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춤
아혜의 말투에서는 비웃음과 동정이 묻어나왔다.
“많이 발전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리석구나!”
긴 침묵이 흐른 뒤, 정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네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아혜가 차갑게 웃었다.
“허락하지 않겠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지금 이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인걸.”
「하지만 나도 내 몸 안에 있잖아.」
정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중요한 순간엔 나도 몸을 쓸 수 있어. 방금처럼.」
아혜는 이를 악물었다가 가볍게 비웃었다.
“너도 알다시피, 네가 그렇게 강제로 행동할 때마다 혼력(魂力)이 끊임없이 소모될 거야. 네 혼력이 소진되는 날이 오면 네 혼도 흩어질 테고.”
정미가 웃었다.
「그건 상관없어. 아혜, 난 마지막 혼력을 아껴 둘 거야. 네가 궁지에 몰렸을 때, 그 남은 혼력으로 너와 목숨을 내걸고 맞설 거라고. 맞아, 넌 지금 내 몸을 차지하고 있지. 하지만 그 몸은 원래 내 거야. 그러니 내가 조금 더 우위에 있지. 아혜 네가 정말 그렇게 마음대로 굴면, 좋을 게 있을 것 같아?」
아혜는 침묵했다.
‘만약 정미가 옥석구분(*玉石俱焚: 옥과 돌이 함께 불에 탐, 즉 구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사라짐) 같은 마음을 먹고 있다면, 두 사람의 영혼이 모두 망가져 이 몸은 영혼이 없는 산송장이 될 가능성이 커. 어렵사리 다시 삶을 얻었고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은데,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쓸 필요 있을까?’
“정미, 날 위협할 필요 없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워봤자, 결국 네 소중한 사람들은 곱게 죽지 못할 테니까!”
정미의 말문이 막혔다.
‘아혜의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 기죽었다간 앞으로 다신 아혜와 협상할 수 없을지도 몰라.’
「어쨌든 결과는 같잖아. 하지만 너와 맞서게 되면, 최소한 내 손으로 직접 그들을 해치게 되진 않을 거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야.」
정미는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아혜가 마침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네가 내 큰언니와 언니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해치지 않으면 얌전히 있을게.」
“그래, 그렇게 하마.”
아혜가 천천히 대답했다.
정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정미도 그저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 만약 아혜가 또 사람을 해치려 한다고 해도 정미에겐 막을 힘이 없었다. 아혜와 함께 멸하는 것 외에는.
하지만 어렵사리 자신의 몸으로 들어왔는데, 그리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아혜도 당연히 정미의 말에 겁먹지는 않았다. 게다가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 산 하나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는 없다)’이니, 정미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론 그 위협이 크든 작든 없애버릴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정미가 다시 이 몸을 되찾게 해선 안 되었다.
* * *
조용하고 깊은 밤, 달빛 아래 가인(佳人)이 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가인의 옷자락이 넘실거렸다. 몸짓 하나하나가 더없이 신비로웠고 알 수 없는 기이함과 매혹이 느껴졌다. 멀리서 보면 가인의 몸에 은은한 빛이 나는 것만 같아 범인(凡人)이 아닌 밤의 요정 같았다.
춤이 끝나자, 아혜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때,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아혜가 고개를 휙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정아가 보였다.
아혜는 놀라운 기색을 숨기며 다가갔다.
“큰언니,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정아가 진심으로 칭찬했다.
“정미가 춤을 이렇게 잘 추는지 몰랐네. 궁중 무용수와 비교해도 되겠어. 이건 몰래 하는 말인데, 나는 네가 둘째 공주보다 더 잘 추는 것 같아.”
대량에서 가무는 그저 영기(*伶妓: 영인(伶人)과 기녀를 가리킴)들의 재주가 아니었다. 많은 귀녀들이 훌륭한 가무를 뽐내곤 했는데, 둘째 공주가 바로 그중 으뜸이었다.
4년 전, 각국에서 순례를 왔을 때 둘째 공주는 ‘경홍무(驚鴻舞)’로 좌중을 놀라게 했고, 새로 승계받은 서강왕(西姜王)이 진심으로 그녀에게 구혼하여 서강왕후가 되었다.
“과찬이에요. 저녁밥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잠이 오지 않아서 춤을 춘 것뿐입니다.”
달빛 아래, 정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정미가 많이 컸구나. 나는 네가 춤을 출 수 있는지도 몰랐어. 하지만 궁 안에선 다른 곳보다 더욱 조심해야 한다. 보는 사람이 많으니.”
아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론 추지 않을게요.”
자매는 달빛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시 차림을 한 누군가가 어두운 곳에 숨어서 아혜가 춤을 추고 있을 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람은 자매가 돌아간 뒤에야 조용히 떠나갔다.
아혜는 방으로 돌아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달빛 아래서 춤을 춘 게 아니었다.
그 춤은 정확히 말하면 춤이 아니라 ‘인혼(引魂)’이라 하는 심오하고 복잡한 부술이었다.
서금과의 부법은 모두 아주 복잡했다. 그저 부적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절대 충분치 않으며, 손짓과 발짓을 동원하여 온몸을 움직여야 부법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부법은 만들 때 모습이 춤과 아주 유사했다.
아혜는 혼백을 불러올 수도 쫓아낼 수도 있는 부법으로 몸 안에서 정미의 혼을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서금과의 부술은 백 년 전의 아혜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어린아이들의 혼을 거두어주는 정도였다.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혼을 쫓아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매일 밤 몰래 연습하며 성공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아혜는 조금 짜증이 났다.
황궁과 가까운 게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유리할 거라 생각해 궁에 들어오려 했던 건데, 이 깊은 황궁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별도리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더 늦게 궁에 들어왔을 텐데. 하지만 궁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정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겠지?’
이렇게 생각하자, 아혜는 기분이 조금 풀려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정아는 백부의 서신을 받았다. 한 씨의 몸이 좋지 않으니 정미가 돌아와 며칠 지내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아는 아쉬웠지만, 어머니가 걱정되어 궁녀를 불러 아혜를 돌려보내며 아혜에게 며칠 뒤 다시 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혜는 기뻐했다.
‘궁 안에 인혼술을 할만한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 * *
백부로 돌아온 아혜는 한 씨를 보자마자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소식을 듣고 계속 걱정이 되었어요. 이렇게 얼굴을 뵙고 나니 기색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아 다행이에요.”
한 씨는 조금 어색한 표정이었다.
“네 몸도 다 좋아지지 않았는데, 궁 안에서 불편하게 지낼까 봐 돌아와서 이틀 정도 머문 후 다시 돌려보내려 했다. 마침 네 둘째 오라버니도 돌아왔고. 맛있는 걸 많이 가지고 왔더구나.”
아혜는 무심한 반응이었다.
“오라버니가 돌아왔다고요? 그런데 최근엔 제가 식욕이 별로 없어서요…….”
“그러니까 많이 먹고 몸을 보양시켜야지. 가 보거라, 네 오라버니도 아직 네가 도착한 줄 모르고 있으니 정일헌에서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혜는 정철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피할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정일헌으로 향했다.
정일헌에 도착한 아혜는 정철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왜 이렇게 초췌해?”
정철은 방금 목욕을 마쳐 상쾌한 향이 났으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정철이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이 많은데 처리하기가 어려워서. 힘이 많이 들었어.”
“그럼 다 처리한 거야?”
정철은 아혜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의 다 했어. 결과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그러고는 손을 뻗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건 다 오라버니가 네게 주려고 가져온 거야. 마음에 드는지 봐봐.”
곶감, 팥양갱, 강미조(*江米條: 찹쌀과 콩을 찐 후 다진 것을 길죽하게 말아서 기름에 튀긴 것) 등, 다양한 음식이 찬합에 가득 담겨있었다.
아혜는 간식들을 훑어보더니 웃었다.
‘전부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로군. 그 멍청한 계집도 오라버니 복은 있구나.’
아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제 막 왕조가 바뀌었을 때, 겨우 열 살 남짓이었던 아혜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떠돌이 의원이었던 아버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벌어온 돈으로 그녀와 오라버니들을 간신히 먹여 살렸다.
아혜의 몸은 아주 약해서 별다른 일을 하지 못했지만, 오라버니들은 아혜에게 아주 잘 대해줬다.
큰오라버니는 세심하고 인내심 있게 아혜를 돌봐주었고, 둘째 오라버니는 아혜를 데리고 햇볕을 쬐러 나가주었으며, 셋째 오라버니는 몰래 강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아 와 탕을 끓여주었다.
셋째 오라버니는 늘 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듯한 눈빛으로 잡은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보물처럼 여기는 물고기를 아혜에게 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아혜는 팔찌의 비밀을 알아채게 되었고, 그 팔찌를 써서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백 년 전은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기에, 여인이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혜는 고작 열 살이었다.
아혜는 마침 떠돌이 의원이었던 아버지를 방패로 세웠다.
처음엔 모든 게 완벽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부인을 살려 유명해졌고, 점점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수재(秀才)의 딸을 큰오라버니에게 붙여주었고, 둘째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는 학당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아혜가 의지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꿈꿔왔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변했을까?
아혜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성이 온 나라에 널리 퍼지고, 무슨 일이든 나와 상의할 때였나? 아니면 아버지가 금란전(金鑾殿)에 나만 데리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였나? 그것도 아니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의 정가를 찾아와 아버지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고, 심지어 오라버니들도 같은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아버지가 비법을 내게만 전수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인가?’
이때 맑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혜는 회상을 멈췄다.
정철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미미, 멍하니 서서 뭐해. 상자도 열어보지 않고?”
아혜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계시목(鷄翅木)으로 만든 상자를 대충 열었다.
상자 안에는 원숭이 나무인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각각 다른 형태의 나무인형들은 진짜처럼 생동감 있는 모습이었다.
정철은 아혜를 빤히 쳐다보며 표정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마음에 들어?”
아혜는 정철을 쳐다봤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혜는 어린 여자애들이 가지고 노는 것들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좋든 싫든 이렇게 온화하면서도 겉과 속이 다른 오라버니 앞에선 적당히 여동생 노릇을 해야 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하지만 나도 다 컸다고. 앞으론 이런 건 선물해주지 않아도 돼.”
아혜는 정철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천천히 소원해지려 했다.
정철은 따뜻한 눈빛으로 아혜를 쳐다봤다. 그 눈빛엔 조금 실망한 기색이 느껴지는 듯했다.
“미미가 어릴 땐 이런 걸 가장 좋아했는데, 오라버니가 잊고 있었네. 미미도 자랄 텐데 말이지.”
아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정미의 규방은 이미 아혜에게 아주 익숙했다. 그녀의 방엔 장식장이든 궤짝 안이든, 곳곳에 이런 작은 나무인형이 들어있었다. 정철이 그 멍청한 계집을 얼마나 아꼈는지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아혜는 그 복을 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