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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12화 (212/375)

212화. 전인(前因)

정미는 무거운 표정으로 침상에 돌아가 앉은 뒤, 침상 머리맡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빼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아. 나한테 들러붙은 건 아니겠지? 그럼, 아혜는?’

정미의 생각을 느낀 건지, 아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괜한 힘쓰지 마. 부서질 팔찌였으면 지금까지 남아있었겠어?」

“아혜!”

짧은 충격이 지나간 후, 정미는 빠르게 차분함을 되찾고 물었다.

“팔찌 안에 있어?”

정미는 아혜가 지금 자신의 몸속이 아닌, 팔찌 안에서 말을 걸고 있음을 분명히 구별해낼 수 있었다.

한참 후, 아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남매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 말해줘. 네 둘째 오라버니는 어떻게 내가 네가 아닌 걸 알아챈 거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고?

살아있는 몸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으니, 평범한 흑구의 피는 내게 그리 효과가 없었을 텐데. 양년(陽年)·양월(陽月)·양일(陽日)·양시(陽時)에 태어난 순양(純陽) 흑구가 아니라면 말이지.

그런 흑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해도, 나 정도 능력이면 기껏해야 그 몸 안에서 잠들 뿐 이렇게 쫓겨나진 않았을 텐데. 만약 이 팔찌가 지켜주지 않았다면 이미 혼이 흩어졌을지도 몰라.」

차갑고 거친 아혜의 목소리는 목숨을 앗으려는 악귀 같았다. 아주 듣기 싫은 소리였지만, 정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난 내 오라버니가 어떻게 너를 알아차렸는지 알 거 같아.”

‘영혼도 되어보고, 다른 고혼이 내 몸을 차지하는 것도 지켜봤는데, 고작 팔찌 안의 아혜에게 놀라 겁먹을 순 없지. 설사 겁먹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티 내선 안 돼!’

「뭐? 어떻게 알았는데? 얼른 말해―」

아혜가 재촉했다.

그러나 정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안 해줄 거야. 알려줬다가 혹시나 다음에 네가 또 내 몸을 차지하게 되면, 꾀를 써서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았냐고? 오라버니는 내가 대추떡을 먹을 때 대추는 먹지 않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원숭이를 싫어하는 것도 알고 있지.’

다섯 살 때, 정미는 어머니께 혼난 뒤 속상해서 몰래 백부를 나왔던 적이 있는데, 그날 원숭이를 부리는 사람에게 유괴당했었다. 만약 정철이 쫓아오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섯 살의 정미에겐 원숭이를 부리는 사람보다 그 사람이 부리는 원숭이에 대한 충격이 더 컸다.

그 원숭이는 정미의 엉덩이를 두 번이나 움켜잡았고, 그 바람에 정미는 반년 동안 차마 똑바로 누워 잘 수도 없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정미가 원숭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너―」

아혜가 노발대발했다.

「네가 감히 날 놀리다니!」

정미가 차갑게 물었다.

“아혜, 설마 우리가 여전히 벗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여전히 내 스승인 것 같아?”

아혜는 침묵했다. 한참 뒤,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네가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회인백부의 아가씨로 풍족하고 화려한 나날들을 보낼 뿐!」

“풍족하고 화려하다고?”

정미는 왠지 우스웠다.

“만약 이게 화려한 나날들이라면, 차라리 평민들의 집으로 갈래. 가난하게 살더라도 최소한 부모님의 애정은 받을 수 있으니―”

「입 다물어. 네가 아주 가난해져서 이번에 식사하면 다음 끼니를 때울 수 없을 때가 오면, 그때 다시 그 말을 뱉어보시지!」

아혜는 성내며 정미의 말을 끊고 차갑게 웃었다.

「평민들의 자식은 진심으로 사랑받을 것 같아?」

「회인백부가 모시는 선조, 너희가 대대손손 존경하는 초대 회인백은 그저 사람들을 속여 명예를 훔친 사기꾼일 뿐이야!」

아혜는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부터 끝까지 얘기하고는 크게 웃었다.

「천하에 이름을 떨쳤지만, 사실은 그저 평범한 의술의 떠돌이 의원에 불과했다. 내가 ‘부자자효(父慈子孝), 형우매공(兄友妹恭)’ 같은 허상에 눈이 멀어 가족이 더 행복하게 살기만을 원했던 거지.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더군. 태자의 병이 위독해지고, 내가 태자의 병은 가망이 없다고 말하자 내 아버지는 태자를 살린 은인이 되기 위해 내 온몸의 피를 태자의 피와 바꾸었고, 태자의 목숨을 구했어!」

정미는 소름이 돋아 물었다.

“피를 바꿨다고?”

「그래! 내가 왜 이 팔찌의 주인이고, 왜 이 팔찌가 백 년 뒤에 널 찾은 것 같으냐? 우리에겐 똑같은 신기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야. 타고난 부의일 뿐만 아니라, 이 피는 중요한 때에 목숨을 구하는 영약이 될 수도 있거든!」

정미는 멍해졌다.

“그럼 정혈로 부적을 만드는 건, 정말 효과가 더 좋았던 거네?”

아혜가 차갑게 웃었다.

「세상에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도관(道觀)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현청관은 그 역사가 천년에 달할 텐데, 떠돌이 의원이었던 내 아버지가 어찌 세상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신의가 될 수 있었겠어?」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부적은 정혈을 쓸 필요가 없는 거 아냐? 효과가 조금 천천히 나타날 뿐이고.”

아혜가 처음 정미에게 가르쳐준 부적은 정혈을 쓰지 않으면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정미가 영혼이 된 후 아혜에게서 몰래 배운 ‘진짜’ 부적의 화법은 등급이 낮은 것일수록 정혈을 쓰든, 주사를 쓰든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혜가 다른 마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숨기지 않았겠지.’

아혜가 침묵하자 정미는 재차 물었다.

“그럼 팔찌는 왜 동궁에 있었던 거야?”

「내가 죽기 직전까지 발악하다가 숨을 거둘 때 손목에서 떨어졌을 뿐이야. 이제 알겠어? 내가 분할 만하지? 원망할 만하지?」

“응. 분하고 원망스러울 만해.”

정미는 마침내 집안에 내려져 오던 이상한 규칙이 이해되었다.

‘정가의 족인들은 태의서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은 선조가 부의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어서 그랬던 거겠지. 아니면 부귀영화는 이미 손에 넣었으니, 그것과 맞바꾼 딸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 후대들이 태의서에 들어가길 원치 않았을 수도 있고.’

무슨 이유였든, 정미는 아혜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분하고 원망할 만하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이미 죽고 없어. 근데 왜 내 몸을 차지하고 사람을 해치려는 거야?”

정미가 아혜에게 묻자, 그녀가 냉소하며 반문했다.

「그게 뭐 어때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도 봤잖아? 내가 네 몸을 차지하지 않더라도, 너도 몇 년 뒤면 곱게 죽지 못할 텐데. 차라리 내가 네게 부술을 가르쳐주고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준 뒤, 네 몸을 이용해 복수를 하면 미안할 것도 없잖아?」

정미는 잠시 침묵하더니 가볍게 한숨 쉬었다.

“아혜, 나도 총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야. 애초에 네가 만약 내게 그런 조건을 분명히 얘기해주었다면, 내가 승낙했을지도 모르잖아. 내 목숨 하나로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지낼 수 있다면, 내게도 손해는 아니고.

하지만 말없이 내 몸을 뺏고, 도축을 기다리는 가축처럼 죽는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네게 고마워할 것 같아? 게다가 네가 복수할 대상은 정가와 황실이잖아. 그럼 내 소중한 사람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어?”

아혜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비웃으며 중얼댔다.

「내가 널 얕봤구나.」

정미는 그제야 아혜의 목소리가 유난히 쇠약해졌음을 느꼈다.

발소리가 들려오자, 정미가 담담히 말했다.

“이렇게 하자, 아혜. 나는 이 팔찌를 벗을 수 없고 너도 쫓아내지 못하니까, 앞으로 얌전히 팔찌 안에서 지내줘. 이제 우린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야.”

‘아혜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어. 아혜의 목숨과 지금의 생활을 맞바꾸지 않았다면, 백 년의 흥망성쇠 속에서 보잘것없는 평범한 가문은 이미 대가 끊겼을 거고, 그럼 나도 존재하지 않았겠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오라버니와 만날 수 없는 건 아쉬워. 다행히 아혜가 팔찌에 있는 것과 내 몸속에 있는 건 달라. 내가 아혜와 이어지는 생각을 먼저 하지만 않으면, 아혜는 바깥세상을 느끼지 못할 거야. 하지만―’

정미는 팔찌를 매만졌다.

‘내 피가 팔찌에 묻었을 때, 아혜가 내 몸속에 들어올 수 있었지. 어쨌든 팔찌를 빼낼 방법을 찾아야겠어.’

하지만 그건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정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발소리가 바깥방에서 멈추었을 때, 정철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불 끌게. 일찍 자.”

“응.”

정미가 흔쾌히 대답했다.

잠시 후, 안방의 불빛이 어두워졌다.

정철은 뒤돌아서 벽을 보고 누웠다.

그런데 곧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둘째 오라버니.”

정철은 순간적으로 온몸을 굳힌 채 겨우 몸을 돌려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미미, 왜 나왔어?”

정미는 베개를 품에 안고 당당하게 말했다.

“오라버니랑 같이 자려고. 오라버니가 허락했잖아.”

정철이 한참 멍해지는 바람에, 정미는 정철이 묵인한 줄 알고 기뻐하며 베개를 침상에 던지고는 위로 기어 올라왔다. 정철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정미를 막으며 꾸짖었다.

“미미, 어서 안방으로 돌아가!”

“응?”

정미는 당황했다.

정철은 급히 베개를 정미의 품에 안겨주었다.

분명 정철 자신의 베개였지만, 베개를 잡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정미의 품으로 넘긴 후에도 진정할 수 없었다.

정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미, 너도 이제 열네 살이야. 네 살이 아니라고. 오라버니와 같이 잘 수 없어!”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바로 비서거에 데려다줄 거야!”

정철은 정색하며 외투를 입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 얼굴은 철없는 여동생을 꾸짖는 오라버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정미는 입을 삐죽였다.

‘예전엔 오라버니의 이런 모습에 속았지만, 지금은 안 속지. 오라버니가 직접 말했는걸. 오라버니가 마음에 둔 사람은 나라고. 다음 생엔 나를 아내로 맞을 거라고. 나와 같이 자고 싶지 않을 리 없어. 오라버니는 정말 겉과 속이 다르다니까!’

“오라버니, 화내지 마. 눈을 감으면 그 고혼이 내 몸을 차지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서, 무서워서 그래.”

정미가 서운한 표정으로 정철의 옷깃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으면 그냥 돌아갈게.”

정미는 옷깃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베개를 안은 채 조용히 돌아갔다. 그 모습은 유난히 쓸쓸해, 마치 비 내리는 날에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처럼 보였다.

정철은 넋을 놓고 정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마음이 몹시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가능하다면 나도 미미와 함께 자고 싶어. 세상의 평범한 부부들처럼.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그때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무예를 연습한 사람의 청력이 아니었다면 전혀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깃털 같은 흐느낌은 정철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왔다.

‘미미가 우는 건가?’

정철은 저도 모르게 안방의 입구를 쳐다봤다.

등불이 꺼진 방 안은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미미…… 엄청 무섭겠지?’

정철은 조용히 주먹을 꽉 쥐고 뒤척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침상에서 내려와 안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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