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17화 (217/375)

217화. 평왕(平王)

“큰언니―”

정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관저전에 있던 미친 여인은 누구예요? 궁녀가 ‘마마’라고 부르던데.”

그러자 정아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정미를 살짝 쳤다.

“그런 건 알 필요 없단다.”

정미는 정아의 팔을 안고 흔들었다.

“큰언니, 그냥 알려주세요. 궁금한 걸 참기가 가장 힘들단 말이에요.”

이에 정아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주었다.

“사실 나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 관저전은 황후마마께서 여름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지. 네가 본 그 여인이 아마 황후마마이실 거야.”

“황후마마요?”

정미는 깜짝 놀랐다.

지금은 귀비가 권력을 쥐고 있었고, 대량의 황후는 사람들에게 잊혀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후가 미친 사람일 줄은 몰랐다.

정아가 탄식했다.

“듣기로는 그렇게 되신 지 오래됐다고 해. 나도 궁에 들어와서야 천천히 알게 되었어. 어쨌든 한 나라의 황후이니, 퍼져나가면 국통(國統)에 좋지 않으니까.”

정미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럼, 왜 황상께선 황후마마를 폐위하시지 않는 거예요?”

정아는 정미를 한 번 때리고는 꾸짖었다.

“간도 크지, 그런 질문을 하다니!”

“큰언니 앞이니까 물어보지요.”

정아는 배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께서 네게 말하지 않으셨구나.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황후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거든. 황후마마는 태후의 친조카고, 연주(燕州)의 명문가 출신이셔.”

태후에겐 아들이 없었기에 어릴 때 생모를 여읜 창경제를 슬하에 두었고, 그래서 창경제가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풍 씨를 황후로 두는 건, 세상 사람들 눈엔 황제가 양모에게 보답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태후께서 키워주신 은혜가 있는데, 황상이 어찌 황후를 폐위할 수 있겠어.”

정아가 말했다.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정아의 말을 들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주칠이 벗겨진 편액 위 새겨진 ‘관저전’ 세 글자는 세월을 따라 점점 잊혀져갔다. 그 광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서글퍼지리라.

정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황상은 황후마마께 조금의 애정도 없으신 거예요?”

정아가 손을 뻗어 어린 동생의 얼굴을 꼬집으며 중얼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애정이 있었다면, 어찌 지금 같은 상황이 되었을까? 황성 안의 사내들 중, 애정이 있는 사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정아가 자조하며 웃자, 정미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일어나며 말했다.

“큰언니, 일찍 주무세요. 저도 자러 갈게요. 숙비마마께서 내일 또 저를 부르겠다고 하셨거든요.”

* * *

비가 그친 후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고, 나뭇잎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방 안의 열기를 식히니 무더운 계절 중 모처럼 편히 잘 수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정미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여태 그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황후와 어머니가 친우였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됐어, 됐어. 그만 생각하자. 나는 그저 황궁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 아는 게 많을수록 성가셔질 거야.’

정미는 마침내 잠들었으나 연달아 꿈을 꾸다가 놀라 잠에서 깨어 얇은 이불을 끌어안고 멍하니 앉았다.

‘황후가 꿈에 나오다니.’

꿈속에서 황후는 정미의 신발을 안고 계속 울어댔고, 정미는 다가가 신발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다 결국 황후가 정미의 얼굴에 신발을 내리치는 순간, 꿈에서 깼다.

깨어난 뒤에도 황후의 눈이 생생히 떠올랐다.

‘미친 기색이 사라진 황후의 눈은 아주 아름다웠어.’

정미는 절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황후의 정신병은 이미 오래되어 병세가 복잡하지만, 내가 폄침과(砭針科)를 다 배우고 나면 시도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인걸. 내가 치료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

정미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이미 밝아져 오고 있었다.

정미는 침상에서 내려와 신발을 질질 끌며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흙냄새가 담긴 상쾌한 공기가 불어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머리가 맑아졌다.

“셋째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소궁녀가 정미의 기척을 듣고 얼른 걸어들어왔다.

소궁녀의 나이는 아직 어렸고, 태자비가 일부러 정미에게 보낸 시종이었다. 황궁 안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순수했고 얼굴은 사과처럼 동그랬다.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어.”

소궁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렸다.

“셋째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소인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에요.”

소궁녀는 말을 마친 후에야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은 채 당황하며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손을 뻗어 소궁녀의 얼굴을 꼬집고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칭찬해줘서 고마워. 걱정 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게. 그래,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데.”

“녹랍(綠蠟), 소인의 이름은 녹랍입니다.”

“그래, 기억했어. 녹랍, 물을 길어와 줘.”

그렇게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오전, 숙비가 정미를 소순궁으로 불렀다.

약접은 어젯밤부터 열이 났던 터라, 소궁녀 녹랍이 정미와 함께 소순궁으로 갔다.

정미는 소순궁으로 가는 길에서 참지 못하고 사방을 둘러봤다. 관저전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젯밤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무 길이나 찾아 들어갔던 터라, 지금은 조금의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낮의 황궁은 떠들썩했다. 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유난히 시원했다. 빗물에 깨끗이 씻긴 화초와 나무들은 더욱 선명한 빛깔을 뽐냈고, 밝은 태양 아래 생기 넘쳐 보여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궁녀들의 옷차림은 얇았고, 걸음은 사뿐했으며, 얼굴엔 옅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정미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낮의 황궁과 어젯밤의 황궁은 하늘과 땅 차이구나.’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모습이라도 그 조용함은 변하지 않았다.

황궁 안의 사람들은 조용히 걷고 조용히 웃고 조용히 일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오면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정미는 경직된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걸어오는 사람을 쳐다봤다.

‘이 심궁(深宮)에 사내가 있다고?’

그 사람은 빠른 속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평복을 입고 있어 정미는 그 사내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당당한 모습과 곁에 따라다니는 내시들로 보아, 평범한 신분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정미는 급히 옆길로 피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사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사내는 정미를 스쳐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내려다보았다.

“어느 궁의 사람인가?”

정미가 망설이자, 사내 뒤의 내시가 말했다.

“왕야께서 여쭈시는데, 어찌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신녀는 태자비마마의 여동생입니다. 잠시 동궁에 머물고 있지요. 왕야를 뵙습니다.”

정미는 괜히 성가셔질까 봐 솔직히 대답했다.

정미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분위기가 얼어붙은 것만을 느꼈다.

잠시 후,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본왕을 알아보지 못하는군.”

그렇게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정미가 고개를 들었을 땐 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키는 훤칠했고 아주 젊어 보였다. 그러나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그리 크게 절지는 않았지만, 키가 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탓에 더욱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여 다른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절로 탄식이 나왔다.

하지만 정미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세상엔 장애를 겪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게다가 의원의 눈엔 그 사내는 장애가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심각하다고 해도, 정미가 동정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미는 이어서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그 왕야는 계속 정미의 앞쪽에 있었다. 돌아가는 길목마저 같았다.

녹랍은 조용히 정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걱정했다.

“셋째 아가씨, 저분은 왜 계속 저희 앞에 계시는 걸까요. 설마 고의일까요?”

정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곳으로 가는 거겠지.”

녹랍은 아직 어려 계속 동궁에만 지냈기에 그 사내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미는 떠올랐다.

‘듣기로는 대황자가 절름발이라던데. 그리고 숙비마마가 바로 대황자의 생모이고.’

과연 정미의 추측이 맞았다. 소순궁에 도착하자, 궁녀가 차를 내오며 말했다.

“평왕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대량의 황실엔 자손이 풍족하지 않았고, 태자 세대에는 태자 외의 성년 황자는 평왕밖에 없었다. 평왕은 왕의 작위를 받은 뒤 궁 밖에서 살고 있었다.

정미는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한편, 숙비의 침실 안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모비께서 알아보라고 하신 일, 모두 여기 있습니다.”

평왕이 차가운 말투로 말하며 손바닥만 한 책자를 건넸다.

숙비는 책자를 건네받고 흥미로운 듯 넘겨보았다.

“정가의 셋째 아가씨는 역시 능력이 있는 아이였구나.”

숙비는 사비(四妃) 중 하나이자, 평왕의 생모였다. 그러니 궁 안의 소문만 믿고 사람을 불러와 치료를 맡길 순 없었다.

“예전에 네 사촌 누님이 신기한 이야기를 해줬는데, 장 재상가의 작은며느리가 이번 아이는 유산하지 않고, 몇 달 뒤에 출산할 예정이라 하더구나. 이것도 정가 셋째 아가씨의 공로였다니.”

숙비는 수도의 각 가문에 대부분 인척이 있었다. 그중 그녀의 조카딸 하나는 장씨 가문으로 시집갔다.

숙비는 처음엔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만 여기고 넘겼다. 그러나 최근 궁에서 갑자기 정가 셋째 아가씨의 고명한 의술에 대한 소문이 돌자 마음이 동해 시도해보고자 한 것이다.

숙비는 책자를 한쪽씩 넘겨보다가 멈칫했다.

“여기 황 소경의 아들이 몇 달 전 사냥을 하러 갔다가 곰에게 팔을 물렸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도 그 애가 치료했다고? 조금의 흉터도 남기지 않고?”

평왕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적혀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황 소경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 걸 들었을 뿐 믿을만하지는 않습니다. 모비, 별일 없으시면 아들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숙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평왕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臻)아, 남아서 모비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면 안 되겠느냐?”

숙비가 평왕을 따라 일어났다.

‘진아?’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평왕은 우스워했다.

‘지진지미(至臻至美), 여한 없이 완벽하다는 뜻이지. 하지만 이게 풍자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또 절름발이 황자가 뭐가 완벽하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 모든 건, 내 친모가 만든 일인데!’

평왕의 비웃는 얼굴이 보이자, 숙비가 처량하게 중얼댔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너도 이미 성인이 되어 자신만의 왕부가 있지 않으냐. 아직도 이 모비의 고충을 헤아릴 수 없는 게냐?”

“고충 말입니까?”

평왕이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는 태자보다 나이가 많았고, 어려서부터 공부와 무예 모두 태자보다 출중했다. 귀비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태자와는 견제도 되지 않았다.

‘나는 사내이자 황자다. 태자와의 싸움에서 지고, 일가의 목숨을 빼앗긴다고 해도 원망도 후회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그런 나의 날개를 부러뜨려 황위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고, 나는 보잘것없는 절름발이 왕야가 되었지!’

“모비는 그저 늘 네가 잘 지내기만을 바랐다. 잘 지내기만을…….”

숙비는 고통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는 듯 계속 염주를 쓰다듬었다.

‘내 아들은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든 무략(武略)이든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았지. 만약 그때 그렇게 어쩔 도리도 없이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직접 아들의 앞길을 망쳤겠는가.’

“모비께서 어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아들은 왕부에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평왕이 냉담하게 말했다. 얇은 입술 끝에 걸린 웃음기는 서리꽃처럼 차가웠다.

숙비는 넋을 놓은 채, 평왕이 걸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염주를 한 알씩 만지작거리자 마음이 점점 진정되어갔다.

“셋째 아가씨, 마마께서 들라 하십니다.”

정미가 일어나 들어가려 할 때, 평왕과 마주쳤다.

정미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으나 평왕이 무관심하게 지나가자 그제야 다시 일어났다.

그때, 평왕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엄하구나. 본왕이 일어나라 했던가?”

정미는 멍해졌다.

‘뭐야, 이 왕야의 성정은 내가 달거리를 할 때보다 더 이상하네!’

정미는 문 입구를 흘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숙비마마, 마마의 아드님께서 이리 꼬장을 부리는 걸 알고 계시는지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쨌든 왕야였기에, 정미는 얌전히 다시 절을 올렸다.

“신녀가 평왕을 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