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이름을 알리다
정미는 비서거로 돌아와 날짜를 세어보았다. 화서에게 두 번째 배원부를 줄 날이 다가왔음을 알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결국 정혈로 부수를 만들어 환안에게 위국공부로 보내주라고 했다.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하룻밤을 푹 자고 일어나자 그동안의 피로가 말끔히 풀렸고, 그제야 생기발랄하게 궁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좀 어때?”
“걱정 마세요. 어머니는 다 나으셨어요. 그러니 돌아왔지요.”
정아는 사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정미의 손을 잡았다.
“고생했구나. 마침 날씨도 좋으니, 정원에서 같이 걷자.”
정미는 당연히 승낙했다.
두 자매는 어화원(禦花園)으로 가지 않고 동궁의 화원에서만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
정아의 배는 아주 많이 불러있어서 밖으로 나올 때마다 아주 많은 궁인들이 따라다녔다.
정미는 정아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뒤에 있는 궁녀가 양산을 들어주었고, 몇몇 궁녀들은 부채를 부쳐줬다. 꽃이 만개하고 나비와 벌이 춤추는 화원에 있으니, 궁전 안보다 훨씬 편안했다.
정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 욕심부리지 않을 거야. 내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 지낼 수만 있으면 돼.’
“정미, 저기 나비 두 마리 좀 봐. 보기 드문 푸른색이네.”
정미가 나비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귀하지요.”
대궁녀 유형이 맞장구를 쳤다.
“마마, 마음에 드시면 약접에게 잡아 오라 하시지요. 분명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약접이 발을 동동 굴렸다.
“마마, 유형 좀 보시지요. 마마의 총애를 믿고 소인을 함부로 부립니다.”
정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희 둘이서 같이 가면 되겠구나. 잡은 아이에게 상을 주마.”
약접과 유형은 동시에 ‘예.’하고 대답하고는 부채를 들고 나비를 잡으러 갔다.
소궁녀들은 환호하며 응원했다.
반주향(*半炷香: 향 한 개의 반이 타는 시간으로 약 15분) 뒤, 약접이 땀을 뻘뻘 흘리며 푸른 나비 한 마리를 받들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태자비마마, 한 마리 잡았습니다.”
“역시 약접 언니는 대단해.”
궁녀들이 잇달아 칭찬했다.
유형이 다가오더니 성난 체하며 말했다.
“안 잡을래. 나비들도 사람을 가리나 봐! 같은 집안사람이라도 되나? 어서 한번 보자. 약접 언니랑 나비랑 닮았는지.”
유형이 약접의 손을 잡아당겨 나비를 보려 하자, 약접은 손을 뻗어 그녀를 한 대 때리려 했다. 그때, 무거운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비명이 들려왔다.
정미는 정아를 단단히 부축한 채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부채를 부치던 궁녀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약접의 손이 풀리는 바람에 푸른 나비는 손바닥에서 날개를 움직이더니 날아가 버렸다.
약접은 다급한 표정으로 쓰러진 궁녀를 쳐다보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태자비마마, 송구하옵니다. 연아(娟兒)가…… 몸이 좋지 않아서…….”
쓰러진 궁녀의 이름은 연아였고 약접의 사촌동생이었다. 원래는 동궁에서 일하지 않았지만, 태자비를 모시는 약접 덕분에 동궁으로 옮기게 되었다.
태자비는 늘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회임 중이라 최근엔 성정이 예전만큼 좋지 못했다. 궁녀가 태자비를 모시다가 기절하고 태자비를 놀라게 했다면, 그건 중죄였다.
게다가 비천한 궁녀에겐 아플 자격조차 없었다.
정아는 눈살을 찌푸린 채 두 눈을 꼭 감은 연아를 한 번 쳐다보고, 겁먹은 채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있는 약접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는 우선 연아를 데리고 서늘한 곳으로 가 쉬거라. 약접, 연아가 어디가 아픈 것이냐?”
정아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말했지만, 늘 가까이서 그녀를 모시던 약접은 태자비의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비는 홑몸이 아니었으니 궁녀에게 병이 옮기기라도 하면 아무리 너그러운 사람이라도 화가 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약접은 이를 악물고 사람들 앞에서 사실을 털어놓았다.
“마마, 연아에게 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그저 달거리가 와서…….”
연아는 달거리가 온 첫날이면 늘 죽을 만큼 아파했다.
후궁 안, 연아 같은 궁녀 신분은 물론이고, 낮은 계급의 비빈들조차 어의를 모실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몸이 좋지 않으면 궁 안에서 의술을 아는 의녀를 찾아가 진료를 봤고 대부분은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정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됐다, 연아는 가서 쉬게 하거라. 앞으로 이럴 땐 본궁의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다.”
“태자비마마의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약접은 속으로 계속 한숨을 쉬었다.
‘연아에게 이런 골칫거리가 있으니, 앞으로 태자비마마 곁에서 중용(重用)되진 못하겠구나.’
“큰언니, 월경통 말인데요. 제가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정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유 없이 베푸는 호의는 아니었다.
‘연아는 큰언니의 궁녀고 대궁녀 약접의 사촌동생이니까, 저 골칫거리를 없애주면 앞으로 신경 써서 큰언니를 모셔주겠지.’
삶의 경험이 쌓여가면서 정미는 정아가 궁에서 얼마나 고단할지 깨닫기 시작했다.
정아는 어린 동생에게 늘 온화해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도해보렴.”
정미는 나무 아래로 다가가 연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쪼그려 앉아서 그녀의 복부를 살짝 눌러보더니 다시 돌아와 정아에게 말했다.
“큰언니, 연아를 방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저도 가서 준비 좀 할게요.”
“모두 돌아가거라. 약접, 너는 이 애를 도와주고.”
정아는 이미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기에 많은 궁녀들과 함께 거처로 돌아갔다.
* * *
별실 안, 정미는 부수를 약접에게 건네며 연아에게 먹이라고 한 뒤, 자신은 옆에서 연아의 반응을 살폈다.
‘이 부수는 정혈로 만들지 않았어. 효과가 어떤지는 여러 번 시도해봐야 알겠지.’
월경통은 사실 그리 큰 병은 아니지만, 아프기 시작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연아는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으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약접이 건넨 부수를 쳐다봤다.
“연아, 이건 셋째 아가씨께서 네게 특별히 준비해주신 거야. 네 월경통을 치료할 수 있으시대. 어서 마셔봐.”
연아는 재빨리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셋째 아가씨.”
아무리 어린 나이라 해도 멍청한 자들은 궁에 발붙이고 지낼 수 없었다. 진심으로 믿든 아니든, 겉으로는 감사함을 표해야 했다.
연아는 잔을 받아들고 끝까지 들이킨 후,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약접이 결국 물었다.
“연아, 좀 어때?”
“정말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연아는 조금 망설이며 대답했다.
‘기분 탓인지, 정말 나아진 건진 모르겠어. 원래 내 월경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점점 나아지다가 이틀째면 참을 만해지는걸.’
“어서 셋째 아가씨께 인사드리지 않고 뭐해.”
약접이 연아를 살짝 잡아당겼다.
연아가 바로 감사 인사를 하자,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더 기다려 보거라. 효과가 이렇게 빠를 리 없어.”
약접과 연아는 생각했다.
‘셋째 아가씨는 정말 솔직하시구나. 이런 사람은 궁에서 보기 드문데.’
두 사람은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정미와 가까워진 기분을 느꼈다.
정미는 자리를 뜨지 않고 아무 데나 앉아서 기다렸다.
이는 그저 정혈로 만들지 않은 부수의 효과를 보기 위함이었지만, 약접과 연아는 오해했다.
‘아가씨는 솔직하기만 한 게 아니라, 선량하기까지 하구나. 보잘것없는 궁녀를 위해 기다려 주시다니. 정말 보기 드문 분이셔.’
반주향 정도 지나자, 연아가 갑자기 외쳤다.
“어라, 아프지 않아요. 이제 정말 아프지 않아요!”
약접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빨리? 정말 안 아파?”
연아는 기뻐하며 침상에서 내려와 한 바퀴 돌았다.
“정말이에요!”
연아는 감격스러운 듯 약접의 손을 붙잡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셋째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소인에겐 보답해드릴 게 없으니, 앞으로 평생 아가씨의 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연아는 수년 동안 월경통으로 고생해왔다. 매달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혹시나 복통 때문에 사고를 칠까 두려워했다.
정미가 연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럴 필요 없다. 그저 사소한 수고였으니. 앞으로 너희가 태자비마마를 성심껏 모시는 게 내게 보답하는 거란다.”
약접과 연아는 동시에 ‘예.’하고 대답했다.
정미는 방에서 나오기 전 연아에게 말했다.
“방금 부수는 그저 잠시 복통을 없애줄 뿐이었다. 월경통을 완전히 낫게 하고 싶으면, 부수를 다시 조제하고 사흘 연속으로 마셔야 해. 다행히 내가 궁에 며칠 더 머물 테니, 네 월경통을 고쳐주마.”
그렇게 연아는 사흘 연속으로 정미가 조제한 부수를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아랫배를 맴도는 게 느껴졌고, 월경할 때의 불편한 느낌도 전혀 없어졌다. 심지어 평소보다 몸이 가벼워지기까지 한 것 같았다.
태자비 곁의 궁녀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다른 궁녀들은 그날 연아가 쓰러진 이후로 계속 주시하고 있다가 몰래 연아를 찾아 물어보았다. 연아의 말을 들은 뒤, 모두가 놀라워하며 자신도 그 신기한 셋째 아가씨를 찾아가 보고 싶어 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분은 태자비마마의 여동생이고 높은 가문의 귀녀이신데, 어찌 소궁녀들의 진료를 봐주시겠어. 연아가 태자비마마 앞에서 기절한 게 운이었던 거지.’
궁녀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눈에 띄지 않는 소궁녀인 선아(蟬兒)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내어 몰래 정미를 찾아갔다.
선아도 월경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매번 월경을 할 때마다 열흘에서 보름까지도 피가 멎지 않아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정미는 마침 많은 실험이 필요했기에 거절하지 않고 선아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여인이 많은 곳은 이야기가 빨리 퍼지기 마련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동궁 사람들 모두가 태자비의 어린 여동생인 셋째 아가씨가 부인과의 명의라고 떠들어댔고, 후궁에서 황제를 따라 피서를 가지 않은 비(妃)들도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 소순궁(昭純宮)에서 태자비를 찾아왔다.
소순궁은 숙비의 거처로, 평소 동궁과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태자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사비(四妃) 중 하나인 숙비는 첫 황자를 낳았기에, 정아는 이 서모의 체면을 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소순궁에서 정미를 부르자 난처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창밖을 쳐다봤다.
“이 시간에 말이냐?”
동궁은 황성의 북쪽에 있었고, 소순궁은 그리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정아는 당연히 어린 동생이 이 어두워지는 시간에 위험한 황궁을 돌아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찾아온 사람은 숙비의 심복 유모였다. 그녀가 공손하게 말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태자비마마. 숙비마마의 몸이 좋지 않으신데, 셋째 아가씨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노노(老奴)가 염치없지만 숙비마마를 위해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정아는 하늘빛을 한 번 보더니 망설이며 대답했다.
“알겠다. 약접, 네가 셋째 아가씨를 모셔다 드리거라.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오고.”
“예.”
정아는 정미를 불러와 작게 당부했다.
“다른 궁에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숙비마마의 진료를 다 본 뒤에는 곧바로 돌아와야 하고.”
정아는 혹시나 어린 동생이 놀랐을까 봐 말을 덧붙였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숙비마마는 좋은 분이시니. 평소 소식(*素食: 채식 위주의 소박한 음식)을 하고 염불하시며 선을 베푸신단다. 말과 행동을 각별히 신경 쓰기만 하면 돼. 이제 가 보렴.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네, 큰언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해요. 꼭 제게 맛있는 걸 준비해두셔야 해요.”
“그래, 늘 먹을 것만 생각하다니 아직도 아이 같구나. 내년엔 급계도 하고 혼담도 오고 갈 텐데 말이야.”
정아가 웃으며 말했다.
정미는 마음이 찔린 듯 아팠지만, 티 내지 않고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놀리지 마세요. 저는 시집가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며 지낼 거니까요.”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하고 오라버니도 날 좋아하지만, 오라버니와 나는 함께 할 수 없지. 그래도 차마 다른 사람과 혼인하지는 못하겠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더라도, 둘째 오라버니는 아니니까. 게다가 오라버니와 나는 이미 하룻밤을 보냈다고.’
그날 밤을 떠올리자, 정미는 달콤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느껴졌던 씁쓸함도 씻겨져 내려갔다.
정아는 정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해 한 번 노려봤다.
“당치 않은 소리 그만하고 어서 가 보렴. 꾸물대면 날이 더 어두워질 거야.”
정미는 약접을 따라 동궁에서 나와 소순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