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정교(程嬌)
그곳은 사람 키의 반쯤 되는 담이 둘러싸인 아주 낡은 집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더욱 황량해 보였다.
아혜는 담벼락 너머에서 넋을 놓고 한참 동안 그 집을 쳐다보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부서진 담장을 넘어가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조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뒤로 돌아갔다.
그곳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이끼가 가득 낀 벽돌이 작고 낮은 담을 이룬 채였다.
아혜는 그곳으로 달려갔고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들어 양손으로 이끼를 걷어냈다. 그러자 회색 벽돌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백 년이 넘은 벽돌은 당연히 심하게 훼손되어있었고, 그중 하나에는 희미한 흠집이 남아있었다. 자세히 보면 하나의 글자처럼 보였지만 어떤 글자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혜는 그 글자를 알고 있었다.
‘영(靈)’이라는 글자였다.
이 집은 아주 오래전 아혜가 살던 곳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 연못을 만들어 오라버니가 잡아 온 물고기를 키우자고 했다. 가족들의 식사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웃집에는 ‘영이’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자주 놀러 와 아혜가 기르는 물고기를 구경했다. 그러다 점점 친해져 영이에게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았고, 영이는 이 벽돌에 ‘영(靈)’자를 새겨 보여주었다.
‘역시, 여긴 내 집이었구나.’
아혜는 일어나 집 앞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미 녹이 잔뜩 슬어버린 자물쇠를 무시하고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했던 감각이 점점 또렷해지자, 아혜는 곧바로 규방으로 달려갔다.
사실 규방이라 하기에도 조금 우스웠다. 그 방은 그저 주실 옆의 아주 작은 방이었고, 창문도 한 척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그래도 아혜는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오라버니와 함께 모두 한 방에서 비좁게 살았으니.
문발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작은 방 안엔 먼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곳곳엔 거미줄이 처져 있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아혜의 얼굴 앞에서 장난스럽게 흔들거렸다.
아혜는 거미를 튕겨내고는 침상 머리맡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엔 이미 침상이 없었지만, 아혜는 그 침상에 누웠을 때 명치에 해당하는 부근에 쭈그려 앉아 바닥을 계속 쓰다듬었다.
잠시 후, 아혜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비수를 꺼내 그곳을 파냈다.
한 번, 또 한 번, 아혜는 피곤함도 잊은 채 계속 바닥을 파냈다. 너무 힘을 준 탓에 비수의 손잡이에 손바닥이 쓸려 피가 점점 배어 나왔지만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반 시진 후, 3척 정도 되는 구멍이 파였고, 아혜는 그 안에서 작은 단지를 꺼냈다.
아혜는 색이 다 바래진 단지를 안고 잠시 쉬었다. 그러다 이를 악물고 단지를 연 뒤 손을 집어넣더니, 잠시 후 어떤 물건을 꺼냈다.
아혜는 그 물건을 꽉 쥔 채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야 천천히 손을 폈는데 손바닥엔 작은 뼛조각이 있었다.
아혜는 그 뼛조각을 보며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를 만났구나. 내 목숨과 가문의 영광을 맞바꾸고, 내가 죽은 뒤에 소란을 일으킬까 봐 내 영골(靈骨)을 생전 거처에 묻어버려 원혼으로 나타나지도 못하게 하다니. 만약 그 팔찌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여기에 속박되어있었겠지. 진작에 떠올렸어야 했는데. 그 바보 같은 계집의 성도 정씨였잖아. 게다가 부의가 세운 가문인 회인백부라는데!’
아혜의 가슴에 한이 사무쳤다. 그녀는 영골을 잘 보관해둔 뒤, 밖으로 달려나갔다.
‘만약 내 기억이 맞다면, 죽림 뒤에는 정가의 사당이 있었어!’
죽림을 지나자, 수수하면서 고풍스러운 사당이 아혜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혜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혜의 영골이 빛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조택은 백 년 동안 보수하지 않아 여전히 그녀가 살던 때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사당은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정가는 그저 몰락한 집안일 뿐이었기에, 사당에 비나 새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낡은 조택은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사당은 육십 대로 보이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인이 지키고 있었다.
한 집안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바로 가문의 사당이었다. 아무리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더라도 모두 어려서부터 사당 근처에서 놀거나 장난치면 안 된다는 훈계를 받으며, 여자아이는 더욱 간곡히 타일러 절대 사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정가의 사당은 금지(禁地)가 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지키고 있을 필요도, 굳이 쳐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정미가 아혜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아혜는 사당을 지키는 노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미는 머리가 몹시 아파 왔다.
‘하늘이시여, 아혜가 계속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내가 몸을 되찾게 되더라도 정가에 발붙일 수가 없게 된다고요!’
그 눈먼 노인은 바닥에 쓰러져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미는 그 노인을 도울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일단 아혜를 따라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둘이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정철도 이곳에 도착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노인을 본 정철은 그를 급히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생(笙)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노인은 열심히 눈을 뜨고 정철을 쳐다보았으나 결국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정씨 집안의 자식이리라 생각하고 급히 말했다.
“어서, 어떤 사람이 사당에 들어갔다. 여자아이인 것 같았어! 얘야, 어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오거라. 사당엔 여인이 들어갈 수 없으니!”
그 말을 듣자마자 정철은 노인을 두고 급히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혜는 사당 안에 가득한 위패를 멍하니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첫 번째 위패, 무정하면서도 냉혈한 자신의 아버지이자, 초대 회인백이었다.
그리고 그 옆을 본 순간, 아혜는 멍해졌다.
옆에는 작은 위패가 있었고, 사당 안의 위패들 중 가장 특이했다. 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초대 회인백의 딸, 정교(程嬌)]
아혜는 그 위패를 덥석 집어 들고는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회인백은 무슨. 명성이 자자한 부의는 무슨! 이 모든 건 나 아혜의 피와 뼈로 이룬 것 아닌가. 내 목숨으로 정가 일족이 백 년 동안 흥성할 수 있었으면서! 하지만 이 사실은 이미 죽은 지 백 년이나 된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만이 알고 있겠지. 정교의 소명(小名)이 아혜라는 것을 말이야.
나는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딸이었어.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거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지. 아버지가 왕진을 갈 땐 오라버니들이 아닌, 나만 데리고 가셨거든.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나서도 이 신통한 능력을 아들이 아닌 딸에게 물려주겠다 하셨고.
하지만 누가 알겠어. 진정 부술을 알던 사람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아버지가 아니라, 나 정교이었음을! 난 이 모든 걸 망쳐야겠어. 반드시 다 망쳐야겠다고! 어째서 바보처럼 아버지를 굳게 믿었던 걸까. 나를 이용해 미명과 지위를 얻은 것도 모자라, 내 정혈을 다 써서 태자를 살리게 할 줄도 모르고!
난 그저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며, 내 능력으로 우리 가족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리고 용(容)씨 태자는 내 목숨을 빌려 살아남았으니, 백 년이 지난 지금 이젠 그들에게 이 모든 걸 돌려받아야겠어!’
아혜의 눈빛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드러났다. 그녀는 소매를 휘둘러 위패들을 쓰러뜨렸다.
“미미,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정철이 달려와 아혜를 붙잡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양기와 참을 수 없는 격분이 뒤엉키자, 아혜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정미는 기뻐하며 곧바로 아혜의 미간으로 들어갔다.
* * *
정미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이미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정철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드디어 깨어났구나.”
아혜는 담담하게 ‘응.’하고 대답했다.
정미는 조용히 자신을 숨겼다.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느라 정미도 힘을 많이 썼고, 지금으로선 아혜의 혼을 밀어내고 몸을 완전히 되찾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생사를 겪고 나니 정미는 스스로 인내심과 기다림을 깨우쳤다.
“미미, 오라버니에게 말해주면 안 될까? 오늘 도대체 왜 그랬어? 조택과 사당에 들어가다니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혜가 물었다.
“내가 큰 사고를 친 거야?”
“걱정 마, 오라버니가 잘 처리했어. 그저 네가 갑자기 그러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 미미, 솔직히 말해줘. 절벽에서 떨어진 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거야?”
아혜는 뜨끔하여 시선을 피했다.
“별일 없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저 절벽에서 떨어진 경험이 너무 무서웠는지 자주 악몽을 꾸고, 가끔 내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을 뿐이야. 오라버니, 나 피곤해. 잘래.”
“그래, 알았어.”
정철은 아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미는 혹시나 아혜에게 들킬까 봐 자신의 몸속에서 최대한 조용히 있었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오라버니는 내가 꿈속에서 했던 말을 의심하지 않는 건가? 그래, 그땐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으니까. 그 짧은 꿈 하나를 어찌 마음에 담아두겠어.’
* * *
두 남매는 긴 침묵 속에 백부로 돌아갔고, 정철은 국랑의 일을 한 씨에게 알렸다.
한 씨는 국랑에게 별다른 인상이 없었기에 몇 번 탄식하고는 아혜에게 당부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말렴. 저녁에 작은 주방에 보양식을 준비하라 할 테니, 여기서 식사하거라.”
자신과 회인백부의 인연을 정확히 알게 된 아혜는 앞으로의 복수를 위해 한 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역시 어머니께서 절 제일 신경 써주시네요.”
정미가 모처럼 자신에게 친근히 대하자, 한 씨는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철아, 너도 저녁에 오거라.”
아혜의 웃음기가 살짝 굳어졌다가 빠르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철은 아혜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자, 노을이 마치 불꽃처럼 하늘을 장식하고 매미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시끄러웠다.
이연원의 식당 안에는 얼음 분경(*盆景: 분 위에 돌이나 모래 따위로 자연의 풍경처럼 꾸민 것)이 놓여있어 아주 시원했다.
정갈한 반찬이 하나씩 상에 오르고 목이버섯 무침과 푸른 채소들이 놓였다. 생선이나 고기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날씨가 덥다 보니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정철은 가장 마지막으로 이연원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오자, 한 씨가 웃으며 말했다.
“철아,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나와 네 동생이 먼저 먹었을 거다.”
“제가 늦었지요.”
정철이 대답하며 찬합 하나를 식탁에 올려놓고 풀기 시작했다.
“이게 뭐니?”
한 씨가 물었다.
정철은 찬합 안의 음식을 꺼냈다. 아주 맛있어 보이는 대추떡이었다.
정철이 설명했다.
“정미가 대추떡을 아주 좋아하니까요. 아들이 직접 만들어왔습니다. 혈기도 보충할 수 있고요.”
한 씨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가 대추떡을 좋아하긴 하지. 철아, 역시 네가 세심하구나.”
한 씨가 직접 대추떡 하나를 집어 아혜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따뜻할 때 먹거라. 네 오라버니의 성의를 저버리지 말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고마워, 오라버니.”
아혜가 대추떡을 집어 한입 물더니 방긋 웃었다.
“부드럽고 달아요. 맛있어요.”
‘팔찌 안에서 백 년을 고생했더니, 이 대추떡은 물론이고, 싸구려 찐빵이라도 맛있게 느껴지네! 대추떡이 정미가 좋아하는 간식이라면 더 많이 먹어야겠어.’
정철은 웃으며 아혜가 대추떡을 한입씩 베어 먹는 걸 쳐다보다가, 아혜의 앞에 놓인 접시가 깨끗한 것을 보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미미가 대추떡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대추떡 안의 대추는 절대 먹지 않았는데…….’
늘 딸과 소원했던 한 씨는 정미의 이 사소한 식습관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미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철은 달랐다. 그는 심지어 여동생의 초경까지도 나서서 처리해주었으니…….
이 생각이 떠오르자, 정철은 귀밑이 붉어지며 시선을 피했다.
이후 각자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