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꿈에 들다
둘째 조부님댁으로 가는 길, 정철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미미, 오늘 그 말은 해선 안 됐어.”
아혜는 사방의 경치를 둘러보며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
“왜?”
정철은 아혜가 보는 곳을 따라 쳐다봤지만, 별로 특별한 게 없자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다섯째 형수님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여자아이라고 말하면, 앞으로의 생활이 아마 엄청 힘들어질 거야.”
아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두 달 후에 아이가 태어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거 아냐?”
“그것과는 다르지.”
정철이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론, 여자아이더라도 그 집 형편이면 아이를 익사시키진 않겠으나, 아직 배 속에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정철은 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듯한 아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미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좀 달라진 거 같아. 어쩔 땐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낯선 사람 같기도 해. 하지만 어릴 때부터 봐왔던 미미인 걸.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철은 이 일이 매일 밤 꾸는 황당한 꿈보다 더 두려웠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그 여자애는 분명히 지금 내 눈앞에 있어.’
* * *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둘째 조부님의 집에 도착했다.
둘째 조부의 식구는 많지 않았기에 아홉째 당숙네보다 훨씬 쾌적했다. 아혜는 그곳을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지만, 조급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정철의 말을 따라 쉬러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떠들썩한 소리에 아혜는 잠에서 깨어났다.
“미 고모, 미 고모, 어디 계세요?”
그 소리에 정미는 곧바로 날아왔고, 신제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둘째 조부님의 며느리 승 숙모가 신제를 붙잡고 물었다.
“신제, 무슨 일이야?”
하지만 신제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정미를 불러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정철도 마당으로 나왔다.
신제는 정철을 보자마자, 지푸라기를 잡은 듯 뛰어들어 엉엉 울었다.
“숙부님, 미 고모는요?”
“신제, 천천히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희 어머니가, 저희 어머니가 아버지께 밀쳐졌는데, 피를 아주 많이 흘리고 계세요. 미 고모,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이 소란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둘째 조부네 집 입구에서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아혜가 걸어 나왔다.
신제의 눈이 반짝이더니 정철을 뿌리치고 달려가 아혜를 붙잡았다.
“미 고모, 어서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그러나 아혜가 손을 빼내며 말했다.
“살릴 수 없어.”
정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혜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죽어가는 걸 보고도 구하지 않을 셈인가?’
아혜는 겉옷을 걸치고 나왔지만 누가 봐도 방금 잠에서 깬 모습이었다. 그녀는 신제의 충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철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살아남기 위해 원기를 아주 많이 썼어. 그래서 지금은 부적을 만들 힘이 남아있지 않아. 몸이 버티지 못할 거야.”
정철이 아무리 국랑을 안타깝게 여기더라도, 이를 위해 여동생의 몸을 해치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는 아혜의 말에 신제를 붙잡으며 말했다.
“신제, 숙부님이 함께 가주마. 마을의 의원 말고, 사람을 보내 진(鎭)의 가장 뛰어난 의원과 산파도 모셔오자.”
신제는 창백한 얼굴로 정철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간절히 애원했다.
“미 고모, 고모님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알아요. 제발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앞으로 저를 어떻게 부려 먹어도 좋으니―”
하지만 아혜는 목이 쉬도록 애원하는 신제를 두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굳이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아. 하지만 이제 막 몸을 차지한 탓에 아직 혼과 몸이 완전히 적응되지도 않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쉽게 나설 순 없잖아?’
한편 정미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정철을 따라갔다.
* * *
정미는 그날 밤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핏물이 담긴 대야가 끊임없이 밖으로 옮겨졌고, 귓가엔 국랑의 비명소리와 신제 자매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정철은 꽤 많은 돈을 써서 의원과 산파를 몇 명이나 불렀지만 그들의 절박함은 결국 침묵과 한숨만 남게 되었다.
날이 막 밝아왔을 때, 국랑은 네 근도 되지 않는 여린 여자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를 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정오랑은 늘 난폭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문틀을 잡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곽 씨는 산파가 건넨 쭈글쭈글한 손녀를 받다가 국랑의 죽음을 전해 듣자 품에 안긴 아기가 재수 없다고 느껴 곧바로 신제에게 넘겨주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신제의 두 여동생은 목이 쉬도록 울부짖으며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신제는 울지 않았다. 그저 휘청거리며 새로 태어난 여동생을 안고 있다가 조용히 방 입구로 걸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안을 바라봤다.
국랑은 정오랑에게 밀쳐져 넘어지는 바람에 배가 계단에 부딪혀 조산했다. 난산으로 죽은 부인의 모습은 특히나 처참했다.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동네 부인이 신제를 잡아당겼다.
“신제야, 그만 보거라. 넌 아직 어린 아이잖니.”
부인이 신제를 밖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신제는 발에 뿌리라도 돋은 듯 꿈쩍도 하지 않고 국랑을 빤히 쳐다봤다.
국랑은 낡은 침상 위에 누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땀과 핏물에 흠뻑 젖어 마치 시든 수초가 엉망으로 쌓여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높게 솟아 올라있던 복부는 이미 꺼져있었고, 손톱이 다 피범벅이 된 두 손은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신제는 한 손으로는 여동생을 안고 남은 한 손은 방 안으로 뻗었다. 이미 쉬어버린 목에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나 겨우 바싹 마른 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정미는 신제 옆으로 날아가 신제를 쳐다보았다. 마음이 몹시 아파왔다.
‘역시 내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구나. 아혜가 내 몸을 차지하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차라리 내 몸이 흙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정미는 참지 못하고 국랑을 쳐다봤다.
‘이날을 기억해야 해. 앞으로 국랑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아혜에게서 몸을 되찾는 원동력이 될 거야.’
그때, 국랑이 일어나 앉았다.
정미는 눈을 비볐다.
그것은 정미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국랑은 정말로 일어나 앉았다가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정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뒤돌아봤으나, 국랑의 몸은 여전히 낡은 침상 위에 무참히 누워있었다.
정미는 깨달았다.
‘저건 나와 같은, 국랑의 영혼이구나.’
정미도 사실 계속 이상하게 여겨왔다. 이치대로라면 자신이 영혼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다른 이의 영혼은 국랑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랑은 눈 깜짝할 새 입구에 도착했고, 정미를 보아도 멍한 표정이었다.
정미가 그녀를 ‘다섯째 올케언니’하고 불렀다. 하지만 국랑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국랑’이라고도 불러보았다.
국랑은 꿈에서 깨어난 듯 울부짖는 딸들을 한 번 쳐다보았고, 정미를 데리고는 마당의 물독 옆의 그늘로 숨었다.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왜 여기 숨는 거예요?”
영혼이 된 국랑은 생전보다 훨씬 수려해 보였다. 그녀는 정미에게 되물었다.
“빛이 무섭지 않으세요?”
정미는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난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아. 설마 망령이라면 다 빛을 무서워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아가씨는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계시더니…….”
국랑은 딸들에 대한 미련보다 정미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한듯했다.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국랑을 보자, 정미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얼마 전 저는 절벽에서 떨어졌고 그때 죽었어요. 어제 국랑이 본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다른 영혼이 제 몸을 차지한 거예요. 그래서 무심코 당신이 가진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걸 말한 거고요.”
늘 침착하던 국랑은 이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정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아가씨의 몸을 차지한 고혼이 저를 해친 거지요? 그렇지요?”
정미는 말문이 막혔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혜도 고의로 국랑을 해친 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 하지만 국랑의 죽음은 아혜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이게 바로 ‘백인을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커서 죄책감을 느낀다’는(*伯仁由我而死백인유아이사) 건가?’
“그 고혼이 왜 아가씨의 몸을 차지한 건가요? 그게 제 딸도 해칠 수 있나요?”
국랑이 무서운 표정으로 정미에게 물었다.
검은 기운이 국랑의 몸을 감쌌다.
“그건 저도 몰라요. 그 사람이 제 몸을 차지하고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저도 몰라요.”
온몸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던 국랑이 갑자기 정미의 손을 놓고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요. 저는 가야겠어요. 가야겠습니다.”
정미가 급히 물었다.
“가야 한다고요? 어디를요?”
국랑은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다시 정미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세요!”
정미가 멈칫한 사이, 국랑은 손가락으로 정미의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정미는 반항하려 했지만, 미간에서 몸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에 왠지 모르게 상쾌해졌으며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찰나의 시간이었는지 한참이었는진 모르겠지만, 국랑이 마침내 손가락을 뗐다.
국랑은 아주 투명해져 있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가씨는 생혼(生魂)이군요. 그래서 이렇게 머무를 수 있는 거였어요. 저는 이만 가봐야 해요. 제 딸들을 부탁드릴게요.”
국랑이 말을 마쳤을 땐 이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은 채였다.
정미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국랑이 뭘 했는진 모르겠지만 힘이 솟아나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국랑이 내가 몸을 되찾아오는 걸 도와준 건가?’
정미는 이 결론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신제를 한 번 쳐다보고는 정철의 곁으로 날아갔다.
‘지금은 확신할 수 있어. 둘째 오라버니의 꿈에서 소통할 수 있을 거야. 오라버니가 최대한 일찍 잠에 들면 좋을 텐데.’
* * *
정철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국랑의 뒤처리를 도운 뒤, 동이 뜰 때쯤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오라버니―”
정철의 귀에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철은 번쩍 눈을 떴고 곧 진지한 표정의 정미를 볼 수 있었다.
정철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내가 아는 미미야!’
“오라버니, 내가 아냐―”
정미는 겨우 이 말을 남긴 채 정철의 꿈에서 튕겨 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나가떨어져 숨을 헐떡였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영혼과 사람이 소통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구나. 그리고 지금은 밝은 대낮이니 설상가상이나 다름없어. 만약 국랑의 도움이 없었다면 꿈에 들어가는 것조차 못했을 거야. 그럼, 밤이 되었을 때 다시 시도해보면 좀 나을지도 몰라.’
국랑의 힘을 얻은 정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나약했는지 깨달았다.
‘양기를 며칠 흡수하면 오라버니와 소통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었어. 이전의 힘이었다면 낮에 꿈에 들어갈 수 있더라도, 오라버니는 그저 나를 볼 수만 있을 뿐 말할 수 있을 때까진 한참이 걸렸을 거야.’
“미미―”
정철은 곧바로 눈을 떴다. 눈앞에 분주히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고,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자 그제야 그것이 그저 꿈이었다는걸 깨달았다.
“내가 아냐…….”
정철은 정미가 했던 말을 계속 되뇌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의 꿈은 결코 평범한 꿈이 아니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일어나 둘째 조부님댁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하고 보니 정미는 이른 아침부터 마을을 둘러보러 나갔다고 했다.
정철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고 느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족인들이고, 사람이 죽은 건 온 마을의 큰일이었다.
‘삶과 죽음을 모르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구경은커녕 한 걸음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야. 미미는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간 거지?’
정철을 따라온 정미는 아혜가 없다는 말을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깨달았다.
‘조택, 아혜는 분명 조택으로 갔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