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10화 (210/375)

210화. 쟁탈

“정미, 여기 음식들도 먹어봐. 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거야. 오래 두면 맛이 떨어져.”

아혜는 먹을 건 마다하지 않았기에 팥양갱 한 조각을 들고 입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정철이 강미조 한 조각을 건넸다.

“이건 교외의 미기(米記)라는 간식가게에서 사 온 건데, 이 집이 강미조를 만들 때 쓰는 찹쌀이 다른 집과는 다른 깔끔한 맛이 있더라고. 먹어봐.”

아혜가 강미조를 건네받아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네. 고마워, 오라버니.”

정철이 미소 지었다.

“천만에.”

아혜는 왠지 정철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그가 이 세상에서 정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임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라버니, 출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좀 피곤하네. 이만 쉬러 가 볼게.”

“그래. 팔근, 셋째 아가씨를 모셔다드려라.”

팔근은 한 손엔 상자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찬합을 든 채 웃었다.

“셋째 아가씨, 가시지요.”

* * *

아혜는 비서거로 돌아온 후 여종들을 내보내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정미의 영혼을 쫓아내 소멸시킨 뒤엔 다시 궁에 들어가는 게 낫겠어. 여긴 정철이 지켜보고 있으니 편하게 행동할 수가 없구나. 복수와 회인백부를 망가뜨리려면, 궁 안에서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 있을까? 게다가 용씨는 내가 두 번째로 복수할 대상이니까. 이 몸도 정가의 사람이니, 나도 피해를 받게 되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백 년을 힘겹게 버텨왔는데, 사람 몸뚱이 하나쯤이야. 복수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팔찌로 돌아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기다리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당하겠어.’

아혜는 찻잔 하나를 바닥에 내던졌다.

‘백부의 잡초마저도 내 백골과 바꾼 것이라 생각하면, 모든 걸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만 싶어!’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환안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아혜는 차갑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예의 없는 것. 누가 들어오라 했느냐?”

환안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가 정말 이상해진 것 같아. 화미와 다른 사람들은 아직 느끼지 못 했나 본데, 나는 아가씨가 갈수록 아가씨답지 않은 것 같아. 예전에도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꾸짖으며 점심을 먹지 말라는 벌을 내리기도 하셨지만, 마음속으로는 아가씨가 진심으로 나를 싫어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가씨와 눈도 마주칠 수가 없어. 아가씨와 마주보기만 하면, 내가 모시던 분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가거라. 화미가 들어와서 치우라고 해.”

“예.”

잠시 후, 화미가 들어와 깨진 조각들을 치웠다. 아혜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만약 오랫동안 백부에서 지낼 생각이었다면, 환안 그 계집은 벌써 내쫓았을 텐데. 그 계집은 보기에는 멍청하고 둔해 보이지만, 눈치는 꽤 빨라서 좀 불편하단 말이지. 하지만 난 빠른 복수를 원하니까 굳이 건드릴 필욘 없지.’

남은 시간 동안 아혜는 계속 정신 수양을 했고, 곧 저녁이 되었다.

6월은 벌써 반이나 지나 하늘엔 반달이 떠 있었다. 인혼술은 만월에 사용해야 가장 좋지만, 아혜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아직 정신이 이 몸에 완전히 융합되지도 않았는데, 원래의 주인이 나타났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우선 한번 시도해보고 실패하더라도 괜찮아. 음기가 가장 강한 7월 보름, 그때가 가장 좋은 기회일 거야.’

아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밤이 되자, 아혜는 화원의 가장 넓은 곳에서 달을 보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황궁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란했고 기묘한 미감(美感)과 운율이 있었다.

그러나 아혜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몸 안의 기운이 굳어있었고 몸에 대한 통제력이 이틀 전 연습했을 때보다 좋지 않은 듯했기 때문이다.

‘만월과 먼 날일수록 효과가 좋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어.’

아혜의 눈빛에 결의가 스쳤다. 그녀는 점점 더 빠르게 춤추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아혜는 옷자락을 흩날리며 아름답게 춤췄다. 마치 숲속의 정령이 갑자기 이 세상에 왔다가 바람을 타고 다시 떠나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혜의 손끝과 발끝은 점점 달빛으로 물들었고 이따금 눈앞이 새하얘지기도 했다. 정신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성공하겠구나!’

아혜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오른 다리를 들어 미간에 발끝을 닿게 했다. 그러고는 왼발 끝으로 땅을 딛고 쉴 새 없이 돌기 시작했다.

돌수록 속도가 빨라져 치맛자락이 파도처럼 겹겹이 날아올라 소녀를 덮칠 것만 같았다.

아혜가 고개를 들어 달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러나 이내 웃음기를 거두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춤을 추고 있는 건 나인데, 왜 갈수록 통제력이 약해지는 거냐고! 심지어 지금 멈추려고 해도 몸은 계속 춤을 추고 있을 것만 같아.’

서금과는 부법 중 가장 약한 과목이라, 초혼이나 귀신을 몰아내는 건 이 분야에 전념한 도사보다 못했다. 하지만 아혜는 부법에 정통한 사람이었기에 곧바로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정미, 너지?”

아혜가 이를 갈며 물었다.

‘내가 이 계집을 얕봤구나. 쥐도 새도 모르게 내게서 인혼술을 배우다니! 이 멍청한 계집이 지금 기회를 틈타 몸의 통제권을 쟁탈할 셈인가? 그래, 이건 분명 좋은 기회니까.’

옛날부터 인혼술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몸에 써오던 것이었다. 아혜처럼 자기 자신에게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혼술이 시작되면 몸 안에 숨어있는 ‘이류(異類)’를 끌어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불안정해졌다. 게다가 아혜야말로 그 ‘이류’나 마찬가지이니!

“정미, 내가 정말 너를 얕봤구나.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두 영혼이 한 몸을 다툴 때는 누가 더 강력하고 확고하며, 몸에 대한 지배가 강한지, 누가 인혼술을 더 잘 다루는지로 결정되었다.

아혜는 만일의 사태를 막기 위해선 지금 바로 멈추는 게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멈추면 아혜도 마찬가지로 해를 입게 됐다.

그렇기에 그 ‘만일’을 위해 멈출 순 없었다.

‘어린 계집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여태 헛살아온 게 아니겠어? 대신 계속 정미에게 말을 걸 거야. 그 계집은 인혼술을 잘 알지 못할 테니, 한 번 집중이 흐트러지게 되면 결과는 뻔하지. 이건 사생결단의 싸움이니, 우유부단하게 굴 순 없어!’

한편 정미는 아무 말 없이 최대한 몸의 감각을 느꼈다.

‘이건 내 몸이야. 내 손이고, 내 발이고, 내 심장이라고.’

‘내 몸아, 제발 나를 위해 춤춰줘. 나는 살고 싶어. 그게 아니면― 완전히 죽게 해줘.’

정미는 아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머릿속에 이 생각만을 가득 채웠다.

삶, 아니면 죽음.

‘절대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살게 두지 않겠어!’

아혜는 갈수록 놀라워했다.

‘이 계집의 재능을 얕잡아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과소평가 한 것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연습한 걸 몇 번 본 것만으로 복잡한 인혼술을 몰래 배우다니. 심지어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만약 백 년의 시간과 깊은 원한이 없었다면, 우리는 꽤 잘 맞는 벗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내겐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저 복수만 하고 싶을 뿐! 멍청한 계집, 내가 미안한 걸로 치지. 이 세상엔 내게 미안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리고 차라리 미안해야 할 사람이 되는 게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나은 법이지!’

아혜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결심한 듯 굳어졌다.

그 순간, 정미는 날카로운 화살이 머리에 박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고, 영혼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집념과 신념은 가끔 자신을 초월한 힘을 발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법.

정미의 마음속에 절망이 치솟았다.

‘아니, 절망하더라도 패배를 인정하고 싶진 않아! 그래, 그냥 아혜와 함께 사라지자. 최소한 아혜가 내 몸으로 사람을 해칠 수 없도록.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돕지 못해 아쉽지만…….’

정미의 눈빛에도 점점 결심이 차올랐다.

정미는 인혼술만은 아혜와 겨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나도 마찬가지로 바깥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으니.’

그때 달빛을 받으며 다가오는 익숙한 누군가가 보였다.

그 사람은 청삼(靑衫)을 입고 있었고, 풍채가 출중했다. 정미의 눈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내로 보였다.

‘오라버니―’

정미가 웃었다.

환각이라도 상관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정철을 볼 수 있었으니.

‘오라버니, 다음 생엔 남매로 태어나지 말자. 오라버니 말고 정철이라 불러보고 싶어.’

정미는 눈을 감고 천천히 혼력을 집중했다.

“정미, 춤추는 거야?”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가 눈을 번쩍 떴다.

‘환각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그리고 아혜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아혜가 불안해하고 있어. 그럼, 이건 환각이 아니라 진짜 둘째 오라버니구나!’

다 모여있던 혼력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미는 어려서부터 정철을 믿어왔고, 제 오라버니만 보면 가슴에 희망이 차오르곤 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건 정말 못난 짓이지만, 그게 뭐 어때서? 내 둘째 오라버니고, 난 오라버니에게 분명 방법이 있을 거라 믿어.’

정철은 여유로운 태도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혜는 여전히 빙빙 돌고 있었다. 날아오른 치마는 정철의 옷자락을 훑을 듯했다. 한 번, 다시 한번,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심금을 울리는 몸짓이었다.

정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아혜를 쳐다봤다.

“정미, 춤이 조금 이상하네. 춤보다는 비밀스러운 의식처럼 보이는구나.”

아혜는 깜짝 놀랐다.

‘정철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가? 안에선 정미와 몸을 다투고, 밖에선 정철이 이 시간에 찾아오니, 정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이로구나!’

아혜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제사무(祭祀舞)’의 일종이야. 연습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아줘. 끝나고 나서 얘기하자.”

“그럼 내가 반주해줄게.”

정철과 대화하는 찰나에, 아혜는 순간 몸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태 꼼짝없이 제압하고 있던 존재가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혜는 급히 ‘그래’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필사적으로 정미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때, 정철이 손에 든 작은 함을 열고 새하얀 그릇을 꺼내더니 아혜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피비린내가 풍겨오고 피투성이가 된 아혜는 순간 멈칫했다.

“흑구(*검은 개)의 피?”

정철은 못 본 척 다시 한 그릇을 꺼내 덤덤한 표정으로 뿌려댔다.

아혜가 비명을 질렀다.

“오라버니, 뭐 하는 거야. 그만해!”

아혜와 정미는 확실히 다른 존재였다.

정미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혼이 몸 밖으로 나왔을 뿐, 여전히 생기가 있는 생혼(生魂)이었다. 그러나 아혜는 진정한 음혼(陰魂)이자 원혼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정미의 몸을 차지했고, 이 몸이 나를 지켜줄 거야. 흑구의 피 따위, 두려워할 필요 없을 텐데! 정철이 분명 내게 무슨 짓을 해 놓은 게 틀림없어!’

아혜는 더 이상 인혼술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춤을 멈추고는 온몸을 떨며 애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이러지 마. 너무 무서워―”

그러나 정철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위풍당당한 수탉의 머리가 아혜의 미간에 정확히 내리쳐졌다.

아혜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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