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묻다
다음 날 아침, 정철이 이연원에 문안 인사를 올리러 왔다.
“철아, 외출하려는 거니?”
“예, 볼일이 있어서요. 사흘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는 말하지 않자, 한 씨는 자세히 묻지 않고 당부했다.
“그럼 가보거라. 일찍 가야 일찍 돌아오지. 조심히 다니고.”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정철은 한 씨와 잡담을 조금 더 나누다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
“정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몸이 계속 그리 좋지 않은가 보더군요. 정신도 그리 맑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 며칠 동안 어머니께서 정미를 잘 보살펴주시고, 외출은 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한 씨는 개의치 않아 하며 웃었다.
“집 밖에서까지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보기엔 정미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정철은 아혜가 정가촌의 사당에 쳐들어갔던 얘기를 꺼냈다.
한 씨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어찌 어제 말하지 않고.”
“그땐 정미의 정신이 맑지 않았고, 고의로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정미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면 민망해할까 봐 말하지 않았지요.”
“그럼 마을 사람들은 뭐라 하더냐?”
“걱정 마세요, 어머니. 사람이 별로 없었고, 아들이 잘 처리했습니다.”
“그럼 됐다. 요 며칠 동안 미를 잘 지켜봐야겠구나. 외출도 하지 못하게 하마.”
정철은 그제야 떠나갔다.
한 씨는 아혜에게 말을 전하며 제생당과 덕소 장공주부도 잠시 가지 말고 집에서 잘 쉬라고 했다. 그녀는 딸이 이 말에 트집을 잡을 줄 알았지만, 아혜는 순순히 응했고 외출은 물론이고 자신의 방문 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아혜는 방 안에 숨어 부술을 조금씩 떠올렸다.
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부술은 아혜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지만, 계속 사용하지 않았다 보니 아직은 조금 낯설었다.
아혜가 부술을 익히고 있을 때, 정미도 몰래 그것을 훔쳐 배웠다.
아직 배우지 못한 부술은 둘째치고, 아혜가 태산과의 부법을 떠올릴 때 정미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그 부적들의 화법(畫法)은 아혜가 자신에게 알려준 것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부적마다 한두 획씩 다른 부분이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정미는 그 오묘한 차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몰래 정확한 화법을 외웠다.
아혜의 회상은 아주 빨랐지만 정미는 전력을 다해서 빠르게 그것을 외웠다. 그러자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배운 게 지난 반년 동안 배운 것보다 훨씬 많았다.
부법 공부에 몰두할 때는 괴로움도 잊히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새 사흘째가 되었고, 한 씨가 사람을 보내 아혜를 불렀다.
마침 부법을 거의 다 정리했던 아혜는 설란을 따라 이연원으로 향했다.
“미야, 몸이 좀 어떻니?”
아혜가 고분고분하게 웃었다.
“아주 좋아요.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집에서 잘 쉬게 하려고 했는데, 네 큰언니가 널 부르는 서신을 보내왔구나.”
“몸이 좋지 않으면 내가 궁으로 가 네 큰언니에게 전해주마.”
한 씨는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장녀가 한 달 뒤면 출산하게 되는데 혼자 궁에 있으니 어미로서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차녀는 산모를 가장 잘 진료하니, 만약 차녀가 궁에 들어가 장녀를 보살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아혜가 미소 지었다.
“전 괜찮아요, 어머니. 가고 싶어요.”
한 씨는 그제야 안심하였고 몸단장을 마친 뒤 아혜와 함께 궁으로 향했다.
* * *
아혜는 궁 안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벽와(*碧瓦: 청기와)와 붉은 벽, 비첨(*飛檐: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과 서수(*瑞獸: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는 짐승) 조각상, 모든 것이 예전과 그대로인 듯, 혹은 완전히 달라진 듯이 느껴졌다.
“미야, 뭐하니?”
한 씨는 아혜가 뒤따라오지 않자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아혜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한 씨를 따라잡았다.
“오랜만에 와서 저도 모르게 계속 둘러보게 되네요.”
길을 안내하는 내시가 웃으며 말했다.
“태자비께서 셋째 아가씨를 부르시면, 얼마든지 보러 올 기회가 있으신걸요.”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서 가자꾸나. 태자비께서 기다리고 계실 게다.”
“좋아요.”
아혜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는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그래,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태자비는 그 멍청한 계집의 친언니니까. 하늘도 내게 그리 무심하시진 않구나. 백 년 만에 돌아오니, 내게 이런 편리한 조건을 주시다니.’
아혜가 고개를 숙여 작고 여린 손을 쳐다보며 웃는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 * *
“어머니, 정미, 드디어 오셨군요.”
태자비 정아가 궁녀의 부축을 받아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배는 이미 높게 솟아있었다.
한 씨가 급히 다가가 정아를 부축했다.
“조심하세요.”
그러고는 정아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살이 빠지셨습니다.”
정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정아는 매일 이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기를 바라왔지만, 막상 출산일이 다가오니 갈수록 불안해졌고, 최근 며칠은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만약 정미가 그저 나를 위로했던 거라면 어떡하지? 아이가 태어난 뒤, 황손이 모자란 아이고, 치료할 약도 없다는 게 알려지면 어떡해? 원래도 태자의 총애를 받지 못해 지위가 위태하거늘, 바보인 황자를 낳기까지 한다면…….’
태자의 적장자가 바보라는 얘기가 퍼져나가게 된다면, 황가의 체면이 크게 구겨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나와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정아는 이미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행히 태자가 손양제를 데리고 황제를 따라 피서를 갔고, 이 거대한 동궁에 정식 주인은 정아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렇기에 친여동생을 궁으로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정아가 아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정미야말로 살이 아주 많이 빠졌는걸요. 손도 아주 차갑고.”
아혜가 손을 빼며 옅게 웃었다.
“임산부가 살이 좀 빠지면, 출산에 도움이 됩니다.”
한 씨와 정아는 그 말을 듣고 동시에 안심했다.
그렇게 잠시 인사말을 나눈 뒤 한 씨는 방에서 나갔고, 마침내 정미와 정아 둘만 남게 되었다.
“정미, 최근 계속 잠에 들 수가 없어. 아이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닐까?”
정아가 궁녀를 내보낸 뒤 아혜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혜는 정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태아를 안정시키고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는 부수를 만들어 드릴게요.”
정아는 여동생의 부수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당연히 승낙했다.
“외지고 사람이 없는 방을 마련해주세요. 지금 당장 부적을 만들 수 있게요.”
아혜는 곧 정아가 마련해준 어두운 방 안에서 가지고 있던 주사를 꺼내 부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미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다.
자신이 배웠던 것과 똑같았지만 마지막 필획의 방향이 달랐다.
부적이 만들어졌고, 신기한 빛이 물잔 안으로 떨어졌다.
부의에 재능이 꽤 있는 편이었던 정미는 이미 이 부수의 효과가 자신이 만들어오던 것보다 그저 약간만 뒤떨어질 뿐이라는 걸 알아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혜가 자신의 피로 부적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럼, 대부분의 부적은 원래 선혈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야?’
그러다 정미는 아혜의 입가에 띤 웃음기를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아혜는 만든 부수를 벽 모퉁이의 화분에 아무렇게나 부어버리며 생각했다.
‘아직 손이 굳지 않았나 보군.’
‘그 안태부(安胎符)는 그저 손을 풀기 위해서였구나!’
아혜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부적을 만들었고, 정미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잠시 후, 새로운 부수가 만들어졌다.
정미는 그것을 보고 이미 온몸에 소름이 돋아있었다.
그 부수는 잘 쓰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태산과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정미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부수는 ‘인수부(引水符)’였다. 배 속에 한 잔만 들어가도 산모의 양수가 일찍 터지게 되고, 태아는 십중팔구 배 속에서 죽게 되며, 산모는 추후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졌다.
‘아혜가 큰언니와 아이를 해치려 하는구나!’
정미가 충격에 휩싸여 있는데, 아혜는 이미 그 부수를 들고 나가는 중이었다.
“정미, 빨리 왔구나.”
정아는 아혜의 손에 있는 부수를 보자 조금 호기심이 일었다.
“예전과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네.”
아혜가 웃으며 부수를 건넸다.
“이게 효과가 더 좋아요. 드시면 분명 잠을 잘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정아는 의심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손이 닿는 순간, 아혜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부수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고, 잔은 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정미, 왜 그러니?”
아혜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정아는 쏟아진 부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아혜는 이마를 짚으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크, 큰언니, 방금 그 방에서 잠깐 쉴게요.”
정아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걱정하며 아혜를 쳐다봤다.
“우선 여기 누워있어. 내가 태의를 모셔오마.”
“괜찮아요.”
아혜가 정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꽉 붙잡았다곤 했지만, 사실 그 정도의 힘조차 낼 수 없었다.
아혜가 힘겹게 말했다.
“큰언니,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부적을 만들면 이런 후유증이 있곤 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잠시 쉬면 괜찮아져요. 아무도 방해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부의는 평범한 사람의 눈엔 아주 신비한 존재였기에, 정아는 의심하지 않고 급히 사람을 불러 아혜를 조용한 방으로 부축하게 했다.
사방에 아무도 없어지자, 아혜의 낯빛이 점점 돌아왔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앉아 작게 말했다.
“정미, 너야?”
잠시 후,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야.」
아혜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믿을 수 없네. 계속 내 몸 안에 있었다니. 정말 궁금해. 어떻게 나를 속인 거야? 내가 네 몸을 차지했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검사해봤는데.”
「내가 네 궁금증을 해소해줄 필욘 없지. 아혜, 정말 내 몸을 차지하고 돌려주지 않을 셈이야?」
정미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무슨 목적이었든 간에, 자신이 궁지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니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아혜가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계집, 아직도 순진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