.’
스스로를 위로한 정미는 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정미의 예상대로 평왕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숙비가 정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리 예를 갖출 필요 없다. 본궁이 너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니.”
‘식사를 할 땐 말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에 따라, 세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했고 정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식사 후, 석양이 지며 붉게 물든 구름이 서쪽 하늘을 가득 메웠다.
궁녀가 정미에게 최고급 향명(*香茗: 어린 싹으로 만든 고급 차)을 내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그 뒤로 보이는 숙비의 얼굴이 더욱 온화해 보였다. 목소리도 따뜻한 찻물에 적셔진 듯 부드러웠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신녀, 열네 살입니다.”
“열넷이라, 좋은 나이구나. 급계례는 언제이지?”
숙비는 정미가 준 부수를 일주일간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어왔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평왕이 옆에 앉아 있자, 정미는 왠지 말하기 불편했다.
‘이 왕야는 역시 이상해. 여인끼리의 잡담을 듣기나 하고 말이야.’
“신녀의 생일은 화조절입니다.”
“그럼 반년도 남지 않았구나. 그때가 되면 본궁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본궁은 못 가더라도 선물은 꼭 보낼 테니.”
“마마, 괜찮습니다. 신녀의 급계례는 그리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나 평왕이 선물을 보내오면 괜히 기분만 나빠진다고.’
“그 말은 틀리지. 급계례는 한 여인 평생의 대사(大事) 아닌가. 급계례를 치룬 뒤에는 시집을 갈 수 있는 어엿한 아가씨가 될 테고. 그래, 이미 혼사는 정해졌고?”
‘화제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정미는 왠지 불편해져 솔직히 말했다.
“신녀는 부술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뿐이라, 혼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숙비는 깜짝 놀랐다.
“부모가 동의한 부분이더냐?”
“어머니께선 알고 계십니다.”
‘거짓말은 아니지. 이미 어머니께 몇 번이나 말씀드렸으니 어머니도 당연히 알고 계실 테니까. 믿거나 말거나 답은 똑같아. 숙비마마께서 어머니를 찾아가 물어보실 리도 없고.’
사실 부술을 더 깊이 알수록 정미는 한 씨를 설득할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을 느끼곤 했다.
정미는 더 이상 혼사를 미룰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면, 자신에게 시집을 강요할 때 집을 나가버릴 거라고 통보할 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딸이 유명한 부의가 되는 게 비구니가 되는 것보다 낫겠지.’
“그렇구나.”
숙비는 멍해졌다.
‘내가 궁에 너무 오래 있었나? 요즘 아가씨들은 모두 이렇게 용감한 거야?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말도 이리 쉽게 하다니? 이런 며느리라면 아무래도 다시 심사숙고해봐야겠구나!’
“큼큼, 진아. 시간이 꽤 늦었구나. 너도 출궁해야겠어. 곧 궁문이 닫힐 테니.”
‘역시 아들과 이 아이는 덜 마주치게 하는 게 좋겠구나.’
그러자 평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들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숙비는 처음으로 아들을 얼른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평왕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덧붙여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아들이 셋째 아가씨를 데려다주지요.”
숙비는 멍해졌다.
‘내가 말했지. 내 아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 * *
등불이 켜지자, 궁 안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낮처럼 떠들썩하지 않았고 짜증 나는 매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졌다.
정미는 여러 가지 대책을 생각해놓으며 무표정으로 평왕의 뒤를 따랐다.
“넌 본왕을 두려워하지 않는군.”
평왕이 발걸음을 멈추고 정미가 쫓아오길 기다리더니 말했다.
“왕야께선 홍수도 맹수도 아니신데, 신녀가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평왕이 정미를 한 번 흘겨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날렵한 턱을 움켜잡았다.
정미는 평왕이 궁 안에서 자신에게 손을 댈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크게 놀라 무의식적으로 그를 걷어차려고 했다. 뒤따라오던 류영이 깜짝 놀라 외쳤다.
“셋째 아가씨!”
결국 끝내 걷어차지 않았지만, 정미는 분노하며 평왕을 노려봤다.
평왕이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화낼 줄도 알면서, 왜 태산이 앞에 무너져내려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정미가 차갑게 대답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참을 수밖에 없고, 또 어떤 사람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화를 낼 수 있을 뿐인 겁니다. 왕야께선 어찌 저 같은 어린 소녀를 난처하게 하시는 겁니까?”
평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음미하듯 웃으며 말했다.
“바로 나는 왕야이고, 너는 그저 어린 소녀일 뿐이기 때문이지. 본왕이 너를 난처하게 하고 싶다는데, 네가 어쩔 수 있겠느냐?”
그 포악한 두 눈을 마주하자 정미는 마음속으로 굴욕감을 느꼈다.
‘맞아. 지금 나는 그저 어린 소녀일 뿐이지. 소중한 사람들의 평안을 지키는 게 가장 큰 소원이고, 그 소원을 이루고자 전전긍긍하는 소녀일 뿐이야. 하지만 언젠간 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부의가 되는 날이 올 거다.
현청관의 역대 관주들은 황제의 허리도 굽게 할 수 있었어. 황제만큼 존귀한 사람도 병이 날 수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정미는 다시 차분해졌다.
평왕이 이보다 더 과분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 믿었다.
‘큰언니를 위해서라면, 말로만 하는 괴롭힘쯤은 참을 수 있어!’
“재미없군.”
평왕은 갑자기 손을 놓더니 천천히 떠나갔다.
그가 아주 천천히 걸을 땐, 절름발이인 게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가는 평왕의 마음은 정미가 재미없는 것보다 이곳이 황궁 안이라 재미없다 느끼는 것이 더 컸다.
정미는 류영과 녹랍에게 태자비가 걱정할 수 있으니 평왕과의 일을 절대 알리지 말라 당부했다.
그녀는 동궁으로 돌아와 목욕을 마친 뒤, 침상에 누워 눈을 크게 뜨고 휘장 꼭대기의 금고리를 쳐다봤다.
‘둘째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오라버니도 내가 보고 싶겠지?’
정미는 정철의 얼굴을 떠올리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모든 걱정거리가 잠시 잊히는 것만 같았다.
‘분명 나를 보고 싶어 하고 있을 거야. 오라버니는 평생 내게 마음을 털어놓지 않겠지만, 난 알고 있어. 큰언니가 무사히 출산하고 나면 나도 출궁할 수 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