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꿈
정철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내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며칠 동안 몹시 피곤했다.
정철이 깊게 잠들고, 밤이 짙어지자 모두가 꿈나라로 떠난 듯 고요했다. 오직 짜증 나는 매미 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정미는 오히려 그 시끄러운 소리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매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오라버니를 볼 수 있으니, 이 처지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정미는 침상 머리맡에 서서 정철을 바라보며 조금 망설였다.
천지는 음양으로 나뉘고, 음양이 조화되어야만 끊임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은 음양의 균형을 이루는 몸이기에, 사람이 죽으면 남은 혼은 음만 남게 된다. 양이 없으니, 영혼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있지만, 주변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 한다.
‘만약 영혼이 양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럼 살아있는 사람에게 조금의 신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바로 아혜와 백발 사내의 대화 속에서 정미가 추측해낸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정철을 바라봤다.
‘어쨌든 처음 입맞춤해보는 것도 아닌데, 오라버니의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는 정도로 무슨 일이 있진 않겠지?’
정미는 정철의 속마음을 알게 된 뒤로, 정철에게 입맞춤하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도 망설이는 이유는 혹시나 정철을 해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오라버니에게서 양기를 얻지 않으면, 다른 사내를 찾아야 하는데 그건 절대 할 수 없어.’
아혜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정미는 조용히 ‘미안해’라고 말하고는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사실 정미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알지 못했지만, 영혼의 본능인 건지 저도 모르게 깊게 한 모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순간 열기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온몸으로 열기가 흘러 들어가 퍼져나갔다.
정미는 기뻐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숨을 크게 크게 들이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심코 눈을 뜨자 정철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려있어 정미는 순간 깜짝 놀라 급히 떨어져나와 침상 머리맡의 난간에 앉아 조심스럽게 정철을 살펴봤다. 그러자 정철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며 혈색이 돌아왔다. 정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차마 양기를 더 흡수하진 못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내일 밤 다시 하면 돼.’
정미는 정철을 다시 한번 쳐다보다가 창문으로 날아 비서거로 돌아갔다.
정철은 이날 밤, 미묘한 꿈을 꾸었다.
누군가 그의 입술을 머금고 있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제멋대로 돌진하면서도 풋풋하고 열정적이었다. 그 느낌은 익숙하고도 미묘해서 정철은 온몸에 전율이 일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철은 벌떡 일어나 창밖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이제 막 밝아오고 있었다.
‘꿈이었구나!’
정철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느껴져 손을 뻗어 더듬어보았고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정철은 침상에서 내려와, 옷궤 안에서 아무 중의(*中衣: 남자의 여름 홑바지)이나 꺼내 재빨리 갈아입고 방에서 나갔다.
“일어나셨습니까.”
소매는 문밖 복도에 서 있다가 정철을 보자마자 맞이했다.
정철은 어두운 표정으로 소매에게 명령했다.
“물을 길어오거라. 목욕을 해야겠다.”
소매는 어리둥절했다.
소매는 정철의 습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세수와 양치질을 한 후, 창법을 연습하며 땀을 뻘뻘 흘린 뒤에야 돌아와 목욕하곤 했다.
하지만 소매는 침착한 자였기에 의문은 마음속에만 두고 급히 대답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곧바로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정철은 굳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6월의 새벽녘은 하루 중 가장 쾌적한 시간대였다. 산들바람에선 아직 약간의 시원함이 느껴졌고, 새들이 나뭇가지 끝에서 노래했으며, 높은 하늘은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정철의 기분은 그와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내가, 내가 그런 황당한 꿈을 꾸다니!’
꿈속에 나타난 사람과 깨어나서 본 것이 떠오를 때마다 정철은 몹시 창피해졌다. 심지어 소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소매는 조용히 정철을 바라보았다.
소매는 왜인진 모르겠지만, 오늘 정철이 평소만큼 온화하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보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자, 목욕물 준비되었습니다.”
소매가 용기를 내어 정철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정철은 정신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소매의 손을 뿌리치더니 무표정으로 그녀를 한 번 흘겨보고는 곧바로 목욕실로 향했다.
소매는 정철의 규칙에 따라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잠시 생각하더니 침실로 들어가 주인의 이불을 정리하기로 했다.
소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킁킁댔다.
정철은 깔끔한 걸 좋아했기에 향료를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방 안은 늘 상쾌했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냄새가 났다.
아주 옅은 냄새였고 왠지 사향 냄새 같기도 했다. 그리 고약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소매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공자께서 향료를 사용하시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이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급히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방 안의 냄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매는 그제야 뒤돌아서 이불을 정리했고, 침상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중의를 보자 어리둥절했다.
‘이건 어젯밤 공자께서 갈아입으신 옷인데. 왜 여기 있지?’
소매는 이불을 정리한 뒤 그 중의를 손에 들고 빨래를 하러 가려 했다. 그런데 그 중의를 들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소매는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손에 쥔 중의를 살펴보다가 놀라 멍해졌다.
소매가 정철을 모신 지는 이미 4년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처녀의 몸이었지만, 어쨌든 정철을 위해 준비된 통방이었기에 주인의 소성년식 이전에 이미 남녀에 대해 많이 배운 상태였다.
소매는 그제야 그 이상한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소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중의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나는 늘 공자께선 속세를 벗어난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공자께서도― 그런데 왜 한 번도 나를 건들지 않으신 거지?’
소매는 생각에 잠긴 채 옷을 껴안고 밖으로 나가다가 마침 목욕을 마치고 나온 정철과 마주쳤다.
소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자, 소인이 옷을 빨아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정철은 재빨리 옷을 빼앗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소매, 앞으로 마음대로 내 방에 들어오지 말거라!”
소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단호한 정철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울먹이며 ‘예’하고 대답하고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정철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옷을 쥔 채 그 옷을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내가 어떻게 그런 황당한 꿈을 꿀 수 있지. 정말 망나니로구나!’
정철은 부끄러움을 견디기 힘들어 차마 정미를 보러 갈 수 없었다.
* * *
이번 시험의 장원인 정철은 한림원의 6품 관직인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번 과거시험이 6월로 미루어지는 바람에,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황제는 바로 문무백관들을 이끌고 청량산으로 떠났다.
정철은 그동안 한림원에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미가 절벽에서 추락했던 일로 마음이 불안해져 평소처럼 친우를 만나러 나가지 않고 서재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꿈’은 매일 밤 찾아왔다. 다행히 처음의 추태 뒤로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제어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았지만, 다음날 일어나면 마치 불판 위에 올려진 듯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정철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서방(*書坊: 옛 서점)으로 가 해몽집을 한 권 샀다. 첫 장을 펼치자, ‘기이한 꿈은 대부분 그 이유가 있고, 아무 이유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夫奇異之夢부기이지몽, 多有收而少無爲者矣다유수이소무위자의)’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정철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미미가 무사히 돌아온 후 매일 그런 꿈을 꾼 게,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다시 아래로 읽어내려가니, ‘낮에 떠오른 것들을 밤에 꿈에서 만나는 것이다.(*所謂日有所思소위일유소사, 夜有所夢者也야유소몽자야)’라고 적혀 있자, 정철은 깜짝 놀라 책을 집어 던졌다.
‘내가 무슨 낮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야!?’
정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끼고는 자신의 뺨을 내리치고 싶어졌다.
이때, 문밖에서 팔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셋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정철은 며칠째 정미를 만나지 않아 왔다.
정철은 잃었다가 겨우 되찾은 동생의 방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냉차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들라 해라.”
정미는 아혜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이어서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혜를 쳐다보는 정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철은 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채 아혜에게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미미, 무슨 일 있니?”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서.”
정미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영혼이 된 이후 가장 큰 장점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신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니, 저도 모르게 마음대로 굴기 시작한 것이다.
정미와는 달리 아혜의 대답은 딱딱했다.
“오라버니에게 볼일이 있어서.”
정미는 경계하기 시작했다.
‘요 며칠 동안 아혜는 전혀 쉬지 않았어. 내가 가지고 놀고 썼던 걸 모두 살펴보고, 몸을 단련한다는 핑계를 대고 환안과 백부를 몇 바퀴 돌기까지 했지. 누가 봐도 나의 모든 걸 익히려는 모습이었어. 지금 오라버니를 찾아온 건, 분명 무슨 목적이 있어서일 거야.’
“무슨 일인데?”
정철이 서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물었다.
“오라버니, 올해 정월에 오라버니가 나를 데리고 화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가, 또 어디로 갔었는지 기억나?”
아혜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속은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그때 아혜는 정미의 몸속에 숨어있어 바깥세상을 볼 수 없었기에 그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왠지 아혜에게 아주 익숙한 느낌을 주었고, 그 익숙함은 가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아혜를 미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정미는 아혜를 아주 경계했고 그곳이 어딘지 조금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 이 몸을 차지했으니, 정철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더라도 이것만은 물어봐야지.’
“정가촌에 갔잖아? 미미, 왜 갑자기 그걸 묻는 거야?”
‘정가촌?’
아혜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새기다가 정철을 보며 웃었다.
“거기가 좋아서. 다시 가서 기분전환 좀 하고 싶어.”
정철은 의아했다.
‘그때 미미는 얼른 마을을 떠나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왜 또 가고 싶다는 거지?’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어. 네 몸이 마을로 가는 길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날씨가 시원해지면 오라버니가 데려가 줄게.”
아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싶어.”
그러자 정철이 아혜를 붙잡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어. 일단 어머니께 보고드리고 난 뒤, 오라버니가 데려가 줄게.”
아혜가 손을 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필요 없다니까. 환안과 화미를 데리고 가면 오라버니도 성가시지 않고.”
“안 돼.”
정철의 말투가 엄격해졌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럼 내 마음이 안 놓여.”
아혜는 정철과 마주 보다가 결국 한걸음 물러섰다.
“알겠어. 오라버니가 가고 싶으면 가. 나는 바로 어머니께 말씀드리러 갈게.”