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괴롭히다
“오, 이제 본왕이 누군지 알겠느냐?”
평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하긴, 본왕이 걷는 모습을 보면 수도의 그 누가 알아보지 못할까?”
정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들어 차분하게 말했다.
“차를 내온 궁녀가 평왕께서 오셨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평왕을 처음 봤을 땐, 절름발이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평왕은 잠시 멍해졌다.
‘좋은 핑계로군.’
그는 마침내 정미를 자세히 살펴봤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소녀는 훤칠한 키에 얇은 허리와 긴 다리로, 왠지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궁 안에서 낯선 왕야의 감정 기복에도 또래의 아이들이 보여야 할 불안함과 어색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침착했다.
‘정말 완벽한 아가씨로군.’
평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무 완벽해서 미울 지경이야!’
평왕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평왕이 아무 말 하지 않자, 정미는 계속 무릎을 꿇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보통 여인들은 다리에 힘이 별로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가 저리고 종아리가 떨려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미는 어려서부터 규율을 잘 지키는 얌전한 규수가 아니었고, 덕소 장공주부에게서 승마와 궁술을 배운 뒤론 매일 시간을 내어 무릎을 굽히고 버티며 다리 힘을 키웠다. 그래서 조금 오래 꿇고 있는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평왕은 정미의 추태를 보기로 결심했는지,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아가씨를 이렇게 난처하게 하는 건 군자답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왕이고, 내가 원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
한편 정미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더 무릎을 꿇고 있다간 정말 추태를 보이겠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추태를 보인 적은 아주 많아.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고.’
추태를 부리게 되면 정요에게 놀아나던 과거가 떠올랐다.
정미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방금의 대치는 그저 평왕 혼자만의 착각으로 느껴졌다.
“방금 숙비마마께서 부르셔서, 신녀는 마마께 진료를 봐 드려야 합니다. 마마를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도, 왕야의 시간을 허비하게 할 수도 없으니, 신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평왕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안내하는 궁녀를 따라 떠났다.
평왕은 정미가 이 정도로 대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주렴만 흔들리고 있었다.
평왕은 이를 갈다가 정미가 떠난 방향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떠났다. 그리고 소순궁을 나올 때쯤 곁에 있던 내시에게 말했다.
“그 정가의 셋째 소저가 매일 언제 여기로 오는지 물어보고 오거라.”
* * *
정미는 괴상한 성정의 평왕에게 찍힌 줄도 모르고 침전에 들어섰다. 짙은 단향목 냄새가 풍겨왔다.
“본궁 곁으로 와 앉거라.”
숙비의 말투가 어젯밤보다 다정해졌다.
정미는 숙비의 곁으로 가 앉아 그녀의 얼굴을 한 번 살펴보았다. 대낮의 숙비는 등불 아래서 봤을 때보다 몇 살은 더 늙어 보였고, 귀밑머리의 흰머리와 눈가의 주름은 조금 초췌해 보이기까지 했다.
‘숙비는 화 귀비보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던데, 평왕도 태자와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화 귀비는 정미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정미의 눈빛을 느꼈는지, 숙비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본궁도 나이가 많이 들어 흰머리가 갈수록 많아지는구나.”
아양을 떨 줄 아는 아이였다면, 분명 ‘마마께선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라고 말했겠지만, 정미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비가 웃었다.
“자, 본궁의 흰머리를 뽑아주거라.”
“아프실 텐데요.”
정미는 꿈쩍 않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흰머리는 뽑아도 다시 나고요.”
사실은 백발을 검게 만드는 부수도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궁에서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며 사람의 겉만 봐서는 안 된다는 정아의 당부가 떠올라 마음을 접었다.
숙비는 정미가 이렇게 솔직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래, 흰머리는 뽑아도 다시 나는데 굳이 아프게 뽑을 필요 없지. 자, 본궁에게 부수를 만들어 주거라.”
정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황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보다 부술 연구에 몰두하는 게 훨씬 좋겠어. 큰언니가 출산한 뒤론 자주 오지 말아야지.’
정미가 조제한 부수를 마신 뒤, 숙비는 곧바로 정미를 보내지 않고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숙비는 차분한 분위기의 인물이었고, 눈가의 잔주름 때문에 더욱 인자해 보여 그녀와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을 놓고 잡담을 나누곤 했다.
어린 평왕이 말썽을 피웠던 일들을 얘기했을 때, 숙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딸이 좋구나. 너처럼 이리 철든 딸 말이야. 평왕은 물론이고 다른 몇몇 가문의 아들들도 늘 어른들을 골치 아프게만 하지. 참, 본궁이 듣자 하니 네가 황 소경 아들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던데?”
숙비가 갑자기 이 일을 묻자,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
“마마, 황봉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 그 이름이 맞는 것 같구나.”
비밀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숙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니 정미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숙비가 이리 묻는 건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정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만나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럼, 네가 정말 상처의 피를 멎게 하고 다치기 전처럼 되돌릴 수 있단 말이냐?”
숙비의 따뜻한 눈동자에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묻어나왔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정미는 더 이상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혜에게 몸을 빼앗기는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숙비마마의 나이에 소식하고 염불까지 외시면서 이런 아이 같은 눈빛을 보내는 건 조금 이상한 일 아닌가?’
“할 수는 있습니다. 상처가 심하지 않다면요.”
정미가 대답했다.
처음엔 얼른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부술에 대한 일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와서 거짓말을 하는 건 현명하지 않은 일이리라.
숙비는 눈을 반짝이며 칭찬했다.
“정말 신기하구나.”
그러자 정미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마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부의라면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느냐? 본궁은 그 분야는 잘 몰라서.”
숙비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사람을 불러 정미를 배웅했다.
* * *
정미는 동궁에 돌아와 정아를 마주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정미가 평왕을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하자, 정아는 안색이 조금 안 좋아지며 자책했다.
“내 생각이 짧아 정미를 고생시켰구나. 앞으로 평왕을 또 마주치면 절대 그와 부딪혀선 안 돼.”
평왕은 한때 유력한 황태자 후보였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절름발이가 된 후, 황상은 이 장자를 각별히 아꼈고 태자도 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평왕이 만약 일부러 누군가를 괴롭힌다면, 태자비인 정아도 어떻게 지켜줄 수 없었다.
정아는 어린 동생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내 여동생인데, 평왕께선 어찌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걸까? 몸이 불편하니 마음도 좁아진 게 분명해!’
늘 온화하고 정숙하던 태자비는 보기 드물게도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한편 정미는 평왕을 그리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정미는 자신과 평왕은 교집합이 없는 사람이니, 이번 만남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정미는 수시로 창밖을 내다보며 점점 불안해졌다.
‘그 궁녀가 내 신발을 들고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정미는 불안한 마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창문을 열고 점점 어두워지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술정(*戌正: 술시의 한 가운데로, 곧 오후 8시를 말함)은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등불을 막 켜야 할 시간이었다.
정미는 결국 더 이상 그 일을 떠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큰언니는 신중하고 총명하니까. 나보고 가지 말라고 했으니 언니의 말을 들어야지. 내 호기심이 아무리 크더라도 언니한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아. 이 일은 작은 일화쯤으로 여기고 그냥 넘어가자.’
물론 정미는 왜 계속 그 일이 떠오르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관저전이라는 세 글자가 너무 쓸쓸하게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황후마마의 그 눈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하지만 정미는 그 비 내리던 날 밤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편안히 잠들었다.
* * *
다음 날, 정미는 또다시 평왕과 마주쳤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반쯤 사라졌다.
‘설마 왕야께선 사흘에 이틀은 이곳으로 오시는 건가? 그래, 지금 궁 안엔 이 왕야를 건드릴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듣자 하니, 내 모친의 병을 치료해주고 있다던데?”
평왕은 이번에도 절을 올린 정미를 일어나게 하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정미의 대답을 들은 평왕이 한걸음 다가오자, 그의 그림자가 정미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만약 진료를 잘못 보면, 무슨 결과가 기다릴지는 잘 알고?”
정미가 고개를 들고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녀가 혹여나 진료를 잘못 본다고 해도, 숙비마마께선 죄를 묻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의원은 신선이 아니었다. 의원이란 환자의 병을 꼭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태의서엔 아무도 남지 않았을 터였다.
“숙비마마께서 죄를 묻지 않는다지만, 본왕이 묻는다면?”
평왕이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침착하고 차분하고 점잖은 게…… 내 맘엔 전혀 들지 않아. 결국엔 그저 어린 계집일 뿐, 제아무리 배짱이 있다 한들 내 말에 조금도 겁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기어코 이 계집의 가면을 벗겨 놀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말 테다!’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다시금 확신했다.
‘나는 이 황궁이 조금도 마음에 안 들어. 우연히 만난 사내는 고작 둘 뿐인데, 태자고 평왕이고 정상인이 하나도 없으니!’
“왕야께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만약 네가 숙비마마를 치료하지 못하면, 너는 평왕부로 와서 본왕에게 차나 따르거라.”
평왕이 악의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계집이 과연 뭐라 대답하는지 봐야겠어. 태자비의 여동생이자 노위국공의 외손녀, 그리고 덕소 장공주의 반쯤 제자인 계집. 감히 나 평왕에게 말대꾸를 할 텐가? 말대꾸를 한다면, 따끔하게 다스려줄 방법이 백 가지도 넘게 있지!’
“그러셔도 됩니다.”
정미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평왕과 말씨름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변태에겐 조금의 침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싸움은 그저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하지만 내겐 이미 충분한 자신이 있어. 평왕이 나더러 때밀이 계집이 되라고 말한들, 어차피 그의 바람일 뿐 이루어지진 않을 테니까!’
평왕은 정미가 이렇게 시원스럽게 대답할 줄 몰랐기에 마치 솜뭉치에 주먹질을 한 듯 곧바로 힘이 빠졌다.
“그럼 신녀는 이만 숙비마마를 뵈러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미는 이 틈을 타 평왕에게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