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정가촌
소매는 글썽이는 눈을 들어 정철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정철에게 반항하는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정철은 담담하게 소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평소의 닿을 수 없는 듯한 고귀함은 덜해진 채로 진실함만이 가득했다.
“소매, 오늘 일은 내가 사과하마. 잠시 잘못 생각했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거라.”
소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요, 가지 않을 거예요. 소인은 이해할 수 없습―”
그러자 정철이 손을 들어 소매의 말을 끊었다.
“그럼 오늘 정확히 말해두지.”
정철은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의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넌 좋은 아이지. 착실한 사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갈 가치가 있다. 내 곁에서 아무 존재감 없는 통방이 되는 게 아니라.”
“공자님, 소인은 상관없습니다. 소인은 공자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소매가 다급하게 말했으나 정철은 그녀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다.
“난 내 아내가 아닌 사람과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다. 그러니 굳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칠 필요도 없지. 아무리 네가 그저 여종일 뿐이라도, 좋은 사내를 만나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평생을 이 집안에 바칠 게 아니라. 내가 혼인하게 되면, 네게 좋은 거처를 찾아주마.”
그 말에 소매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쏟아냈다.
정철은 그런 소매를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후, 소매가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공자님,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소매는 정철을 빤히 쳐다봤다. 눈빛에는 충격, 슬픔, 감격, 석연함이 묻어나왔으나 그 안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대감이 담겨있지 않았다.
‘공자께선 날 거절하셨고, 다른 주인들처럼 통방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도 주지 않으셨어. 하지만 왜 나는 공자님이 진정한 사내라고 느껴지는 걸까?’
소매는 문을 닫고 나갔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럼, 오라버니는 한 번도 소매를 건드리지 않은 거야?’
정미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철에게로 달려들어 목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을 보자, 기쁨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입가엔 쓴웃음만 남았다.
‘내가 기뻐해봤자 오라버니는 이미 정혼했고, 내년 봄이면 충정후부의 큰아가씨와 혼인하겠지.’
정미에겐 정철과 함께하는 것보다 그의 속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오라버니와 나의 신분으로 평생 함께하는 건 헛된 꿈이라는 걸 어찌 모르겠어?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하고, 오라버니가 나를 좋아하잖아. 이걸로도 충분해. 만약 몸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오라버니가 혼인한 뒤 나는 현청관으로 가 도사가 될래. 그리고 현청관의 수석 제자가 되면, 누구도 오라버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정미는 정철의 목에 매달려 그를 쳐다봤다.
‘어쨌든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정미는 다가가 정철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만족한 듯 숨을 내뱉고는 날이 밝아올 때쯤 천천히 떠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정철과 아혜는 옷차림을 갖추고 마차에 올라 정가촌으로 향했다.
아혜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객실의 한쪽 구석에 앉아 정철을 멀리 피했다.
정철은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아혜를 쳐다보지 못했고,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벽에 기대 잠들었다.
정미는 아쉬워하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 낮인 게 아쉽네. 오라버니가 잠들긴 했지만, 양기를 빨아들여도 효과가 훨씬 떨어질 거야.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겠어.’
정미는 정철을 자세히 쳐다봤다. 그의 두 눈은 지그시 감겨있었고,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워 눈 밑의 검푸른 색이 더욱 돋보였다.
정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 게, 설마 내가 양기를 너무 많이 빨아들여서인가? 오늘 밤엔 오라버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양기를 고려해봐야 한다고.’
정가촌은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보통의 속도라면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정철은 정미의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을까 봐 일부러 마부에게 속도를 낮추라고 했던 탓에, 정가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였다.
정가촌은 정가 일족의 집결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지 백 년이 넘어 이미 꽤 큰 규모가 되었다. 아혜는 마차에서 내린 뒤 그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왠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니?”
정철이 고개를 돌리고 아혜에게 묻자, 아혜가 웃으며 말했다.
“수도의 경치만 보다가 오니까, 우리 마을이 색다르게 느껴져서.”
“가자, 처음 와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정철과 아혜는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때는 마침 마을 사람들이 점심 식사 후 나와서 바람을 쐬는 시간이었기에, 풀밭 곳곳에 부채를 흔들며 휴식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정철 남매를 보자마자 다가와 둘러싸고 인사를 건넸다.
“열셋째야, 또 왔구나.”
“잘 돌아왔네, 잘 돌아왔어. 우리 마을의 아들들에게 좋은 기운을 좀 나눠주게. 또 장원에 급제할 수 있게 말이야.”
“정미는 클수록 예뻐지는구나. 얘야, 정미는 정혼했니? 이렇게 예쁜 아가씨면 궁에 들어가 마마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아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철은 전혀 싫은 기색 없이 웃으며 족인들과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셋째 오라버니!”
눈 깜짝할 새 한 소녀가 빠르게 달려와 빛나는 눈으로 정철을 쳐다보았다. 정영이었다.
“오라버니, 점심은 먹었어? 나랑 집에 가서 밥 먹자. 마침 우리 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닭을 두 마리나 잡았거든.”
그러자 어떤 사람이 빈정거렸다.
“오, 영이 너희 집은 참 통이 크구나. 한 번에 두 마리나 잡다니.”
정영이 받아쳤다.
“당연하지요. 우리 올케언니가 곧 있으면 아이를 낳는다고요. 우리 어머니께서 몸보신을 잘 해줘야 한다고 했어요.”
어떤 부인이 맞장구쳤다.
“그래, 몸보신을 잘해야지. 너희 어머니가 사내아이 같다고 하더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마친 정영이 정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가자.”
하지만 정철은 미동 없이 옅게 웃었다.
“우선 둘째 조부님을 뵙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정영은 내키지 않는 듯 아혜를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오라버니, 정미 좀 봐. 안색이 별로 좋지 않잖아. 둘째 할아버지 댁은 여기서 꽤 먼데, 우선 우리 집에서 잠깐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 정미가 더위 먹으면 큰일이잖아.”
정영의 말은 정철의 약점을 건드렸다. 그는 아혜를 쳐다봤다. 아혜의 안색은 정말로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정철은 정영의 집으로 향했다.
정구백네 들어서자, 정영이 신나서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 열셋째 오라버니가 왔어요.”
그러자 한 소녀가 달려 나와 정철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다정하게 아혜의 팔짱을 꼈다.
“미 고모, 오셨군요. 보고 싶었어요.”
아혜는 침착하게 손을 빼며 속으로 의아해했다.
“그래?”
아혜는 처음엔 정미의 허락이 없으면 바깥세상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미가 자신의 정혈로 부적을 만들고, 원기가 점점 소모될수록 아혜에게 기회가 생겼고, 바깥세상을 점점 더 많이 감지할 수 있었다.
아혜는 원래 그 멍청한 계집의 원기가 거의 다 소모되었을 때 몸을 차지하려던 작정이었다. 그럼 자신의 허약한 혼도, 이 몸도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멍청한 계집이 절벽에서 떨어지다니. 모든 게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었지만, 폐해도 있었다.
“미 고모, 왜 그러세요?”
신제는 어린 고모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가 다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아혜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정철은 아혜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와 최근 꾼 꿈 때문에 어색했던 것도 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서 들어가자.”
이번엔 정구백의 두 아들도 집에 있었고, 며느리와 손자 손녀까지 모두 정미와 정철을 둘러싸 떠들썩했다.
아혜는 수박을 들고 조금씩 베어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제는 수시로 몰래 그녀를 한 번씩 쳐다보며 기쁘면서도 실망스러워했다.
‘미 고모가 내게 냉담해진 것 같아.’
곽 씨는 정미의 자태가 갈수록 고와지자, 그녀와 신제와의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기뻐하며 말했다.
“정미야, 신제가 얼마나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원래 이 애를 데리고 백부로 가려고 했는데, 최근 백부에 일이 많아 혹시나 폐를 끼치게 될까 싶어 가지 않았단다.”
정영도 모처럼 아혜에게 다가와 말했다.
“정미, 정요 언니가 정말 교외 마을에서 병으로 죽은 거야?”
정요를 보냈던 마을은 백부가 교외에 사두었던 작은 마을이었고, 그곳은 정영도 가본 적이 있었다.
아혜의 표정이 굳었다.
“거짓말일 리가.”
곽 씨는 정영의 말솜씨에 짜증이 났고, 눈을 돌리자마자 마침 큰며느리 국랑이 보여 아혜의 손을 붙잡고 기대하며 물었다.
“정미야, 국랑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남자아이냐, 여자아이냐? 너에 관한 건 나도 일찍이 전해 들었단다. 정말 대단하더구나. 그러니 이것도 당연히 알아볼 수 있겠지.”
아혜는 이 사람들 모두가 낯설었기에 그리 대꾸하고 싶지 않았으나, 국랑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여자아이예요.”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미는 대경실색했다.
예전에 국랑이 자신에게 몰래 이걸 물었을 때, 정미는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알지 못한다고 발뺌했던 바 있었다.
정미는 이 집 일가가 태어날 손녀를 예뻐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국랑이 회임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좋은 보살핌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아이를 낳은 뒤로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살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혜는 아무 생각 없이 진실을 말하고 만 것이다.
‘네가 아무렇게 내뱉은 말에 국랑 모녀가 다칠 거라고!’
곽 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정미야, 그 말이 사실이냐? 그럴 리가, 국랑의 이번 아이는 배가 뾰족하고, 걷는 자세를 보면 사내아이 같은걸. 마을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단다.”
아혜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빼며 담담하게 말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낳을 때까지 기다려보세요.”
아혜의 태연한 태도에 곽 씨는 여전히 이 사실을 믿고 싶진 않았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곽 씨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국랑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멍하니 아혜를 쳐다봤다.
‘여자아이라고? 그땐 분명 못 알아본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여자아이라는 거지?’
국랑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져갔다.
“어머니―”
신제가 재빨리 달려가 국랑을 부축했다.
“왜 그러세요?”
국랑은 당황하며 곽 씨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말했다.
“난 괜찮다.”
곽 씨는 또 딸을 낳을 며느리에게 보일 조금의 인내심도 남아 있지 않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서 방으로 꺼지지 않고 뭐 하느냐. 망신이나 주고 말이야!”
신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혜를 빠르게 한 번 쳐다본 뒤, 국랑을 부축해 급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 둘째 며느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진정하세요. 큰형수님은 지금 제일 중요한 시기잖아요.”
“어차피 또 딸인데 뭐가 중요하다는 거니? 퉤!”
격분한 곽 씨의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혜는 눈살을 찌푸리며 옆으로 피했다.
정영은 정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를 조용히 잡아당겼다.
“어머니, 열셋째 오라버니네 앞에서 그러지 마세요.”
곽 씨는 그제야 씩씩대며 입을 다물었지만,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정철은 여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여동생의 한마디가 국랑에게 화를 불러올까 봐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거들었다.
“당숙모님,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사실 다 똑같답니다. 저와 정미가 철들고 총명한 신제를 제일 좋아하는 것처럼요. 게다가 당숙부와 당숙모께서 이렇게 유능하시고, 다섯째 형수님도 부지런한 분이시니, 아이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곽 씨는 차마 정철의 말을 반박할 수 없어 억지로 대답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둘째 오라버니, 나 다 쉬었어. 둘째 조부님댁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혜가 이곳에 오는 걸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느 한 곳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이상한 점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당연히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다 쉬었어?”
“응.”
곽 씨와 다른 사람들이 더 머물라 만류했지만, 정철은 예의 있게 거절하고 아혜와 함께 그 집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