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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13화 (213/375)

213화. 이럴 줄 알았다면

입구에 다다랐을 때, 정철은 멈춰 섰다.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정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발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엔 아무도 없었다. 정철은 가슴이 철렁하여 바깥방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 다른 곳을 살펴봤고, 곧 정미가 가련한 모습으로 구석에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쭈그려 앉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철은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뻗어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왠지 힘이 빠졌다.

“왜 여기 앉아 있어? 얼른 일어나. 바닥이 차.”

정미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으면 너무 무서워서―”

정철이 한숨을 푹 쉰 뒤 말했다.

“가자.”

“응?”

정미는 멍해졌다.

정철은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여동생에게 화가 나는 건지,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밖에서 자자고!”

말을 마치자마자 귀 끝이 뜨거워진 정철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미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오므리며 몰래 웃었다.

‘이럴 줄 알았어. 오라버니는 날 좋아해. 내가 괴로워하는 걸 그냥 둘 리 없지! 그나저나 우는 척은 정말 힘들구나. 방 안이 어둡고, 오라버니가 쑥스러워해서 자세히 보지 않아서 다행이지.’

정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방에서 나왔고, 고개를 숙인 채 침상 옆에 서서 애교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정철은 온몸이 굳은 채 침상에 앉아 딱딱하게 말했다.

“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은 없어!”

“응.”

정미는 그 어느 때보다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혹시나 정철의 마음이 변할까 봐 얼른 침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자 정철이 벌떡 일어났다. 정미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정철의 귀 끝이 다시 뜨거워졌다.

“안방에서 자자, 여기선 못 자겠어.”

여기 있는 침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 사람이 눕기엔 충분했지만, 두 사람이 누우면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닿을 만한 크기였다. 그건 너무 껄끄러운 일이었다.

정철이 안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미를 쳐다보자, 무슨 감정인지 모를 기분이 느껴져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미가 안쪽에서 자.”

“응.”

정미는 방긋 웃으며 신발을 벗고 침상으로 기어 올라갔다.

정미는 오라버니를 너무 괴롭혀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안쪽으로 들어가 누운 뒤 얇은 이불을 몸 위에 덮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는 몰래 실눈을 떴다. 정철이 멀리서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게 보였다. 몸의 반쯤은 바깥에 걸친 채였다.

정미는 입을 오므렸다.

‘오라버니는 저러다 새벽에 굴러떨어질까 무섭지 않은 거야? 그래, 저 자세로 잘 수 있을 리 없으니 떨어질 일도 없겠지.’

정미는 얇은 이불을 당겨 정철의 허리에 덮어주었다.

“오라버니, 감기 걸려.”

정철은 등이 곤두서는 느낌에 이불을 휙 젖히며 짜증을 냈다.

“얼른 자, 나는 신경 쓰지 말고. 6월에 누가 감기에 걸린다는 거야!”

“오라버니, 왜 화를 내?”

정미가 억울한 말투로 물었다.

정철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끼며 차분한 말투를 되찾곤 말했다.

“화 안 냈어. 얼른 자, 미미. 오라버니도 졸리다.”

“응, 그럼 잘게.”

정미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정미는 오늘 밤을 자신과 정철의 동방화촉(*洞房華燭: 신랑이 신부의 방에서 첫날밤을 지내는 일)이라 여겼다.

‘아쉽게도 오라버니는 영원히 알지 못하겠지만.’

정철은 옆으로 누워 바깥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정미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올 때쯤, 그는 침상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우기 위해 몸을 살짝 움직였다.

‘미미와 함께 자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 말을 어기고 바깥방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여동생과 동침은 도저히 못 하겠어. 미미는 아직 어리고 아이 같아서 아무렇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내 멋대로 굴었다가 나중에 미미가 혼인하고 부군이 생긴 뒤 지금을 떠올리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정철이 일어나려고 하자, 갑자기 그의 허리춤에 희고 매끈한 손이 걸쳐졌고 이어서 부드러운 몸이 가까이 다가왔다.

6월의 절반이 넘은 날의 날씨는 방 안에 얼음 분경을 놓아두어도 여전히 더웠다. 정철은 순식간에 등 뒤에 불이라도 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가장 바깥쪽까지 몰려있는 데다가, 몸의 반은 밖으로 걸쳐져 있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정미는 깊은 잠에 든 듯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가지 마. 무서워―”

정철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천장의 박쥐 모양 고리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금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됐는데. 지금은 참으로 진퇴양난이로구나.’

정철은 그 자세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

이때 하필 뒤에 있던 정미가 조금 더 가까이 붙어왔고, 소녀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부위마저 등에 꼭 붙었다. 정철은 하마터면 침상에서 떨어질 뻔했다.

‘이대론 안 되겠어!’

정철은 손을 뻗어 정미의 손을 살살 떼어내고 그녀를 안쪽으로 밀어냈다.

정미가 얌전히 안쪽 끝으로 돌아가 공간이 생기자, 정철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다시 몸을 돌려 안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조금 안쪽으로 가지 않으면 침상에서 떨어지겠어. 미미가 얌전히 자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정철이 이 생각을 하자마자 정미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눈 깜짝할 새 정철의 품에 안겼다.

정철은 놀라 멍해졌고, 그 순간 뜨거운 감자를 품에 안은 소년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정미는 정철의 품에 파묻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 줄 알았지.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먼저 다가오지 않을 줄 알았어. 다행히 나 정미는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건 내 동방화촉인걸. 오라버니의 옷깃조차도 닿지 못하면 너무 아쉽잖아.’

정미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고 잠들려고 했다. 그러나 어둡고 조용한 방 안, 머리 위에서 정철의 살짝 어지러운 숨소리가 또렷이 들려왔고 익숙한 맑은 향이 풍겨오자 정미는 가슴이 간지러워 갑자기 이렇게 잠들기 아쉬워졌다.

정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을 다시 정철의 허리에 걸치더니 허리를 따라 아래로 내리다가 튼실한 둔부에서 손을 멈췄다.

‘응, 이 정도면 됐어.’

정미는 씨익 웃으며 눈을 감은 채 정철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아랫배에 뭔가 단단한 게 느껴졌다.

정미는 춘화를 본 적이 있었지만, 종이로 본 것과 실제 상황은 달랐기에 그것이 뭔지 알아채지 못했다.

정미는 의아했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비수를 지니고 있는 거야?’

정미는 의혹을 품은 채 손을 앞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다 자연스럽게 그곳을 건드렸다.

‘응? 비수의 촉감이 아닌 것 같은데.’

정철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숨을 들이켰고 온몸은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애당초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철은 오늘 밤 정미에게 이런 생각이 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미미가 잠에서 깨면 어쩌지?’

한 방울, 또 한 방울, 정철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안 되겠어.’

정철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정미의 손을 떼어냈다. 정미가 잠에서 깨지 않자, 그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정미가 다시 손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아직 무슨 물건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오라버니는 정말 쪼잔해!’

이번에 정미는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손을 그 부근에 대고 꾹 눌러보았다.

그러자 정철이 잉어처럼 펄떡이며 침상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정미는 정철에게 걸려 몸이 뒤집혔다.

‘이건 자는 척할 수 없겠는데…….’

정미는 아쉬워하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오라버니, 왜 그래?”

“아니야, 더 자.”

정철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하다가, 뭔가 깨달은 듯 뒤돌아서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갔다.

“오라버니는 창 연습하러 가마. 넌 더 자고 있어. 이따 데려다줄 테니.”

대나무 발이 흔들리며 정철은 사라졌고, 정미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훔쳐낸 동방화촉인데, 역시 날이 밝을 때까지 안고 있을 순 없구나. 그런데 오라버니가 숨긴 물건은 도대체 뭐였을까? ……됐어, 오라버니도 자신만의 비밀이 있겠지. 깊게 파헤치지 말아야겠다.’

곧 피곤함이 몰려와 정미는 깊은 잠에 들었다.

* * *

정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비서거 안이었다.

“환안―”

정미가 외치자 문이 삐걱대며 열리고 환안이 걸어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정미가 환안을 보며 웃었다.

“그래, 일어났어.”

환안은 잠시 멍해지더니 왠지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오는 것을 느끼며 정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채 울먹였다.

“아가씨―”

“뭐야, 아침부터 훌쩍대기는. 어서 세숫물을 준비하지 않고. 더 게으름을 피우면 점심밥을 주지 않을 거야!”

“예!”

환안은 낭랑하게 대답하며 생각했다.

‘아가씨께서 늘 이 모습으로 계셔준다면, 점심밥 따윈 먹지 않아도 돼.’

단장을 마친 뒤, 정미는 이연원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으나 그곳에서 정철을 마주치진 못했다.

정미는 그저 웃었다.

그녀는 정철의 마음을 안 뒤론 더 이상 불안한 소녀가 아니었다. 고작 정철을 마주치지 못한 것 때문에 상심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분명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그런 걸 거야.’

그러나 정미의 이 기쁜 기분은 한 씨의 말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틀 전 충정후부의 큰아가씨가 네게 서신을 보내왔다. 닷새 뒤에 충정후부에서 열리는 시회에 초대했더구나. 마침 너도 출궁했으니, 가서 놀다 오렴.”

“충정후부의 큰아가씨요?”

한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올케언니가 될 사람이지.”

꽃술처럼 부드럽고 여린 소녀의 마음이 벌에 쏘인 듯 아파 왔다.

정미는 그 갑작스러운 고통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안 갈래요.”

한 씨는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안 간다는 거니? 화를 입은 지 얼마 안 됐으니, 더욱 나가서 놀아야지. 게다가 네게 서신을 보낸 사람이 남도 아니지 않니. 어찌 체면을 구기려 하는 것이야?”

정미는 들을수록 괴로워졌다. 정미도 자신이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오라버니의 혼인을 막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하지만 피할 수 있는 권리 정도는 있지.’

“어머니, 조금 일찍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큰언니가 요즘 계속 잠을 잘 자지 못한대요. 제가 곁에 있어 주면 조금 편할지도 모르잖아요.”

정미가 정아를 언급하자, 한 씨는 다른 일들은 다 제쳐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돌아가거라. 네 언니를 잘 돌보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한 씨는 딸이 요 며칠 전보다 조금 냉담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까닭은 알 수 없어 그저 멋쩍은 듯 말했다.

“돌아가 보거라.”

정미가 떠난 후, 한 씨는 생각에 잠겼다.

‘설마 내가 몸이 안 좋다 속이고 궁에서 불러들여서 기분이 나빴나?’

한 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꾀병으로 정미를 불러들이라고 한 건, 철이의 생각인걸. 그때 철이가 분명 정미가 절벽에서 떨어져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궁엔 황상도 계시지 않고 궁녀와 내시만 남아있어 음기가 강해 정미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철이가 며칠 외출했다가 돌아온 뒤 정미가 보고 싶어서 나를 속인 것 같구나. 역시 철이와 정미의 사이는 너무 좋다니까. 이 어미도 끼어들 수가 없구나.’

한 씨는 그동안 정미와 소원했던 이유가 떠올라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나리께서 갈수록 예전 기억 속의 모습과 멀어지는 것 같구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겐 ‘예전’ 따윈 없었지. 그 모습은 늘 내 상상 속의 모습이었을 뿐.’

한 씨는 부군에 대한 마음이 점점 식어가면서 적자를 낳을 수 없다는 마음속 응어리도 어느새 덩달아 풀린 채였다.

장녀가 황손을 낳고 순조롭게 황후가 된 뒤, 차녀는 좋은 부군에게 시집가고, 양자가 자매들의 기댈 곳이 되어주는 것. 그게 바로 지금 한 씨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이젠 한 씨에게 그저 우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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