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16화 (216/375)

216화. 사람이 오다

두 사람은 끊이지 않는 천둥과 빗소리를 들으며 침묵했다.

‘비가 빨리 그치면 좋을 텐데. 큰언니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정미는 복도 기둥을 짚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는 깜짝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약접을 쳐다봤고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약접,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소리요? 무슨 소리 말이에요?”

약접은 점점 어둠에 적응되어 정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약접의 목소리가 떨렸다.

“셋째 아가씨, 무슨 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아냐, 내가 잘못 들었나 봐.”

정미는 약접을 놀래키고 싶지 않았기에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때, 울음소리가 갑자기 또렷하게 들렸다.

약접은 창백한 얼굴로 정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세, 셋째 아가씨…….”

정미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귀신이 되어봤으니, 정말 귀신이 나타나더라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녀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다.

‘만약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정미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빤히 쳐다봤다.

약접도 정미를 따라 그곳을 쳐다봤다.

울음소리는 순간 더욱 우렁차졌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뚫고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마침 이때,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주위가 환해진 틈을 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창백하고 흉악한 얼굴의 여인이 두 사람에게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귀신이다!”

약접은 비명을 지르고 빗속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정미가 약접을 붙잡았다.

“약접, 비도 많이 내리고 번개까지 치잖아. 나가면 위험해. 저, 저긴 한 사람뿐이야!”

정미는 말하는 도중에 머리에 꽂은 금비녀를 뽑아 들었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허리를 숙여 자수 신발을 벗어 손에 꽉 쥐었다.

아쉽게도 궁에 들어올 땐 비수를 지닐 수 없었다.

약접은 정미를 보더니, 마음을 가다듬고 마찬가지로 비녀를 뽑아 들고 경계했다.

여인은 복도를 따라 곧장 달려왔다. 무겁고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는 망치가 두 사람의 가슴을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하필 번개가 연이어 내리치며 칠흑 같은 밤을 계속 밝히는 바람에, 그 여인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약접은 정미를 부축하고 있었지만, 다리엔 이미 힘이 풀려있었다. 결국 그녀는 버티지 못하고 정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기둥을 붙잡은 채 벌벌 떨었다.

여인이 점점 가까워지자, 침착하던 정미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신발을 던져 버렸다.

연습이라도 한 걸까, 자수 신발은 예쁜 곡선을 그리더니 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정확히 떨어졌다.

여인은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

정미는 허리를 숙여 나머지 신발 한 짝도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내 생각보다 약한 것 같은데.’

정미는 다시 몸을 세웠다.

‘됐어, 여긴 황궁이니까. 사람을 해치면 성가셔질지도 몰라.’

“약접, 저게 누구니?”

정미가 고개를 돌려 약접에게 물었다.

약접은 몹시 부끄러웠다.

‘태자비마마께서 위험한 상황에 내가 셋째 아가씨의 뒤에 숨었다는 걸 아시면 큰일 날 텐데.’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약접은 비녀를 꽉 쥐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 밤중에 미친 척하며 사람을 놀래키는 거지요?”

넘어진 후 계속 머리를 숙인 채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여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약접에게 달려들며 악귀처럼 울부짖었다.

“내 아기를 데려가지 마. 내 아기를 데려가지 마―”

약접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 쥔 비녀로 여인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자 정미가 약접의 손목을 붙잡았다.

“약접, 찌르지 마. 그저 미친 사람일 뿐이야!”

정미는 약접을 끌고 뒤로 물러났다.

방금 여인이 고개를 들었던 그 짧은 찰나에 마침 번개가 쳤기에 정미는 여인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분명했다.

여인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 정미와 약접을 쫓아오지 않았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정미의 자수 신발을 품에 안았다. 그러자 점점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여인은 신발을 안고 가볍게 토닥이며 중얼댔다.

“아가, 울지 말거라. 울지 마……. 어미가 여기 있으니 누구도 널 뺏어가지 못할 게다……. 하늘은 환하고 길은 멀구나. 북두칠성이 발치에 있으니, 돌아보지 말거라…….”

여인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하여 심금을 울렸다.

정미와 약접은 서로를 마주 봤다.

“셋째 아가씨, 그냥 가시지요. 비도 조금 사그라든 것 같습니다.”

정미가 복도 밖을 쳐다봤다. 정말로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당연히 가긴 가야지, 하지만―’

“셋째 아가씨, 뭐 하시려는 거예요?”

약접은 정미가 여인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정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정미는 목소리를 낮추고 설명했다.

“내 신발이 아직 저기 있는걸.”

약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아주었다.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이야. 이 미친 여인이 무슨 신분이든 간에, 셋째 아가씨의 신발을 여기 남겨둬선 안 돼.’

정미는 여인에게로 다가가며 어떻게 해야 신발을 뺏어올 수 있을지 열심히 계산했다.

계속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여인은 정미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신발을 품에 꽉 안고 경계하며 정미를 노려봤다.

“뭘 하려는 거야?”

“저는―”

정미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멈춰 섰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 절망스럽고 광기 어린 눈을 마주하자 차마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하네.’

정미는 마음속에 느껴지는 위화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고, 분위기는 곧바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때, 바쁜 발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잠시 후, 누군가 등롱을 들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궁녀 차림의 여인이었다. 입은 옷은 꽤 오래되어 보였고 손에 든 등마저 낡아 보였다.

그녀는 바닥의 여인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 달려들어 외쳤다.

“마마, 괜찮으세요?”

여인은 손의 신발을 들어 보이며 방긋 웃었다.

“괜찮다. 청아(靑娥)야, 이것 좀 보거라. 우리 아기를 찾았어. 아기를 찾았다고.”

“축하드립니다, 마마.”

청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인을 달래다가 여인이 조용해지자 일으켜 세웠다.

“마마, 소인이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청아는 한 손에 등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을 부축하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러고는 정미를 차갑게 한 번 쏘아보며 경고했다.

“어느 궁에서 오신 분인진 모르겠지만, 오늘 밤의 일은 잊는 게 좋을 겁니다. 괜한 화를 입지 않으려면요!”

“알겠다.”

“아셨으면 됐습니다.”

청아가 여인을 부축한 채 뒤돌아서자, 정미가 한 걸음 나아가 막았다.

“내 신발은 주고 가야지!”

그러자 청아가 멈칫했다.

이어 여인이 곧바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청아, 저것을 쫓아내줘. 내쫓아줘! 내 아이를 뺏어가려고 해!”

청아가 급히 여인을 달랬다.

“마마, 진정하세요. 소인이 바로 쫓아내겠습니다!”

청아가 다시 뒤돌아서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신발을 돌려드릴 수 없겠군요. 마마께서 발광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거든요.”

그러나 정미는 확고했다.

“안 돼, 내 신발을 여기 둘 순 없어!”

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하지요. 내일 술정(*戌正: 술시의 한 가운데로, 곧 오후 8시를 말함)에 다시 여길 찾아오시면, 신발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오지 않으시면 제가 이 신발을 없애버리고 뒷일이 없게끔 하지요. 어떠십니까?”

정미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청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저와 마마의 처지가 이 지경인데,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정미가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도 마침 정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정미의 마음속에 느껴지던 위화감이 더욱 짙어졌다.

‘이 미친 여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미는 귀신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접이 다급하게 불렀다.

“셋째 아가씨―”

정미는 여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뒤돌아서 약접을 잡았다.

“가자.”

그렇게 정미는 이미 많이 멎은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던 중 다시 뒤돌아보자, 청아가 든 등롱의 불빛을 통해 이미 칠이 벗겨진 편액 위의 세 글자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관저전(關雎殿)>

‘관저전, 좋은 이름이네.’

정미는 생각에 잠겼다.

‘그 여인은 한때 은애받았던 총비였을까? 결국 이 지경에 처하다니, 황궁은 역시 무서운 곳이구나.’

“약접, 얼른 가자.”

정미는 잠시도 이곳에 더 남아있고 싶지 않았고, 약접과 손을 잡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해시(*亥時: 밤 9시부터 11시까지)가 다 되어갈 무렵, 정아는 불안해하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다가 엉망이 된 정미의 모습이 보이자 곧바로 품에 안으며 말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거절할 걸 그랬어.”

정미가 급히 정아를 밀어냈다.

“큰언니, 몸이 다 젖어서 차갑습니다. 안지 마세요.”

정아는 정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 상처도 보이지 않자, 그제야 숨을 돌리고는 궁녀에게 명령했다.

“어서 셋째 아가씨께 따뜻한 물을 준비해드리고 생강차를 끓여오너라.”

정미는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욕실로 갔고, 꽃잎이 가득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목욕을 마친 후, 깨끗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자 정아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미가 다가가 앉아 정아에게 물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정아는 탁자 위의 생강차를 가리켰다.

“우선 마시렴.”

정미가 잔을 들고 얌전히 한 모금씩 마셨다.

정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보았고, 정미가 생강차를 다 마시자 손수건을 꺼내 정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궁녀들을 내보내고 나서 물었다.

“길을 잃었던 거야?”

정미는 정아와 마주 보았다. 정아의 따뜻한 눈빛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미는 이 황궁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며 당연히 친언니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등롱도 다 꺼져버렸거든요. 저와 약접 모두가 당황해서 아무 길이나 따라 뛰다가 관저전으로 들어갔어요…….”

정아는 이미 약접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뒤였기에 정미의 말에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정미의 말이 끝나자, 정아가 정색하며 말했다.

“신발 하나쯤이야 잃어버린 셈 치렴. 내일 저녁엔 찾아가지 말고.”

“괜찮을까요?”

“괜찮아. 네가 소순궁을 간 게 숨겨야 할 일도 아니고, 비를 맞으며 돌아오다가 신발 한 짝 잃어버린 게 뭐 어때서? 관저전은 갈만한 곳이 아니야. 그 궁녀도 네가 오지 않으면 신발을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괜찮아. 그 궁녀가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걸로 피해를 줄 수 있겠어?”

정미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저는 큰언니한테 폐를 끼쳤을까 봐 걱정했거든요. 큰언니가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가지 않을게요.”

정아는 안심하며 웃었다.

‘내 어린 동생이 점점 철이 들어가는구나.’

정아는 손을 뻗어 정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럼 일찍 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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